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연주

지난 ACTiO 19호에서 김태희는 “1970년대 ‘여대생 관객’은 어디에서 왔을까?”를 물었다.1 이화여대의 영어연극과 연극반, 여대생들의 ‘연극 안보기 운동’을 따라온 이 글은 이렇게 끝난다. “그렇다면 여대생 관객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실은 아주 오래도록 문화예술운동의 주체로, 혹은 주부 관객의 모습으로 한국연극의 든든한 저변으로서 존재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러니 이제 우리는 여성 관객의 새로운 계보를 마련해야 한다.” 필자는 여기에서 시작하려 한다.2 김태희가 그들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물었다면 이 글은 그들이 어디로 갔는지를 추적한다. 미리 답하자면 그들은 연극을 떠나지 않았다. 다른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을 뿐이다.

김태희를 멈춰 세운 것은 1971년의 비평가 한상철의 글이었다. 이 글은 극장을 찾는 손님의 태반이 여학생이라는 사실을 ‘한국연극의 위기’로 읽었다. 김태희가 함께 인용한 1976년 한 신문의 기사는 여대생의 관극을 “교양을 위한 액세서리”를 착용하는 일로 깎아내렸다.3 김태희가 짚었듯 중산층 가정에서 딸의 대학 교육은 종종 좋은 혼처를 구하기 위한 가족의 전략이었다. 대학에서 연극을 보던 여성들은 졸업과 결혼이라는 생애주기를 거쳐 ‘주부’라는 이름으로 포섭된다.

1983년 비평가 김방옥은 이렇게 썼다.

우리사회에서의 소위 문화는 할 일 없는 도시여자들의 주체할 수 없는 시간에 의해 꾸려져 나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인지 요즘 ‘숫자가 남아돌아 간다’는 젊은 층의 배운 여자 혹은 결혼 후 남편을 수출대열이나 산업전선에 빼앗긴 아파트 주부들이 오늘의 문화의 주역들이 되어버렸다. (…) 남자들과 전혀 동떨어진 세계에서 시간 남는 여자들끼리 꾸려가는 문화는 허약하고 불건강한 유한문화가 될 수밖에 없다. 세상 돌아가는 이치에서, 삶의 현장에서 멀어져 있기 때문이다.4

이 글에서 “젊은층의 배운 여자”와 “아파트 주부”는 나란히 놓여 있다. 김태희가 추적한 여대생들이 도착한 자리가 바로 여기다. 이름은 여대생에서 주부로 바뀌었지만 그들의 관극을 셈하는 방식은 그대로였다. 그들의 연극과 문화 향유는 1970년대에는 교양의 장신구이고, 1980년대에는 남아도는 시간의 소비 ‘유한(有閑)’으로 평가된다.

이듬해 비평가 신정옥은 여성 관객이 연극과 영화 등 문화예술의 성패를 쥐고 있다고 보고 이 시기를 ‘여성문화 시대’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 진단도 “과연 이 땅에 남성문화는 없는 것일까.”라는 물음으로 끝난다.5 우려든 인정이든 여성 관객은 늘 남성 관객의 빈자리로 설명된다. 두 글을 쓴 이가 모두 여성 비평가라는 점은 이것이 한두 사람의 편견이 아니라 그 시대가 관객을 셈하던 방식이었음을 보여준다.

극장은 알고 있다

김태희는 묻는다. 여대생 관객은 졸업 후 일과 가사를 병행하며 차츰 극장으로부터 멀어지고 말았던 것일까. 기록을 따라가 보면 오히려 반대의 장면이 보인다. 1978년 연출가 김정옥은 한 해를 돌아보며 서울의 연극 관객이 열 배로 늘었고 “그 관객층도 여대생 일색에서 직장인, 가정주부, 중년층으로 확산되고 있다.”라고 썼다.6 담론이 그들을 시간이 남아도는 유한으로 셈하는 동안 극장은 이미 그들을 관객으로 인지하고 있었다.

