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리목
승언 난 나야.
문영 다른 사람들은 나를 ‘너’라고 해.
승언 그러니까 나는 나이지만 너이기도 해.
문영 그러니까 여기는 여기이지만 저기이거나 거기이기도 하지.
승언 그러니까 이것은 이것이면서 동시에 저것이거나 그것이기도 하지.
– 우주마인드프로젝트, <여기에서 저기로 이동하는 11가지 방법> 중에서
사람들은 ‘내’가 ‘너’라는 사실을 언제쯤 깨닫게 될까.
나의 경우는 7살 무렵이었던 것 같다. 나의 세상만큼이나 나 아닌 사람의 세상도 존재한다는 것을 본격적으로 의식하게 되었던 그 날을 기억한다. 책상 밑에 쪼그려 앉아, 창문 틈으로 들어온 볕이 무릎에 그린 무늬를 구경하며 고개를 갸우뚱 하고 있었다. 물론 ‘존재’가 어쩌고 하는 단어들을 떠올린 것은 아니다. 그 생각은 불현듯 의심의 모습으로 찾아왔다.
혹시, 설마, 세상 모든 사람들이 ‘생각’을 하고 있나? 나처럼?
그 전까지는 ‘나’와 그 주변 등장인물로 세상을 인식했다면, 그날 이후로 사람은 저마다 1인칭 시점으로 살아가는 주체적인 존재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시작된 것이다.
그 의심은 여러 가지 심각한 물음표 가지를 뻗었는데, 예를 들어 붐비는 거리에서 사람들을 볼 때면 물음표가 점점 겹치고 더해져 사방에 가득 차 버리기도 했다. 저 한 명 한 명에게 모두 자신만의 소중한 것이 있고, 다들 각자 다른 생각을 하면서 산다는 건가? 모두들 나처럼 자기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자기 머리로 생각을 한다면, 그럼 이 세상에는 수없이 많은 개개인마다의 세계가 있다는 건가! 그렇다면 나는 그 중에 하나일 뿐인 걸까? 저마다의 세계에서 ‘나’는 중요하지 않을 수도, 아예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단 말인가? 이런 생각을 하며 조금은 두렵기도 하고 쓸쓸해져 울적하기도 했다.
지금 떠올리면 우습지만, 당연히 세상의 중심이 자기 자신이라고 믿었던 어린 뇌가 받아들이기엔 충격이 커서, 에이 설마 아닐 거야 하고 슬쩍 넘어가고 싶었던 기분도 생생하다. 그렇지만 한 번 시작된 의심은 날이 갈수록 커지고 정교해져 꽤 오랜 시간 동안 머릿속에 머물렀다. 어린이를 지나 청소년기를 거치고 성인이 되어서도 의심이 관성으로 남아 있음을 느낄 때가 있다.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존재론적으로 완전히 납득하지는 못한 것이다. 나는 내가 생각한다는 걸 알지만 다른 사람의 의식은 내가 확인할 수 있는 실체가 아니므로. 그게 정말 존재한다는 것을 어떻게 믿지?
하지만 그렇게 안 믿고 못 믿어도, 살다 보면 나보다 훨씬 복잡하고 아름다운 것들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을 도처에서 만나게 된다. 내 가시거리의 세계를 훌쩍 뛰어넘어 저 멀리 닿지 않는 곳에 이미 도착해 있는 사람들을 보면 어랏, 놀라고 마는 것이다. 그런 이들은 예전에도 아주 많았고 지금도 계속 생겨나고 있다는 걸 자주 느끼고 숙연히 겸손해지곤 하지. 한껏 쪼그라들어 자신을 돌아보고 나면 새로운 의심이 떠오른다. 저들과 내가 정말 같은 메커니즘으로 동작하는 걸까? 이렇게나 간극이 큰 걸. 아닌 것 같은데…
그렇다고 부럽거나 아쉽냐 하면 이제 그런 시절은 지나간 것 같다. 수많은 불안과 자기 의심의 밤들을 보내고, 그 수만큼의 소박한 성취의 아침을 맞이하고서, 지금은 여기에 있다. 저기이거나 거기이기도 한.
난 나야.
대단하지 않더라도, 나 같은 사람은 나밖에 없지.
____________
승언 어차피 세상은 혼자 살아가는 거라고 하잖아. 그러면서 이 세상은 혼자서는 살 수 없는 곳이라고도 하잖아. 뭐 어쩌라는 거지?
문영 혼자이면서 혼자가 아니고 함께이면서 함께가 아닌, 일종의 따로국밥 같은 상태.
승언 혹은 탕수육에 소스를 부었지만 탕수육이 눅눅해지지 않고 바삭함을 유지하면서도 소스의 새콤달콤함이 탕수육에 적절히 스며들어서 부먹파와 찍먹파가 함께 할 수 있는 상태.
