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지
서울시 종로구 서린동에 위치한 주한이스라엘대사관 인근에서는 격주 토요일에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집단학살을 규탄하는 집회가 열린다. 거기서는 운동의 여러 형태와 양상을 목격할 수 있는데, 때로는 통행을 가로막고 도로 위에 몸을 눕혀서 한동안 길을 점거하는 ‘다이인(die-in)’ 행동을 기획하기도 한다. 내가 피켓을 들고 시내 한복판의 아스팔트 길바닥 위에 드러누워 본 것도 그 집회에서가 처음이었다. 줄지어 행진하던 사람들이 사이렌 소리를 신호로 일제히, 하지만 각자만의 속도와 모양으로 길 위에 나란히 드러눕는다. 별안간 가만하게 쓰러진 이 몸들의 행렬은 인종주의적 기획과 제국주의적 압제와 정교하게 설계된 군사적 폭력에 의해 살해 당한 팔레스타인 민중의 몸을 아마도 연상하게 할 것이다. 또한 점령과 수탈로 쓰인 집단학살이라는 이 오랜 기획을 누운 이들의 피부에 직접 각인시키면서 어쩌면 우리가 몸으로 차지한 거리의 폭과 너비만큼, 그로 인해 유발된 소란과 불편의 크기만큼 연대를 요청하거나 다짐하는 과정이기도 할 것이다.
그리고 적어도 나에게는, 내가 팔레스타인인들과 달리 결코 죽지 않았다는 사실, 여전히 또 분명히 살아서 언제라도 도로 몸을 일으켜 멀쩡하게 걸어갈 수 있다는 사실을 감각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처음 다이인에 동참했을 적에는 고작 길 위에 누운 나의 몸이 사망한 몸들을 감히 매개하거나 대리하는 형상처럼도 비춰질 수 있다는 것이 영 멋쩍었던 것 같다. 행동을 마친 뒤 자리에서 일어나 매무새를 가다듬고 또 다시 행진을 이어가는 순간이 무척 희한하고 곤란했다. 하지만 그 부대끼는 마음이나 주저하는 몸짓 같은 것들이야말로 실은 연대자로서 나의 윤리적 입지를, 무엇보다 한국 시민으로서 내가 느끼는 거북하고 죄스러운 심경을 가장 소상하게 대변해 주기도 한다.
그러니까 다이인에 함께하는 동안 또렷하게 불거지는 것은 차라리 나의 몸인 것 같다. 가자의 사람들과 달리 우연히 살아 있는 몸. 살아 있기를 허가 받은 몸. 전쟁범죄를 겪는 대신 훨씬 더 안전한 세계에서 그 폭력을 사유하거나 말할 수 있는 몸. 내가 팔레스타인인이 아니라는 것이 어쩌면 내가 집회에 가는 이유라는 사실, 팔레스타인과 나 사이의 그 존재론적 거리가 도리어 내 연대를 받치고 있다는 사실을 거리에 누워 있는 동안 배운 셈이다.
죽음을 새기는 몸이 되기
<진노 震怒>1를 보면서 종로 길바닥에 드러누웠던 시간을 떠올렸다. <진노>는 우리와 팔레스타인 사이에 놓인 것처럼 보이는 바로 그 거리(감)에 관한 연극 같다. 객석 뒤편으로 새로 낸 비좁은 통로를 따라 들어서면, 극장 바닥에 온갖 옷가지들이 여기저기 아무렇게나 더미처럼 쌓여 있는 모습이 보인다. 혼란한 모습으로 흐트러진 색색의 옷 사이에는 사람의 모양을 닮았으나 얼굴은 없는 인형들도 여럿 섞여 있다. 열한 명의 배우들은 극장 안쪽 벽 앞에 일렬로 섰다가 한 명씩 객석을 향해 몇 걸음 가까이 다가오더니 일순간 바닥으로 몸을 내던지면서 고꾸라진다. 마치 먼 데서부터 발사된 무기에 뒤통수나 등허리를 가격 당한 것처럼. 별안간 살해 당한 것처럼. 그러니까, 절멸의 표적으로 지목된 여느 팔레스타인 사람처럼. 옷 더미 위로 무표정하게 쓰러지는 배우들의 몸은 극장 바닥에 비치돼 있던 인형들 위로 포개지거나 이따금 나란히 놓이면서 점차 인형과 떼어 구분하기 어려운 것, 분명 사람이었으나 이제는 살덩이에 더 가까워져 가는 것처럼도 보이기 시작한다.