1981년 3월 아파트 단지는 들어섰지만 극장 하나 없어 ‘문화공백단지’로 불리던 강남의 고속터미널 앞 쇼핑센터 5층에 185석 규모의 뉴코아예술극장이 문을 열었다. 극장은 “남녀노소 온 가족”을 초대한다고 했지만, 극단 동인극장의 대표이자 여성 극작가인 전옥주는 개관작 <노부부의 선글라스>를 “가정주부들에게 폭넓은 감명을 주기 위해” 여러 번 다듬고 있음을 밝히고,7 같은 해 잉마르 베리만의 <가을 소나타>를 올린 극단 사조는 공연 시간을 “주부들이 한가한 오후 2시반과 7시반으로” 잡았다.8 그 공연을 보도한 신문은 무대가 아니라 객석을 조명했다.

<가을 소나타> 객석 사진9

1985년 마당극을 하는 연희광대패는 <밥>을 공연하면서 ‘주부 관객 유치작전’으로 신촌의 극장에 임시 탁아소를 차렸다.10 1987년에는 낮에는 아동극, 밤에는 성인극을 올리는 소극장들이 생겼고,11 극장은 강남을 넘어 강북으로 확대되어 점차 다양한 (서울)지역의 주부들의 생활공간으로 파고 들어갔으며,12 1988년 극단 현대극장은 기존 공연 시간에는 주부들이 보러 오기 어렵다며 수요일 오후 2시 공연을 마련했다.13 극장은 여성들의 취향과 필요, 공간과 시간을 따라 움직였다.

주부라는 이름으로

1970년대 여대생 관객들은 ‘연극 안보기 운동’으로 수준 미달의 작품에 비판의 목소리를 냈음을 김태희의 연구는 밝히고 있다.14 1980년대의 주부들은 당시 여성들에게 점차 지면이 확대되어 가던 신문과 잡지에 글을 썼다.15 1983년 이운순이라는 주부는 『경향신문』에 실은 글에서 여름엔 상추, 겨울엔 콩나물과 된장으로 아끼며 살아온 살림에 부부의 입장료 “3천원+3천원”은 결코 적은 돈이 아니라고 적었다.16 그에게 관극은 남는 시간을 쓰는 일이 아니라 살림의 셈법을 거슬러 마련한 것이었다.

그는 그해 대한민국연극제에서 본 창작극을 두고 그 정도의 고민이 아파트 생활의 정신적 고민이라면 차라리 텔레비전으로나 보면 알맞겠다고 썼다.17 연극은 텔레비전이 주지 못하는 것을 주어야 한다는 판단이다. 김방옥이 <에쿠우스> 비평에서 “오직 연극만이 제공할 수 있는 경험 방식”, 즉 ‘극장주의(theatricality)’라는 용어로 설명한 것을18 이운순은 부엌의 언어로 말하고 있다.

그가 자기를 소개하는 방식도 흥미롭다. 그는 자신을 “평범한 소시민 주부”로 낮추지만 동시에 ‘연극을 사랑하는 주부’로 칭한다.19 자격 없음을 인정하는 자세를 취하면서 자기만의 관점과 판단을 제시하는 그의 화법은 비평의 자격이 학력과 직함에 따라 나뉘던 시절에 주부가 공적인 지면에서 말하기 위해 채택한 것이었다. 이운순의 글은 관객이 단순 관람에서 비평으로 ‘올라간’ 단계로 볼 수 없다. 보는 일은 이미 판단하는 일이었고 이운순의 글은 그 판단이 지면에 남은 흔적으로 읽어야 한다.

이 여성 관객들의 목소리는 곧 모임이 되었다. 1982년 결성된 한 관극 모임은 스스로를 ‘추임새’라고 이름 붙였다. 판소리에서 청중과 고수가 소리에 보태는 그 소리처럼 관객의 말이 공연을 함께 완성한다는 뜻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1984년 여름부터 이들이 매달 5천 부씩 펴낸 공연 안내지의 이름은 『얼쑤!』였다. 1991년 배우 박정자의 후원회 ‘꽃봉지회’ 회원들은 ‘박정자 후원회’라고 새긴 앞치마를 두르고 공연장에서 다과회와 사인회를 준비했다. 부엌의 표지였던 앞치마가 극장에서는 후원자의 상징이 된 것이다.

