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자혜
그런데 웃긴 게 뭔지 알아? 나는 이 영화들을 보고 알았어. 아, 동성애를 하려면 각오해야 하는 거구나?
근데 여기선 각오 안 해도 돼.
– 나희경, <태국GL드라마가 한 퀴어 여성에게 미치는 영향 : This Is My Love Story> 중에서
매 순간 각오를 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성별을 기재해야 하는 공문서 앞에서, 화장실에 들어갈 때, 파트너와 손을 잡고 거리를 걸을 때, 입국심사를 받을 때. 누군가에게 각오는 특별한 사건이 아니라 일상이다. 아직 오지 않은 순간들에 대처하기 위해 각오를 미리 연습하며 살아간다. 각오를 연습하기 위해서는 공간이 필요하다. 도화지가, 오선지가, 필름이, 지면이, 무대가 그 공간이 될 수 있다.
자신의 삶을 걸고 희곡을 쓰는 극작가들이 있다. 승인받지 못했던 존재를 무대 위에 등장시키는 순간, 그 인물은 곧 작가 자신의 정체성과 세계관을 드러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에게 희곡을 쓴다는 것은 창작을 넘어, 자신의 존재를 세상 앞에 걸어두는 일이다. 현실에서 자신의 정체성으로 살아가기 위해 각오해야 하는 사람들에게 희곡은 자신의 정체성을 통과해 쓰는 각오의 언어다. 어떤 연극은 가장 정치적인 예술 언어를 요구하기도 한다.
왜 어떤 존재들은 자신의 존재를 말하기 위해서조차 각오해야 할까. 그들이 써낸 작품은 단지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이전에는 드러낼 수 없었던 존재들을 무대 위에 출현시킨 것이다. 그 변화는 어느 날 갑자기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자신의 존재를 드러냈을 때의 파장을 각오한 한 사람의 결심이 또 다른 사람의 용기를 불러냈고, 그렇게 서로를 지켜봐 준 시간이 쌓여 하나의 역사가 되었다. 어떤 이야기들은 오랫동안 여러 사람들의 ‘각오’ 위에서 가능해진 결과다. 그리고 그것을 기록하기 위한 움직임이 있어 왔다. 한국 퀴어 연극 아카이브는 “기존의 연극사를 적극적으로 퀴어링하고, 지배적인 성 문화에서 이탈한 연극적 실천들을 발굴 · 범주화 · 계보화함으로써 동시대 창작자들에게 유용한 좌표 공간을 제공”한국퀴어연극아카이브 https://queertheater.kr/ 한다. 연극은 각오를 조금씩 불필요한 것으로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현실에서 각오했던 것들이 희곡 속에서 자동으로 가능해지는 것은 아니다. 연극 역시 현실을 통과하는 예술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환상을 그리기보다 아직 현실에는 없지만 반드시 현실이 되어야 할 세계를 상상하고 싶다. 그것에 도달하기 위한 시간 속에는 혐오와 차별을 승인하는 세계와 분투하는 여정이 담겨있다. 세계가 혐오, 차별, 배제를 승인하는 한, 사람들은 그것을 해도 되는 일이라고 믿는다. 그러한 세계 속에서 어떤 존재들은 숨어있어야 했고, 비로소 이름을 얻은 존재들은 그 언어를 딛고 세계에 출현하기 시작했다.
레즈비언/바이/팬/트랜스/논바이너리 등 여성 쪽에 가까움을 느끼는 사람들 간의 사랑과 관계를 아우르는 단어. GL(걸즈러브)보다 더 다양한 정체성을 포괄하기 위해 쓰이기 시작했어요.