극장 바닥으로 쓰러지는 몸들의 풍경을 반복적으로 구성하는 이 재현적 과정은 가자지구의 시민들이 오랜 시간 겪어 온 학살과 폭력의 구체적인 실체를 얼핏 암시하거나 유비하게 되는 것 같다. 하지만 반대로, 그만큼 다시 몸을 멀쩡히 일으켜서 다가올 고꾸라짐의 차례를 준비하는 배우들의 수행적인 실천이 일일이 부각되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 연극의 시간을 메우는 것은 죽은 듯이 내던져지는 몸뿐만이 아니라, 쓰러졌던 만큼 도로 살아나는 몸들의 운동성이기도 하다. 내가 다이인 행동에 동참하면서 나의 쓰러진 몸이 어느 팔레스타인인의 구체적인 죽음을 떠올리게 할 수도 있으리란 걸 알았던 것처럼. 하지만 그와 달리 내가 결코 죽지 않고 일어나게 되리라는 걸 다시금 상기하게 되었던 것처럼. 땀을 흘려가면서 자신을 넘어뜨렸다가 다시 일으키는 배우들의 이 열띠고 자학적인 수행의 반복은 그 자체로 팔레스타인의 고통을 표상한다기보다는, 차라리 그 고통에 자꾸만 근접해 보려는 창작진의 위치(성)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일어서는 몸들을 보면서 나는 이 연극이 조명하려는 것이 팔레스타인이나 팔레스타인을 둘러싼 문제들이라기보다 그것에 접속하려는 ‘우리’라고 믿게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연극이 (하필) 1982년 레바논 난민 캠프에서의 팔레스타인인 집단학살을 간접적으로 목격했던 백인 프랑스 작가 장 주네의 글을 빌려 온 것은, 위험을 피해 갈 수 있었던 주네의 우연한 행운이나 특권적 위치에서 ‘우리’의 얼굴을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혹은, 뒤늦게 도착한 비-당사자 주네가 ‘기록’이라는 형태로 시도했던 개입이 연극과 닮아있다는 생각에서 비롯되었을는지도. 배우들은 무대와 객석 사이 한쪽 구석에 마련된 자리로 가서 『샤틸라에서의 4시간』을 번갈아 읽는다. 고꾸라지는 몸들이 무대 바닥과 충돌하는 둔탁한 소리 위로, 학살이 지나간 샤틸라 캠프의 무참한 풍경을 소묘하는 문장들이 거듭 덧입혀진다. 주네가 이스라엘군과 팔랑헤 민병대에 의해 살해된 팔레스타인 난민들을 목격했다면, 배우들은 몸으로써, 몸 위에 그 집단학살의 기록을 다시 기록하고 싶은 것처럼 보였다. 훼손되고 방치된 채 몇 구씩 숱하게 쌓여 있는 시신들을 이야기하는 대목에서는 흩어져 있던 봉제인형들을 그러모아 쌓아 올리면서, 자기 몸을 그 인형 더미 위로 또 한번 내던지면서, 주네가 난민들과 나눈 대화를 이따금 연기하기도 하면서, 그러다 때로는 정말 눈물을 흘리기도 하면서. <진노>는 죽음을 닮은 반복적인 투신의 행동과 주네가 포착했던 집단학살의 광경을 교차시키는 가운데, 배우들이 팔레스타인 인민의 고통을 자기 신체 위에 계속해서 기입하려는 과정에 주목한다.
