김태희

1970년대 여대생 관객에 대해서 논문을 써야겠다고 마음먹었던 계기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웹진 <연극in>의 원고를 청탁받아 마니아 관객에 대한 글을 준비하면서였고 다른 하나는 박사논문을 쓰기 위해 1970년대 연극평론을 읽으면서였다. 1960~70년대 극장에 관한 논문을 준비 중이었던 나는, 자료 수집을 위해 당대 활동했던 연극평론가 선생님들의 연극평론집을 차례대로 읽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나의 눈길을 끌었던 것은 연극의 획일화와 관련된 문제제기였다. 사실주의 중심의 대극장 무대에서 벗어나 실험극을 위한 소극장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등장하는 국면에서 연극 형식의 획일화와 관련된 문제 제기는 매우 중요한 것이었고 내 논문에 반드시 필요한 자료들이었다. 그렇지만 정작 내 마음속에 더 큰 충격으로 남았던 것은 아래의 문단이었다.

그나마 극장에 찾아오는 손님은 대개가 대학생으로서 그것도 여학생이 태반이다. 이는 한국연극이 대사회적 영향력의 한계를 옹색할 만큼 제한시켜 버려 교육 정도가 낮은 대다수의 일반 대중과 연극의 가능성을 무한히 확대시켜 줄 수 있는 교육 정도가 높고 사회의 중추를 이루는 샐러리맨, 인테리겐치아 관객을 다같이 잃어버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의 문화가 앞으로 발전하는데 필요한 에너지원이 여자라 한다면 이 또한 심각히 고려해야 할 일이 아닐 수 없다.1

당대 담론에서 ‘연극의 획일화’ 문제는 비단 연극 형식의 문제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관객의 성별, 연령대까지 아우르는 것이었다. 1971년 작성된 위의 평론에서는 대학생 관객의 비중이 높다는 것, 특히 여대생 관객이 태반을 차지하고 있는 관객 구조는 심각한 문제로 받아들이고 있었다.2 충격에서 벗어나 다시 살펴보니 ‘여대생 관객’의 존재를 문제시 삼는 어조들을 신문, 잡지 지면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이들 기사는 대부분 여대생들이 관객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현상을 바람직하지 않은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으며3 연극을 보는 여대생들의 취향을 유치한 것으로 치부하거나4 그들의 관극 행위를 “교양을 위한 액세서리”를 착용하는 행위라고 비하하고 있었다.5

그 후 해당 문단이 다시 기억이 난 건, 마니아 관객의 플랫폼에 대해 글을 쓰기 위해 마니아 관객과 인터뷰를 진행하면서였다. 관극 과정에서 연뮤갤이나 트위터와 같은 플랫폼을 활용하는 방식에 대해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자연스럽게 여성 관객에 대한 멸시와 비하에 관한 논의로 대화가 번져갔다. 당사자들이 느끼기에 여성 관객에 대한 공연 관계자들의 멸시는 공공연했다. 여성 관객을 남성 배우의 외모에만 관심이 있다거나 작품을 보는 눈이 없다고 폄하하는 등,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고 당황스러운 이야기들이었다.

그 이야기들을 정리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하나의 계보가 만들어졌다. 극장을 찾았던 근대 여성 관객에 대한 부정적 어조들, 해방 이후 영화관을 채운 ‘고무신 관객’에 대한 비하, 그리고 1970년대 여대생 관객들에 대한 통탄. 어쩌면 이런 역사들이 결국에는 오늘날 여성 관객에 대한 편견으로 이어지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연극in>에 보낼 원고를 작성하면서, 언젠가는 여대생 관객에 대한 글을 반드시 써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자기 증명 수단으로서의 ‘연극하기’

해방 이후 고등교육이 확대되기 시작했지만 여성 대학생의 숫자는 여전히 적었다. 여성 대학생들은 직접 본인들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기회를 갖기 어려웠고 늘 대상화되곤 했다. 1970년대 고학력 여성에 대한 연구들은, 그들이 경험해야 했던 모순된 상황을 지적하고 있다.