나희경의 <태국GL드라마가 한 퀴어 여성에게 미치는 영향>에 나오는 ‘사픽(Sapphic)’에 대한 설명이다. 언어는 단순한 명칭이 아니다. 이전에는 설명할 수 없었던 삶을 말하게 만들고, 이전에는 이름 붙일 수 없었던 삶을 사회 안으로 불러낸다. 물론 언어가 존재를 승인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일이 불편하기도 하다. 존재는 이름이 없어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어떤 언어는 한 사람에게 처음으로 자신을 설명할 수 있는 힘이 되어 주기도 한다. 언어를 얻을 때 비로소 자신이 혼자가 아니라고 느낄 수도 있다. 또한 여러 언어의 겹침 속에서만 존재 ‘되는’ 사람들도 있다. 이것이 우리에게 다양한 언어가 필요한 이유이다. 그렇게 그 존재들은 발견되기도 하고 증식되기도 한다. 만화, 영화, 방송 등의 매체는 정체성을 부정당했던 존재들에게 명명의 기회를 줌으로써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들끼리의 발견과 연대를 만들어냈다. 그것들은 나라는 존재의 좌표를 이 세계에 어떻게 위치시킬 것인지 도와준 셈이다. 나는 연극이 그런 역할을 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꺅~ 야~ 진짜 이렇게 많은 거야? 여기 전 세계에서 4,500명이 왔는데. 얘네가 다 사픽이라고?
나희경의 <태국GL드라마가 한 퀴어 여성에게 미치는 영향>은 바로 그런 순간을 포착한다. 작품 속 인물은 태국 GL 드라마 속 세계에 깊이 빠져든다. 그곳에서 그는 지금까지 승인되지 않았지만 분명 존재했던 사람들이 당연하게 존재하는 세계를 발견한다. 그리고 그 세계에 동참하게 된다. 어떤 세계를 본다는 것은 자신이 존재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본다는 뜻이다.
왜 어떤 사람들은 살아가기 위해, 사랑하기 위해, 자기 자신이라고 말하기 위해 먼저 각오해야 하는가. 연극은 그 질문을 끝없이 되묻는 예술이다. 동시에 그 질문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세계를 미리 연습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연극은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기 위해 각오해야 했던 사람들의 역사를 기록하는 한편, 언젠가는 누구도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각오하지 않아도 되는 세계를 상상하고 연습한다. 그 세계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그러나 수많은 희곡과 공연은 그 세계를 조금씩 현실로 만들어 왔다. 존재가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 정체성이 용기의 대상이 아닌 사회. 연극은 그 미래를 앞당기는 가장 느리지만 가장 집요한 예술이 되어야 한다.
지금까지도 한국 드라마가 보여주지 않는 세계에 매료된 저는, 여성 퀴어의 이야기를 찾아 어둠 속을 헤맸습니다. 지금 이 자리를 빌어 판도라TV, 더플래닛, 클럽박스, 위디스크, 토렌트, 유튜브에 퀴어영화와 자막을 공유해주신 숨은 영웅들에게 감사를 전합니다. 투자받기 힘든 상황에서 여성 퀴어 콘텐츠를 세상에 내놓기 위해 노력해 온 창작자와 제작진, 숨겨왔던 사랑과 욕망을 시끄럽게 드러낸 동료 퀴어 팬들, 사회 변화를 위해 노력해 온 활동가들 덕분에 지금의 제가 있습니다. 여러분과 이 영광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나희경의 <태국GL드라마가 한 퀴어 여성에게 미치는 영향>에서 마치 수상소감처럼 나오는 이 말은, 그가 자신이 존재할 공간을 마련해준, 보이지 않는 존재들에게 전하는 감사의 말이다. 우리는 서로에게 상을 건넨다. 존재해 왔고 존재해 갈 사실을 축하하는 상을 건넨다. #미투(Me Too) 운동 이후 그리고 이전, 퀴어 페미니즘 연극을 생산한 창작자들과 이들에게 끝없는 용기를 건네준 관객들이 있다. 우리가 서로에게 건넬 영광을 꿈꿔본다. 차별금지법 제정은 단지 법 하나를 만드는 일이 아니다. 더 이상 누구도 자신의 존재를 말하기 위해 각오하지 않아도 되는 세계를 만드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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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 출처 : 나희경, <태국GL드라마가 한 퀴어 여성에게 미치는 영향 : This Is My Love Story> (나희경 제공)
구자혜
<발굴되지 않은 언어의 고통> <그로토프스키 트레이닝> <퇴장하는 등장> <곡비> 등을 쓰고, <“뺨을 맞지 않고 사는 게 삶의 전부가 될 순 없더라”>를 색자와 함께, <연극실험실 혜화동1번지>를 이리와 함께 쓰고, <우리는 농담이(아니)야> <드랙X남장신사> 등을 연출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