죽음을 가하는 몸을 응시하기
추락하는 신체의 이미지나 학살의 기록이 팔레스타인에 드리운 죽음과 부정의를 떠올리게 한다면, 간헐적으로 틈입하는 짤막한 독백들은 집단학살이라는 이 교묘한 기획에 분명히 책임을 나눠 가진 ‘우리’ 공모자들의 구체적인 욕망과 곤경을 들여다보게 한다. 고꾸라지기를 중단하고 별안간 객석 가까이로 다가오는 배우들은 관객들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면서, 혹은 마이크를 쥐고 소리치면서 ‘피의자’가 되는 일의 요건에 관해 여러 차례 질문한다. 예컨대 한 배우는 과거 그린피그의 공연 <의붓기억-억압된 것의 귀환>2010을 인용한 것처럼 보이는 대사를 통해 성서 속의 한 논쟁적인 장면을 거론한다. 세례요한의 목을 따라고 딸을 추동한 헤로디아, 요한의 머리를 은쟁반에 내 달라고 왕에게 요청한 살로메, 기어이 참수를 명령한 헤로데 왕, 그리고 그 참수를 실행한 왕의 경비병 중에서 누가 얼마큼 요한의 살해에 잘못이 있다고 말해야 할까. 전쟁범죄에서 피의자의 몫을 가려내는 작업이 얼마나 곤란한지, 그럼에도 얼마나 필요한지를 묻기 위해 고안되었던 이 독백은, 2023년 10월 7일 가속화된 집단학살 이후의 세계를 사는 우리에게는 팔레스타인을 절멸하는 기획에 공모한 ‘우리’의 몫은 어디까지인지를 묻는 질문으로도 들린다. 주네의 산문을 낭독하는 목소리와 독백이 중첩되면서, 때로는 집단학살의 광경을 포착한 그 기록보다 더 큰 목소리로 범람하듯이 발화되면서, 연극은 이제 팔레스타인을 말하려는 우리의 피의자성에 몰두한다.
마찬가지로 한국 시민 한 명이 집단학살에 사용된 탄환 속 화약에 파급했을 영향의 정도를 오래도록 계산하는 장면은 무척 인상적이다. 이스라엘의 대규모 방산업체 엘빗 시스템즈와 협약을 맺은 한화2는 매년 130억 원 이상을 들여 서울세계불꽃축제를 개최한다. 그 축제를 즐기는 사람들 각자가 지닌 책임의 크기를 오래도록 계산하는 것이다. 어느새 벽면은 계산을 위한 수식으로 빼곡하게 메워져 있고, 땀을 쏟고 고함을 쳐가면서 계산을 마친 배우는 그 모든 가해의 정도가 실은 고작 1퍼센트에 지나지 않는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이 과정은 집단학살에 미친 한국인의 책임이 실제로 아주 미미하다는 사실을 입증하려는 시도라기보다, 오히려 팔레스타인에 관해서라면 윤리적·정치적인 책무를 지거나 사유하기를 거부하면서 집단학살을 먼 데서, ‘중동’에서, 우리와 조금도 닮지 않은 세계에서 벌어지는 문제로 취급하려는 ‘우리’의 결벽증적인 욕구와 근거 없는 거리‘감’을 재현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연극이 공들여 보여주려는 것은 차라리 가해의 몫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우리’, 바로 그 부정을 통해 이 국제적인 기획에 공모했을 뿐 아니라 이제는 수치스러워야 옳을 만큼 피의자의 자리에 연루되기를 택한 ‘우리’의 더럽고 치사한 얼굴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연극을 견인하는 하나의 힘이 팔레스타인의 고통을 몸에 기입하려는 노력이라면, 또 하나의 축은 팔레스타인에 가한 고통을 돌이켜보려는 물음이다. 연극의 마지막 장면은 팔레스타인인처럼 바닥으로 고꾸라지던 배우들이 이제 그 팔레스타인인을 연상하게 하는 몸들을 처형하는 피의자로 전환되는 순간을 포착한다. ‘우리’의 작디작은 유해함의 스케일을 열정적으로 계산해 둔 바로 그 벽면 위에, 배우들은 사람 모형의 인형들을 하나씩 고정시킨다. 바닥에 고꾸라져 쳐박혀 있었던 봉제인형을 아무렇게나 집어들고, 스테이플러 건이 발사되는 커다란 소음에 맞춰 벽에 붙박는다. 이 과정은 일종의 처형처럼도 보인다. 연극이 끝날 적에는 관절이 뒤틀린 채로, 장작처럼 아무렇게나 쌓인 채로 붙박인 인형들로 이루어진 벽이 완성된다. 팔레스타인 난민들의 시신이 방치되어 부패한 광경을 포착했던 주네의 바로 그 묘사처럼.
