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연주

기념은 재공연의 명분이 될 수 없다. ‘여성연극제’에서 작가 김자림 탄생 100주년을 맞아 <이민선>김자림 작, 류근혜 연출, 서울연극창작센터 서울씨어터 202, 2026.8.6.~8.9.을 다시 무대에 올리는 작업은 작가의 이름을 호명하고 그를 기리는 데서 그쳐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왜 지금 이 작품이어야 하는지, 1960년대의 이민과 가족, 국가와 여성의 문제를 지금 여기에서 어떻게 다시 읽고 해석할 것인지가 함께 제시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번 공연은 이 질문에 답을 하지 못했다. ‘김자림 탄생 100주년’, ‘60년만의 재공연’이라는 기념의 표제는 선명했지만 그 기념에 값하는 해석을 무대에서 발견하기 어려웠다. 특히 이 작품에서 도드라지는 여성 인물들의 욕망과 상처, 침묵은 현재의 시각으로 검토되지 않은 채 무대화되고, 광기와 죽음, 모성, 생존 전략을 둘러싼 원작의 문제적 장치들은 기존 무대에서의 틀에 박힌 여성 재현을 답습했다. 그 결과 <이민선>의 재공연은 현재와 소통하지 못하고 기념이라는 명분 아래 작품을 박제로 만들었다.

국가의 항로에서 어긋나는 여성들

<이민선>은 1962년부터 시작된 국가 주도의 브라질 이민사업이라는 실제 사건에서 출발하여 “야망에 사로 잡힌 인간의 끈질긴 투지력”1을 보여주려 한 작품이다. 작품이 집필된 것은 1964년, 공연이 올라간 것은 1966년이다. 브라질 이민사업이 계속 진행되고 있던 때에 집필·공연된 이 작품은 이민사업의 실패와 혼란이 전개되는 도중의 동시대적 개입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 여기에서 <이민선>을 다시 읽게 하는 것은 작가가 내세운 인간군상의 야망과 투지 자체보다, 그 투지가 국가의 개발 논리와 결합할 때 누구에게 미래의 자격이 주어지고 누가 그 미래의 비용을 떠안는지를 작품이 드러내기 때문일 것이다.

출항을 앞둔 호텔 보헤미안에는 가난과 채무, 실향과 가족의 해체로부터 벗어나려는 사람들이 모여 있다. 정부가 브라질을 새로운 삶이 가능한 ‘신천지’로 제시하지만 인물들에게 이민의 의미는 동일하지 않다. 누군가에게는 재기의 기회이고, 누군가에게는 가족의 생존을 위한 거래이며, 또 다른 이에게는 자신이 붙들고 살아 온 기억으로부터의 도피이다. <이민선>은 국가가 개인들의 절박함을 개발과 국익의 언어로 조직하고, 그들을 이민 가능한 국민과 가족으로 분류하는 과정을 출항 직전의 임시 공간 안에 압축한다.

기존 연구가 <이민선>의 가족 구성에 주목해 온 이유도 여기에 있다. 작품 속 가족은 혈연과 친밀성으로 연결된 공동체인 동시에 이민 자격과 노동력을 계산하는 행정 단위이다.2 고창수의 가족은 이미 상실과 불화로 흔들리고 있으며, 피양댁은 승선 자격을 얻기 위해 남편과 아들을 새로 구해 가족을 조립한다. 이 설정을 ‘가짜 가족’이 벌이는 우스운 소동으로만 보면 국가가 가족을 생산하는 방식은 보이지 않는다. 국가는 가족을 자연적이고 안정적인 관계로 전제하면서도 정책의 필요에 따라 가족을 선별하고 노동력의 단위로 재편한다. 피양댁이 만든 가족은 정상가족에서 일탈한 예외이면서 동시에 무엇이 가족으로 승인되는지를 결정하는 제도의 자의성을 드러낸다.

여성 인물들은 이러한 국가적 미래에 각기 다른 방식으로 균열을 낸다. 대체로 남성 인물들이 브라질을 재출발과 성공의 언어로 말할 때 창수댁과 소라는 고향과 실향, 전쟁과 가족의 죽음, 몸에 남은 폭력과 상실의 기억을 무대 위에 되돌려 놓는다. 이들의 머뭇거림과 반복되는 말, 침묵과 집착을 미래에 적응하지 못하는 개인의 병리로만 읽을 수 없다. 이들이 붙드는 과거는 출항을 방해하는 낡은 짐인 동시에 국가가 새로운 미래를 말하기 위해 지워야 했던 역사의 흔적이다. 여성들의 몸은 과거를 청산하고 브라질로 향하라는 가족과 국가의 요구에 온전히 동의하지 못한다. 이 점에서 <이민선>은 브라질 이민의 풍속을 재현한 시대극을 넘어 근대화의 미래가 어떤 기억과 존재를 뒤에 남겨두고 성립하는지를 묻는 작품이 된다.