경쟁선발 방식은 여성도 노력하면 곧 고등교육의 기회를 얻을 수 있음을 의미했지만 졸업 이후 취업 과정은 여전히 남성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무엇보다 대학 진학 과정에서 학과의 선택은 여전히 가정 내의 젠더 규범을 따르는 경향이 강했다. 그 시대까지도 한국 가정의 교육 전략은 아들에게 진학의 기회를 제공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중산층 가정의 딸들에게 고등교육의 기회가 제공되더라도 그것은 가정의 경제를 책임지는 것이라기보다는 가족 전략에 따라 좋은 혼처를 구하기 위한 수단인 경우가 많았다. 여학생들의 전공이 예술, 사범, 어문 계열에 편중되었던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그런데 여학생들이 편중되어 있는 전공, 즉 예술계열, 사범계열, 어문계열은 모두 연극과 관련성이 높은 학과들이라는 점에서 흥미롭다. 이화여대의 사례는 해당 전공의 학생들이 어떻게 연극의 관객으로 성장할 수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연출가 김정옥의 기억에 따르면, 이화여대의 경우 각 단과대학마다 연극서클이 있었고 특히 문리대 연극반의 연극 활동이 활발했다.6 이는 당시 학교의 교수진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었는데, 국문과 교수 이헌구, 영문과 교수 김갑순은 연극에 관심이 많았고 이들의 관심은 단순히 연극 서클의 활동을 지도하고 지원하는 수준을 넘어서서 학생들에게 교육의 수단으로서 연극을 활용하는 데에까지 나아가고 있었다. 이화여대 영문과의 경우 이미 이화여전 시절부터 영어 교육의 일환으로 학과 내에서 영어 연극을 시키고 있었고 학생들이 졸업 전에 반드시 영어 연극에 참여하도록 전공 과목이 설계되어 있기도 했다.7 따라서 영어 연극은 졸업을 앞둔 영어영문학과 학부생 전체가 참여하는, 규모가 큰 학내 행사였다. 학생들은 연극에 참여하면서 “진짜 전문 연극인이 된 듯한 착각”에 빠지거나,8 “‘예술’이라는 보물을 잠시 소유해본 것 같은 기쁨과 긍지를 느꼈”고9 이 과정은 “영문과에 대한 소속감을 새롭게 해주는 특별한 경험”으로 작용했다.10

교육의 수단으로 시작된 연극 공연은 단순히 학내 공연에 그치지 않고 자주 학교 울타리를 넘나들곤 했다. 영문과의 영어 연극 관객은 일차적으로 교내 학생들이었지만 인근 학교나 일반 관객들에게도 관극의 기회가 열려 있었다. 학생들은 인근 학교에 공연 포스터를 붙여 홍보를 했고,11 시기에 따라서는 명동 국립극장과 같이 학교 밖 극장에서 공연을 하기도 했다.12 참여자들의 회고에 따르면 영어로 진행되는 공연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영어 연극은 교내외 관객들에게 인기가 많았고, 참여자들은 자신들의 공연 수준에 대해 상당한 자부심을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 연극은 이들이 지식인으로 성장하기 위한 학습 수단이었고 동시에 대외적으로 여성 대학생으로서의 지적역량을 증명해내는 통로가 되었던 셈이다. 이렇게 교내 연극 활동은 여대생들이 참여자나 관객으로서 연극을 접할 수 있는 긍정적인 계기로 작용했고 이들이 자연스럽게 연극 관객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했다.

취향으로서의 ‘연극보기’

학내 공연, 교육 수단으로서의 연극 등을 통해 연극에 친숙해진 여대생들은, 학교 밖 소극장에서 직업극단의 공연을 관극하는 관객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다만 학내 공연에서 여대생들이 연극을 접하는 것이 교육의 일환이거나 대학생(지식인)으로서의 의무와 연결되는 것이었다면, 취미로 연극을 보는 것은 상대적으로 높은 자발성에 바탕을 두고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고 그 스펙트럼은 매우 넓었다. 가령 1970년대 여대생 관객들은 자신의 독서 취향, 지적 호기심에 의해 번역극, 실험극을 관극하기도 했고 좋아하는 배우를 보거나 소극장의 분위기를 느끼기 위해서, 혹은 사교를 위해 극장을 찾기도 했다.

이미 공고했던 언론의 ‘여대생 프레임’ 안에서 여대생들의 취향은 지적, 경제적 허영심으로 설명되곤 했지만, 실제 여대생들은 연극에 대한 분명한 선호를 가지고 있었고 경우에 따라서는 질적으로 문제가 있는 작품에 대해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1970년대부터 꾸준히 평론지와 연극 기사에 등장하는 여대생들의 ‘연극 안보기 운동’은 여대생들의 목소리가 두꺼운 편견의 벽을 뚫고 나오는 순간을 만들어냈다.13 여대생들의 연극 안보기 운동은 주로 해당 시즌 연극계의 부진을 지적하면서 언급되는데, 관객 사수의 최후 보루인 여대생들조차 외면한다면 연극계의 위기가 초래될 것이라는 의식을 저변에 깔고 있었다.