문영 0이면서 동시에 1이고,
승언 살아있으면서 죽어있는 슈뢰딩거의 고양이이고,
문영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애매한 상태.
승언 혼자서 함께 있거나 다 함께 혼자 있거나? 말이야 방귀야?
문영 말이면서 방귀인 상태? 뿌웅 뿌웅~~
승언 말도 아니고 방귀도 아닌 상태?
– 우주마인드프로젝트, <여기에서 저기로 이동하는 11가지 방법> 중에서
아놀드 로벨의 우화집 《집에 있는 부엉이》를 좋아한다. 이 부엉이는 1층에 있으면 2층이 궁금하고, 2층에 있으면 1층이 궁금해서 하루 종일 1층과 2층 사이의 계단을 오르락내리락 한다. 재빨리 계단을 오르면 양쪽 층에 동시에 있을 수 있겠다고 생각해 점점 더 빨리 왔다 갔다 해보지만, 1층에 도착하면 이미 2층을 떠나온 것임을 깨닫고 아쉬워한다. 왜 두 층에 동시에 있을 수 없을까. 나도 그런 생각 한 적 있는 걸. 층간에 구멍을 뚫어 몸을 걸치고 있으면 어때? 양쪽 모두에 존재하는 듯 느껴지지만 어쩐지 만족스럽지 않을 테지. 반쪽의 나는 내가 아니지도 않지만 온전한 나도 아니니. 어라? 나이면서 내가 아닌 상태?!
혼자면서 혼자가 아니고 함께면서 함께가 아닌 상태. 순간순간의 필요대로 혼자와 함께를 스위치하는 상태로 살고 있는 것 같다. 아이 둘을 키우며 간절히 혼자만의 시간을 바라지만, 사람들과 왁자지껄 어울리는 무드를 그리워하고, 함께 으샤으샤 힘내서 성취하는 작업을 좋아하지만, 너무 깊게 얽히는 건 부담스러워 늘 한발 뒤 조력자 정도의 자리가 편하다. 그런 정도의 텐션을 유지하기에 음악가는 참 적당한 포지션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대체되기 쉽기도 하고.
이런 상태가 된 데에는 육아와 탈도시가 큰 영향을 끼쳤다. 2015년 이전의 나는, 노는 것도 일하는 것도 사람과의 관계도 돌진해서 끝까지 가는 사람이었다. 도무지 적당히가 없었다. 밤을 새서 만나고 흐드러지게 놀고 흠뻑 빠져 만들었다. 그렇게 풍덩 들어가는 것이 좋았다. 후회를 하더라도 보이는 대로 일단 세게 부딪혀 봐야 했다. 좌충우돌 펄떡거리며 감정의 열탕과 냉탕을 왔다 갔다 하는 게 일상이었다. 그러다 아이가 생기고, 서울을 벗어나 주위에 논밭뿐인 곳에 살게 되면서 삶의 많은 부분이 달라졌다. 내 시간은 내 것이 아니고, 내 에너지도 내 것이 아니며, 가능한 한 파도가 적은 마음 상태를 유지해야 하는 포지션. 엄마라는 직업은 그런 것이더라. 엄마이면서 음악가, 열정형 음악가이면서 안정형 엄마가 되는 것은 따로국‘밥’보다는 따로국‘빵’에 가까웠다고 할까. 같이 먹으라고 한 상에 담겼는데 영 안 어울려서 따로 먹어야하는 상태. 어떤 빵을 곁들여야 머릿고기 국물과 가장 잘 어울리는지 12년째 먹어보는 중. 그러다 어느새 노쇠하여, 이제 내 시간이 생겨도 밖에 나갈 기력이 없는 따로국‘죽’이 되어가고 있는. 어쩌면 이미 믹서기에 곱게 갈린. 그러나 뚝배기에 부으면 다시 부글부글 끓어오를 거라 믿는. 그 어떤 국물도 아니고 건더기도 아닌 상태.
그런 상태로 연극 음악하러 가서 “탕수육에 소스를 부었지만 탕수육이 눅눅해지지 않고 바삭함을 유지하면서도 소스의 새콤달콤함이 탕수육에 적절히 스며들어서 부먹파와 찍먹파가 함께 할 수 있는 상태”라는 대사를 들을 때마다, 연습 중인데 탕수육 생각만 하는 상태.
____________________________
*) 작품 출처 : 신문영 · 김승언, <여기에서 저기로 이동하는 11가지 방법> (‘우주마인드프로젝트’ 제공)
연리목
무대, 영화, 여기저기 쓰이는 음악을 만든다. 직관으로 만들고 라이브로 연주하기를 좋아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