원작은 원래 작가 자신이 드러낸 균열을 여성의 언어로 끝까지 밀고 가지 못한다. 소라는 죽고 창수댁은 미쳐가며, 여성의 기억과 비동의는 가족의 승선과 집단의 미래를 방해하는 요소처럼 처리된다. 작품은 근대화가 여성을 배제하는 과정을 포착하면서도 그 여성들을 죽음과 광기, 모성과 희생의 위치에 묶어두는 극적 관습을 함께 반복한다. 이 모순은 <이민선>의 한계이지만 연출이 적극적으로 개입해서 의미를 살릴 수 있다. 하지만 초연의 연출은 연출력의 부족을 단순하게 작품 탓으로 돌린다.3 그렇다면 재공연의 연출은 달라야 하지 않을까. 여성 인물을 현재적인 영웅으로 고쳐 쓰거나 원작의 결말을 낙관적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여성들이 어떤 힘에 의해 희생자와 미친 여자로 만들어지는지, 가족과 국가의 출항이 가능해지기 위해 그들의 기억과 욕망이 어떻게 제거되었는지의 구조를 무대가 가시화해야 했다는 뜻이다.

60년의 간격을 건너지 못한 무대

프로그램에 실린 글을 확인해볼 때 공연팀은 이 작품의 모순을 현재적인 질문으로 발전시키지 못한 것 같다. 드라마투르그는 창수댁과 소라를 “과거 때문에 떠나지 못하는 이들”로 설명하고 이들의 과거를 새로운 출발의 “발목을 잡는” 것으로 규정한다. 피양댁의 가족 역시 “조립식이라는 문제”를 지닌 가족으로 평가된다. 이러한 설명에는 앞으로 나아가는 삶을 정상적인 것으로, 과거를 붙드는 삶을 실패한 것으로 판단하는 근대화의 시간관과 혈연·혼인 중심의 가족을 온전한 가족으로 간주하는 규범이 그대로 남아 있다. 특히 피양댁을 “여성이지만 필요에 따라 가족을 조립해 당당하게 낯선 세계로 향하는 용기 있는 인물”4이라고 소개하는 것은 여성의 적극성과 결단을 여전히 예외적인 자질로 다룬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여성 인물의 주체성을 강조하지만 그 주체성을 해석하는 언어는 작품이 쓰인 시대의 젠더 관념에서 충분히 벗어나지 못했다.

이 해석의 빈곤은 무대화의 과정에서 잘 드러났다. 호텔 보헤미안은 출항과 정주, 희망과 불안 사이에 놓인 경계 공간으로 구축되지 못했고 여러 인물의 사연을 병렬적으로 수용하는 사실주의적 배경에 머물렀다. 의상은 인물들의 계급과 지역, 각자가 지닌 과거의 시간을 구체화하기보다 1960년대를 표시하는 복고풍의 외형으로 기능했다. 음악은 여성 인물들의 서로 다른 욕망과 침묵을 구별해 들려주지 않고 장면마다 비장함과 슬픔의 정서를 덧씌웠다. 연기 역시 인물의 역사와 관계를 축적하기보다 사투리와 익살, 울음과 광기를 과장되게 표현했다. 무대·의상·음악·연기는 서로 다른 문제처럼 보이지만 모두 이 작품을 지금 어떤 관점에서 다시 읽을 것인지 결정하지 못한 연출의 공백에서 비롯되었다.

프로그램은 김자림이 ‘여성의 문제’를 넘어 ‘사회 문제’를 다루었다고 평가한다.5 그러나 이 작품에서 여성의 문제를 덜어내고 남는 중성적인 사회 문제는 존재하지 않는다. 국가가 가족을 이민 가능한 단위로 편성하는 방식, 남성을 동원 가능한 인력으로 취급하는 방식, 남성의 미래를 위해 여성의 기억과 동의가 삭제되는 방식 자체가 <이민선>의 사회비판을 구성하기 때문이다. 여성과 가족을 둘러싼 문제는 국가의 이민정책에 부가된 사적 갈등이 아니라 국가가 국민을 선별하고 이동시키는 과정이 구체적으로 작동하는 장소이다.

