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미도
비비 사람이란 군두 뛰는 거예요. 중간에 머물러 있지를 못해요. 오거나 가거나 하는 수밖에는. 당신은 지금 금잔 금빛 술에 취했소. 정신을 번쩍 띄게 냉수 한 그릇을 마셔 보구료.
시인 우리 어머니는 어떻게 하구. 날 낳고도 제일 미워하는 우리 어머니를.(중략)
비비 글쎄 나 모양으로 지금이라도 이연(離緣)을 해버려요. 인연을 끊어 버려요. 그러면 날 보고 달아나듯이 당신에게 어머니 권리는 못 내두를 테니까. 군두 뛰는 것으로만 알라니까 그래! (중략)
시인 해 보리다. 허지만 난 시인예요. 보험통계서는 모릅니다. 양도증서 만들 줄도 모르고, 나는 과거를, 꿈을 버릴 수 없읍니다.
비비 역시 손톱 끊듯이 끊어 버리시구료. 군두 뛰는 것과 마찬가지라니까.
― 김우진, <난파> 중에서
내가 대학 시절에 연극 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가장 인상 깊게 받아들인 한국의 극작가는 김우진이었다. 그는 20대에 5편의 희곡과 3편의 소설 외에 많은 시편과 번역, 논문, 평론, 에세이들을 남겼다. 김우진과 비슷한 나이에 나는 그가 쓴 글들을 읽으면서 수많은 철학서들을 섭렵한 박식함과 왕성하고 거침없는 필력에 경탄하며 이미 나의 지적 능력에 대한 한계를 절감했었다. 그의 희곡 중 우리 연극사에서 표현주의 양식이 최초로, 본격적으로 시도되었다고 평가받는 <난파>는 그의 짧지만 파란만장한 생애와 결부되어 가장 충격적으로 다가왔던 작품이다. <난파>에서 ‘군두 뛰는’이라는 말은 내가 삶에서 예상치 못한 난관에 직면할 때마다, 특히 중대한 선택의 기로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때마다 줄곧 뇌리에서 맴돌았다.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어느 쪽에도 발 붙이지 못하고 ‘군두 뛰는’ 김우진의 존재론적 고뇌는 <난파>에서 수차례 등장한다. 버나드 쇼의 <워렌 부인의 직업>에 나오는 ‘비비’는 매춘 사업으로 자신을 양육한 모친과의 인연을 과감히 끊어버렸지만 ‘시인’, 즉 김우진은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자신의 가문과 결코 쉽게 ‘이연(離緣)’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비비처럼 용감하고 열정적이었던 연인 윤심덕과의 관계를 더 발전시킬 수도 없었다. 비록 애정 없는 조혼으로 맺어진 인연이지만 아이까지 있는 처지에 가정을 버릴 수는 없었다.
김우진은 연극과 가업 사이에서도 ‘군두 뛰는’ 일을 멈출 수 없었다. 김우진은 연극에 거의 미쳐 있었지만 동시에 부유한 명문가의 장남으로서 가업을 돌봐야만 했다. 낮에는 가업을 돌보고 밤에는 창작에의 열정을 불태웠다. 김우진이 전적으로 연극에 뛰어들지 못하게 막아선, 지독히 가부장적인 아버지는 가장 고통스런 천륜이었다. 아내와의 이연, 어머니와의 이연, 아버지와의 이연을 결행하지 않으면 그는 결코 행복할 수 없었다.
올해는 우리 연극사에서 가장 선구적이고 독보적인 극작가 김우진이 서거한 지 100년이 되는 해이다. 1897년생인 그는 1926년 8월 4일, 29년 동안의 고단한 삶을 스스로 마감하며 현해탄에 투신하였다. “나는 먼져 어머니 계신 곳으로 가겠소”로 시작되는 짧은 유서는 1926년 6월 24일에 쓰여졌지만 그의 마지막 희곡 <산돼지>는 7월 13일에 탈고되었다. 그의 자살을 강력하게 암시하는 희곡 <난파>는 1926년 5월 3일에서 7일 사이에 집필되었다. 그는 한편으로 더이상 희망 없는 생을 접고자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끊임없이 샘 솟는 창작에의 열망, ‘생의 의지’를 불태우고 있었다.