직접 무대에 오른 이들도 많았다. 1984년 극단 둥우리와 1988년 극단 미얄은 ‘주부 극단’을 자처했다. 김태희는 앞에서 언급한 연구에서 1970년대 여대생에게 연극이 지적 역량을 증명하는 통로였음을 밝힌 바 있는데 그 통로는 졸업 후에도 닫히지 않았다. 남성 중심의 마당극단에서 나와 자기 목소리를 낸 김경란은 둥우리에서 첫 작품 <닷찌풀이>를 단원들과 공동창작의 방식으로 무대에 올린다. 이듬해 둥우리가 올린 작품은 <이 세계 절반은 나>로 이 사회에서 셈해지지 않던 여성, 주부의 몫을 스스로 계산해 내놓는 작품이었다.

1986년 <위기의 여자>를 넘어서

기존 페미니즘 연극사는 1986년 공연된 <위기의 여자>를 계기로 주부 관객 및 여성 연극이 출현했다고 정리한다.20 이 작품을 연출한 임영웅은 훗날 “여대생 시절 연극을 보러 다녔던 중년 여성의 자아를 일깨우는 연극을 해보자”는 기획에서 이 작품이 출발했음을 회고하고 있다.21 그의 말은 중년 여성 관객이 작품보다 먼저 극장에 있었고 이때까지의 작품은 그들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는 증언으로 읽을 수 있다. 그렇다면 1986년은 여대생 관객이 주부가 되어 돌아온 해라기보다 이미 돌아와 있던 그들을 연극계와 언론이 비로소 셈하기 시작한 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1978년의 회고, 1981년의 극장과 관극 시간표, 1982년의 관극모임 추임새, 1984년의 극단 둥우리 활동은 모두 1986년보다 앞선다. 어떤 집단이 역사의 전면에 ‘나타났다’고 기록되는 날은 대개 그들이 생겨난 때가 아니라 담론이 그들을 처음으로 알아본 때에 가깝다. 이 해를 한국 페미니즘 연극의 원년으로 삼으면 그 앞의 일들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물론 이 계보에도 빈칸이 있다. 대학 교육을 받고 강남의 아파트에 이른 여성들의 길은 교육 받은 중산층의 길이다. 오후 2시의 공연은 공장의 교대 근무와 맞지 않는다. 극장이 주부의 시간에 맞춰 시간표를 다시 짠 바로 그 사건은 낮 시간을 낼 수 없던 수많은 여성을 다시 객석 바깥에 두었다. 이 중산층의 루트에서 벗어난 여성들이 어디에서 연극을 만났는지에 대해서는 앞으로 더 연구가 필요하다.

김태희의 글로 돌아가 보자. 그는 글의 첫머리에서 오늘의 여성 관객들이 남성 배우의 외모에만 관심이 있다거나 작품을 보는 눈이 없다는 폄하를 공공연히 듣는다고 전했다. 근대의 여성 관객, 해방 이후의 ‘고무신 관객’, 1970년대의 ‘액세서리’, 1980년대의 ‘유한문화’, 그리고 오늘의 말들까지, 이름은 바뀌어도 여성 관객을 셈하는 방식은 놀랄 만큼 닮아있다.

그러나 이것이 멸시의 계보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앞서 살펴본 많은 여성의 활동처럼 그 멸시의 자리에서 자기 이름을 되받아 쓴 기록도 함께 이어져 왔다. 김태희가 마련하고자 한 여성 관객의 새로운 계보에 나는 1980년대 ‘주부 관객’의 이름을 이어 쓰고자 한다. 1970년대의 여대생 관객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들은 객석에 돌아왔고, 연극 문화와 지형도를 바꾸고, 자기 이름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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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유연주의 논문 「문화적 주체로서의 1980년대 ‘주부관객’-후원·비평·창작의 실천을 중심으로」(『한국극예술연구』 88, 2026)와 박사학위논문 「1980~90년대 한국 페미니즘 연극의 지평」(서울대학교, 2026) 2.1절을 바탕으로 웹진 지면에 맞게 다시 쓴 것이다. 앞의 논문은 다음 주소에서 확인할 수 있다.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3340716>