‘우리’와 팔레스타인 사이의 거리에 관한 <진노>의 비전은 명료하면서도 냉담하다. 그 거리는 무척 실재적이어서, 한 시간 반 동안 몸을 내던지면서 바닥으로 고꾸라지는 실천들만으로는 너끈히 좁혀지지 않는다. 다만 우리와 팔레스타인 사이에 무엇이 놓여 있는지를 알고 이해하며 인정하는 실천만이 가능하다고, 우리의 끔찍한 꼴을 들여다보는 편이 차라리 더 시급하리라고 연극은 말하는 것도 같다. 나는 그런 분석이 무척 옳다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팔레스타인에게로 다가서려는 연극적 추동들이 얼핏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횡단으로 기어이 이어지는 풍경을 만나고도 싶다. 왜냐하면 다이인 행동을 마치고 다시 걸어 나가는 나는 죽은 것처럼 쓰러져 드러누워 있기 이전의 나와는 필연적으로 다른 사람이 되기 때문이다. 내 몸은 여전히 어떤 죽음을 표상할 수는 없을 테지만, 그 죽음이 내 몸에 기입되는 과정이 나에게 선사하는 연대의 시간이 있다. 오로지 그것만을 딛고 나는 사망한 팔레스타인 언론인들의 사진을 들고 행진할 수 있었다. 겸연쩍은 낯으로. 그런 만큼 해방을 소원하는 걸음으로. 그러니 팔레스타인과의 거리(감)을 응시하고 난 이후를 말하려는 우리를 연극적 장면 속에서도 발견하고 싶다고 요청하게 되는 것이다. 바닥으로 고꾸라지는 몸들이 자신의 살갗과 뼈대에 새긴 죽음들을 토대로만 말할 수 있는 것들을 기대하고도 싶다. ‘우리’는 물론 그르고 유해하지만, 더 나은 연대의 각본을 쓸 책임도 있으니까.
김현지
연극을 만들면서 기록도 합니다. 그런데 그보다는 자주 관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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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동창작 그린피그, 출연 고경철· 권효은· 김원태· 김효영· 박수빈· 박은혜· 박정근· 이동영· 이승훈· 정연종· 최지현, 연출 윤한솔, 글쓰기 전성현, 조연출 조웅철· 정유진, 움직임 안지형· 양진영, 인형 감독 이지형, 음악 안벼리, 조명 김형연, 음향 전민배, 기획/무대감독 스탭서울, 그래픽 디자인 워크룸. 예술공간 혜화, 2026.7.25.-8.2. ↩︎
- 2020년 2월 한화시스템은 대한민국 공군 차세대 전투기에 이스라엘 엘빗 시스템즈의 시스템을 탑재하는 계약을 체결했다고 밝혔고, 이어 2021년 10월과 2024년 10월 두 차례에 걸쳐 양사는 MOU를 체결하며 협력을 약속했다. 한화의 집단학살 공모에 관한 더 상세한 설명은 팔레스타인문화연대에서 작성한 ‘철회하라 한화’ 캠페인을 참조. https://pal.or.kr/wp/abandon-hanwha-q-a/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