김우진을 연구한 많은 학자들에 의해 ‘생명력’과 ‘생명 의식’은 그의 예술세계를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개념으로 논의되어 왔다. 김우진은 1925년 4월에 쓴 「아관(我觀) 계급문학과 비평가」에서 “진실한 비평가가 민중의 대언자가 되며, 프롬프터가 되는 데는 결국 그 사회와 민중의 ‘생(生)의 힘’의 문제에 있다”면서 “자연적, 사회상 진화의 경로를 밋는 소극적 태도보다도 프로메토이스의 반발력과 생명력과 의욕력이 더 인생과 사회에 가치가 잇다”고 했다. 자살하던 해인 1926년 3월에 「생명력의 고갈」이란 글에서는 “오늘 조선에셔 무엇이 불요하냐 함은 이 요구나 생의 충동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실현코자 하는 힘이 부족하단 말이다. 알고만 잇슬 것이 아니라, 그것을 실현코져 하는 힘이다”라고 하였다. 즉 생명력의 실현을 위한 실천적 의지가 부족함을 한탄하고 있다. 그것은 다른 예술가들에 대한 질책인 동시에 가문과 구습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자신에 대한 책망이기도 했다.
카로노메 (냉정해지며) 아녜요. (한참 있다가) 나는 인제 습기 있는 땅으로 옮겨 심은 나무예요. 참 양분되는 수기를 마음껏 빨아들여야 해요. 살아야 합니다. 튼튼하게 씩씩하게 살아야 합니다.
시인 아 그게 비비 말씀이구료. 그리고 또 인생이란 군두 뛰는 것과도 같다구?
카로노메 그렇지요.(중략)
시인 벌써 깨물어 봤고. 그런데 내 말 좀 들어보슈. 인생이란 군두 뛰는 것인 줄 알았더니 인제 확실히 인생이란 ひにく란 것을 알게 되었읍니다. (달려들어) 아, 카로노메! 당신도 당신 자신이 어찌할 수 없는 줄 잘 알고 있어요. 습기 있는 땅으로 모종된 것만 꼭 알고 있어요.
끝부분에서 베르디의 오페라 <리콜레토>에 나오는 아리아 ‘카로 노메 Caro nome, 그리운 이름’의 선율이 흐르는 가운데 등장한 카로노메는 시인에게 생의 의지를 한 번 더 북돋운다. 그러나 시인은 “인생이란 군두 뛰는 것인 줄 알았더니 인제 확실히 인생이란 ひにく란 것을 알게”되었다고 단언한다. 인생이란 아무리 이상을 실현하려고 발버둥치며 군두 뛰어봤자 삶이란 결국 현실이라는 감옥에서 벗어날 수 없는 히니꾸(ひにく), 즉 그의 군두 뛰기를 빈정거리는 아이러니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시인은 드디어 난파한다.
스스로 생을 마감한 것은 패배한 삶일까? 예술적 이상을 포기하고 현실과 타협하며 비루한 삶을 이어가는 것보다는 손상되지 않은 이상을 간직한 채 지긋지긋한 현실과 마침내 ‘이연’한 것이 아닐까? 끊임없이 군두 뛰는 인생은 현실과 이상, 그 어느 쪽에도 발붙이지 못한 채 계속 허공을 오갔지만 그는 이상의 실천을 허락하지 않는 당대의 현실로부터 솟구쳐 올라 드디어 검푸른 바다를 향해 마지막 군두 뛰기를 감행했던 것이다. 그것은 삶과 죽음 사이를 가로지르는 최후의 군두 뛰기였다.
나는 젊은 날에 예술에 대한 김우진의 뜨거운 열정을 흠모하였으나 어느 것 하나 그처럼 치열하게 매달리지 못했고, 이제 그보다 두 배가 넘는 시간을 살았으나 그만큼의 학문적 성취도 이루지 못했다. 번잡한 삶에 치이고 지칠 때마다 “인생은 군두 뛰는 것”이라는 그의 말이 떠올랐지만 죽음과 맞바꿀 만한 궁극적 이상은 애초에 없었다. 여전히 나는 좀더 하고 싶은 일들과 좀더 하기 싫은 일들 사이에서 하루하루를 버텨내고 있을 뿐이다. 다시 뜨거운 가슴을 가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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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 출처:『김우진 전집』, 전예원, 1983.
김미도
한국연극사를 연구하면서 표현의 자유를 수호하는 일에 관심이 많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