유연주

한국의 페미니즘 연극사를 연구하면서 연극계 백래시와 여성 혐오를 주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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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태희, 「1970년대 ‘여대생 관객’은 어디에서 왔을까? : 여성 관객의 새로운 계보 만들기」, 『ACTiO』 19호, 2026.09.28. <https://actiowebzine.com/2026/09/28/1970년대-여대생-관객은-어디에서-왔을까-여성-관/> ↩︎
  2. 김태희가 연구(2024)의 결론에서 제기한 “1970년대 학내 연극을 즐기고 학교 밖에서 연극관객으로 성장했던 여대생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라는 질문은 필자가 ‘주부 관객’ 추적을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다. 김태희, 「1970년대 여성 대학생의 연극 경험과 ‘여대생 관객’의 형성」, 『공연문화연구』 48, 한국공연문화학회, 2024. ↩︎
  3. 「새 문화풍속도(10) 연극 관객들」, 『경향신문』, 1976.10.21.(김태희, 앞의 글(2026)에서 재인용) ↩︎
  4. 김방옥, 「여성의 문화독점시대」, 『동아일보』, 1983.08.04. ↩︎
  5. 신정옥, 「여성문화 시대」, 『동아일보』, 1984.06.11. ↩︎
  6. 김정옥, 「’78 유감 (2) 가능성 보여준 다양화」, 『조선일보』, 1978.12.13. ↩︎
  7. 홍찬식, 「서울 강남아파트단지 연극전용극장 곧 개관」, 『동아일보』, 1981.01.27. ↩︎
  8. 「탤런트극단 ‘사조’ <가을 소나타>공연-아파트단지 주부 대상」, 『동아일보』, 1981.12.05. ↩︎
  9. 주부로 보이는 여성 관객을 중심으로 성인 남성과 어린이가 함께 자리한 관객 구성을 보여주고 있다. 「서울 강남서 첫 연극공연」, 『조선일보』, 1981.12.19. ↩︎
  10. 「연극공연장에 임시탁아소 등장」, 『동아일보』, 1985.06.13. ↩︎
  11. 김유경, 「극단·소극장 2중 공연 바람-낮엔 아동극 밤엔 성인극」, 『경향신문』, 1987.01.22. ↩︎
  12. 「공연장, 주거지역에 파고 든다」, 『조선일보』, 1987.03.26. ↩︎
  13. 「주부위해 낮공연 당겨」, 『경향신문』, 1988.04.14. ↩︎
  14. 김태희, 앞의 논문(2024) 참조. ↩︎
  15. 1980년대 여성지와 “1980년대적인 주체”인 주부라는 여성 독자층의 조우에 대해서는 홍지혜, 「1980년대 여성학·여성운동계 출판물과 여성지의 교착」, 『민족문학사연구』 78, 민족문학사연구소, 2022, 47~83쪽 참조. ↩︎
  16. 이운순, 「연극을 보고 반찬값에서 한푼두푼 모아 ……」, 『경향신문』, 1983.09.20. ↩︎
  17. 이운순, 위의 글. ↩︎
  18. 김방옥, 「변태성욕의 공허한 에너지-<에쿠우스>」, 『마당』, 1982.05.(김방옥, 『<약장수>, <신의 아그네스> 그리고 마당극』, 문음사, 1989, 132~133쪽에서 재인용) ↩︎
  19. 이운순, 앞의 글. ↩︎
  20. 심정순, 「여성연극의 함정-극단산울림 <위기의 여자>」, 『한국연극』 11(5), 한국연극협회, 1986.05, 51쪽; 「소외된 ‘절반’의 인간화를 향한 몸부림」, 『페미니즘과 한국연극』, 삼신각, 1999, 28쪽; 「한국 여성연극에 나타난 젠더역할의 변화지향적 비젼-1950-1990년대를 중심으로」, 『지역학논집』 7, 숙명여자대학교 지역학연구소, 2003.12, 8쪽 참조. 이 논의는 이후 연구와 비평에서 충분한 재검토 없이 반복적으로 참조되었다. ↩︎
  21. 허엽, 「‘여성연극 메카’로 우뚝 선 ‘산울림’ 30년 ‘엄마는 오십에…’ 필두로 명무대시리즈 마련」, 『동아일보』, 1999.01.20.(김태희, 앞의 글(2026)에서 재인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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