이런 위기 의식에도 불구하고 여대생들의 취향과 안목을 제작자들이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여대생’은 균일하고 동질적인 집단이라 보기 어렵고 따라서 다종다양한 취향과 관극 동기가 존재할 수밖에 없었다. 가령 1970년대 말 한쪽에서는 마당극의 붐이 시작되고 있었고 그 중심에는 이화여대 연극반이 있었다.14 그러나 당대 제작자들은 여대생의 연극적 취향을 자신들의 편의대로 이해하는 편이었고 자신들의 사정에 맞게 작품에 반영한 것들이 또다시 여대생들의 취향에 대한 해석으로 귀결되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었다.15 이런 악순환의 고리 속에서 여대생들의 관극은 한국 연극의 발전을 저해하는, 획일화의 상징적인 현상으로 치부되었다.

대학 시절, 그 이후

1970년대 학내 연극을 즐기고 연극 관객으로 성장했던 여대생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평론지나 신문 지면에서 분석하고 있는 것처럼 여대생 관객이 졸업 후 일과 가사를 병행하며 차츰 극장으로부터 멀어지고 말았던 것일까.

1980년대에 들어서면 연극 관객들이 여대생 관객 위주에서 벗어나 다양한 관객들로 재편되고 있다는 기대에 찬 평론들을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다.16 확실히 1980년대에 들어서면 연극은 비약적으로 넓게 대중의 삶 속에 파고든다. 물리적인 극장을 중심으로 한 기성 연극들은 물론이거니와 극장을 벗어나 민중의 삶 속으로 이동한 연극들, 예컨대 마당극이 1980년대에 세력을 확장시켜나갔다. 이를 토대로 1990년대에 접어들면 연극의 대중화 시대가 도래한다.

그런데 이러한 흐름 속에서도 우리는 1970년대 여대생들의 흔적을 포착할 수 있다. 곧, 1970년대 학교에서 연극을 경험하고 관객으로 성장한 이들 중에는 1980년대 문화예술운동의 중심 인물로 성장한 경우가 적지 않았다. 무엇보다 1990년대 연극의 대중화 시대에서 가장 맨 앞에 기록되는 ‘여성연극 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시기의 ‘여성연극’은 1986년 임영웅 연출의 <위기의 여자>시몬느 드 보부아르 원작, 정복근 각색가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면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는데, 특히 주부 관객을 중심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사회적인 이슈가 되었다. 처음 <위기의 여자>를 기획, 연출했던 임영웅은 “여대생 시절 연극을 보러 다녔던 중년 여성의 자아를 일깨우는 연극을 해보자”는 기획이 <위기의 여자>로 이어졌다고 술회한다.17 그의 기획처럼 대학 시절 연극을 관람하고 직접 참여했던 경험들이 이들이 또다시 극장으로 향할 수 있었던 동력이 되었던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여대생 관객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실은 아주 오래도록 문화예술운동의 주체로, 혹은 주부 관객의 모습으로 한국연극의 든든한 저변으로서 존재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러니 이제 우리는 여성 관객의 새로운 계보를 마련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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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글은 논문 「1970년대 여성 대학생의 연극 경험과 ‘여대생 관객’의 형성」(김태희, 『공연문화연구』48, 한국공연문화학회, 2024)을 발췌, 요약한 글이며, 글의 서두에서 언급하고 있는 <연극in>의 기사는 「그때도 지금도, 여기에도 – 2019년 관객 보고서」(김태희, <연극in>, 2019.06.13.)임을 밝혀둡니다.

김태희

꾸준히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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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한상철, 「한국연극의 대사회적 관계」, 『한국연극의 쟁점과 반성』, 현대미학사, 1992, 90쪽. ↩︎
  2. 당대 연극 관객 중에서, 여성 대학생들이 어느 만큼의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는가에 대한 정확한 수치 자료는 찾아보기 힘들다. 다만 1970년 『경향신문』의 기사에서는 “연극관객층의 90%가 대학생(특히 여대생)”이라고 언급하고 있으며( 「외면당한 봄 무대」,『경향신문』 , 1970.05.23.) 여대생들 덕분에 흥행부진을 면한 공연에 대한 언급 역시 여러 기사에 나타나고 있다는 점,(「참패한 봄 무대 안일한 작품에서 벗어나 새로운 활로 찾아야」, 『경향신문』, 1971.04.22.) 여러 연극인들이 인터뷰에서 여대생 관객에 대한 상세한 기억을 증언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실제로 1970년대 여대생 관객의 비중은 상당했을 것으로 보인다. ↩︎
  3. 한 신문기사에서는 이를 두고 “이상 현상”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 「외면당한 봄 무대」, 『경향신문』, 1970.05.23. ↩︎
  4. 「새 문화풍속도(11) 연극선전」,『경향신문』, 1976.10.25. ↩︎
  5. 「새 문화풍속도(10) 연극 관객들」, 『경향신문』, 1976.10.21. ↩︎
  6. 이와 관련해 김정옥은 다음과 같은 언급을 한 바 있다. “60년대에서 70년대에 걸친 시기에 연극관객의 90%가량은 대학생이었다고 할 수 있고 또 그중의 90%가량은 여대생들이었다. 그 여대생 관객들 중 거의 대부분은 이화여대 학생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사실로 미루어볼 때 60년대에서 70년대에 걸친 한국연극은 이화여대생들에 의해서 뒷받침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처럼 이화여대생들이 연극 관객의 주축을 이뤘던 것은 이화여대의 각 단과대학마다 연극서클이 있어 활동이 활발했고 특히 문리대 연극반은 매년 빠지지 않고 연극을 공연했기 때문이다. 연극반의 여대생들은 관객운동에도 한몫을 톡톡히 한 것이다.” – 김정옥, 「한국연극의 뒤안길(15) 60년대 화제작 <리씨스트라다>」, 『동아일보』, 1992.07.11. ↩︎
  7. 스피치 과목과 영어 연극 과목은 이화여자대학교 영어영문학과의 대표적인 전공 과목이었지만 1968년에 전공 과목이 개편되면서 영어 연극 과목은 폐지되었다. 다만 영어 연극을 공연하는 전통은 학생들의 자치 활동의 영역으로 옮겨갔고, 학생들의 자치 활동임에도 불구하고 그 후로도 오랫동안 영문과 교수들은 학생들의 연극 지도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것으로 보인다. (김갑순 엮음, 『영어연극 공연사』,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2000 참고.) 교수들은 주로 학생들의 레퍼토리 선정, 영어 발음 연습에 참여했고 때로는 연출을 맡거나 외부 연출과의 작업에 자문을 하는 역할을 했고 이것은 외국문학 전공자가 일종의 드라마투르그의 역할을 담당했던 흥미로운 사례가 될 것이다. ↩︎
  8. 김희선, 「‘얌전한 내가 어쩌다 그만’」, 김갑순 엮음, 『영어연극 공연사』,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2000, 249쪽. ↩︎
  9. 서지문, 「‘남자 역을 맡았던 나’」, 김갑순 엮음, 『영어연극 공연사』,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2000, 196쪽. ↩︎
  10. 이숙영, 「‘사람도 인생도 모험이다!’」, 김갑순 엮음, 『영어연극 공연사』,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2000, 247쪽. ↩︎
  11. 유명숙, 「「십이야」를 돌아보며」, 김갑순 엮음, 『영어연극 공연사』,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2000, 225~226쪽. ↩︎
  12. 1960년대에는 여대생들의 영어연극 자체가 이슈가 되어, 이들의 공연 장면이 국립공보원 해외 홍보 다큐멘터리 영상에 삽입되거나 미8군의 초청 공연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 권경수, 「‘해외 홍보용으로 뽑히기도’」, 김갑순 엮음, 『영어연극 공연사』,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2000, 160~161쪽 참고. ↩︎
  13. 가령 「커튼콜」, 『연극평론』 2호, 한국연극평론가협회, 1970.; 「빈축사는 연극무대 모처럼의 공연붐에 찬물」,『경향신문』, 1976.11.15. ↩︎
  14. 마당극의 초창기 주요 창작자였던 임진택은, 이화여대 연극반의 연출로 참여해 <유랑극단>(1977), <마스게임>(1978), <노비문서>(1979) 공연을 만들었다. 임진택과 이화여대 연극반이 함께 만든 이 작품들은 기존에 희곡으로 존재했던 작품들을 마당극적 형식으로 만들었던, 마당극 초기의 형식 실험으로서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
  15. 1970년대 소극장운동에 대한 전문가들의 토의에서는 창작자들의 입장에서 번역극을 선택하게 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분석하고 있다. – “우리의 연극 현실이 아직 아무것도 이룩되어 있지 않는 시점에서, 이것은 작품을 비롯해서 배우술에 이르기까지 그 어느 것 하나 마스타한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관객에게 문학적 취향만이라도 흡족하게 할 수 있고, 또 그들 자신들이 그러한 취향에 만족감을 안고 간다면 일단은 안심할 수 있다는 계산으로 외국의 유명한 작품을 골라 공연하게 되는 것이다.” 「특집 소극장운동 공동토의 – 한국의 소극장운동」, 『연극평론』 2, 한국연극평론가협회, 1970. 47쪽. ↩︎
  16. 가령 윤대성의 글(「좋은 무대는 관객있다」,『경향신문』, 1984.04.13.)을 참고할 수 있다. ↩︎
  17. 허엽, 「‘여성연극 메카’로 우뚝 선 ‘산울림’ 30년 ‘엄마는 오십에…’ 필두로 명무대시리즈 마련」, 『동아일보』, 1999.01.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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