따라서 이번 공연에서 필요했던 것은 ‘강한 여성’과 ‘억센 여자’, ‘적극적인 여성’과 ‘되바라진 여자’, ‘자유로운 여성’과 ‘문란한 여자’ 사이를 오가는 인물 유형화가 아니었다. 소라의 욕망은 왜 남성들이 설계한 미래와 충돌하는가. 창수댁이 붙드는 과거와 고향의 기억은 왜 비동의의 언어가 되지 못하고 광기로 분류되는가. 여성의 머뭇거림과 거부는 어떻게 가족의 희망을 가로막는 장애물로 취급되는가. 그리고 여성들이 말할 수 없게 된 자리를 다른 인물들의 목소리와 음악은 어떤 방식으로 차지하는가. 공연은 이러한 질문을 배우의 몸과 인물 관계, 무대의 공간과 소리로 조직했어야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문제는 1966년 초연 당시의 공연평과도 겹친다. 여석기는 당시 공연에 대해 “주제는 집약되지 못하고 적지않은 인물들의 출입만이 번거롭게 눈에 띈다.”라고 지적했다. 또한 “연기에다 통일된 ‘스타일’을 부여하고 일부에 두드러진 ‘오버액숀’은 최대한도로 억제할 필요가 있었고 무대의 보다 효과적인 사용이 아쉬웠고 효과음악의 ‘센티멘탈’한 사용은 백해무익이다.”6라고 비판했다. 임영웅 역시 제목에서부터 연기진이 ‘앙상블’을 이루지 못한 점을 문제 삼았다.7 인물들의 번잡한 출입, 통일되지 않은 연기 양식, 과장된 연기, 효율적으로 활용되지 못한 무대, 감상적인 음악이라는 지적은 놀랍게도 60년 뒤의 공연에도 거의 그대로 적용된다.

여성연극제의 방향성과 책임에 대해

물론 서로 다른 시대와 제작 조건에 놓인 두 공연을 동일하게 평가할 수는 없다. 다만 작가 탄생 100주년과 초년 60주년을 내세운 재공연이라면 초연 당시부터 지적된 작품의 구조적·공연적 난점을 어떤 연출적 선택으로 넘어설 것인지가 중요한 과제가 된다. 그러나 이번 공연은 작품을 현재적으로 재해석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초연이 해결하지 못했던 제작상의 문제까지 되풀이했다. 60년만의 재공연이라는 시간적 간격은 작품을 새롭게 읽을 가능성을 열어주었지만 공연은 그 간격을 해석의 거리로 활용하지 못했다. 그 결과 1966년 초연을 향했던 비판은 2026년의 무대 앞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말로 남았다.

공연 중간중간 객석에서 유쾌한 웃음과 훌쩍임이 번갈아 들렸고 눈물을 닦는 관객도 보였다. 이 무대가 누군가에게는 마음에 깊이 와닿는 좋은 공연이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연출과 23명의 배우, 무대, 조명, 음악을 통해 1960년대 명동 국립극장식 연극의 분위기를 복원하고, 세대가 다른 배우들이 만든 앙상블과 개별 인물의 개성을 잘 살렸으며, 브라질 교민 취재 기억이 공연과 오버랩되면서 카타르시스를 느꼈다는 평가를 봤을 때 이 글의 평가는 너무 혹독한 데가 있다. 그럼에도 관객의 감동과 공연의 비평적 성취는 동일한 척도로 판단되지 않는다.

이 글이 공연에 엄격한 기준을 적용한 이유는 ‘여성연극제’와 ‘김자림 탄생 100주년 기념공연’이라는 이름을 내걸었기 때문이다. 그 이름은 여성 극작가의 업적을 기리는 데 더해 원작 속 여성들의 욕망과 기억, 침묵을 오늘의 감각으로 다시 읽을 책임을 요청한다. 이번 <이민선>이 관객의 웃음과 눈물을 이끌어냈다는 사실과 여성 인물들을 둘러싼 오래된 재현의 문법을 갱신하지 못했다는 판단은 함께 성립한다. 끝내 아쉬웠던 지점은 감동의 크기보다 그 감동이 어떤 여성의 목소리를 들려주고 어떤 여성의 비동의를 다시 침묵시키는지 묻는 연출적 시선의 부재였다. 기념은 감동을 조직할 수 있어도 해석을 대신할 수는 없다.

유연주

한국의 페미니즘 연극사를 연구하면서 연극계 백래시와 여성 혐오를 주시하고 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1. 김자림, 「작가의 말」, 『<이민선> 프로그램』, 국립극단, 1966. ↩︎
  2. 김옥란, 「1960년대 김자림 희곡을 통해 본 여성성과 근대성-〈이민선〉을 중심으로」, 『한국극예술연구』 10, 115~116쪽 참조. ↩︎
  3. “설었던 익었던 비평의 도마 위에 날 올려 놔 봅니다. 그러면서 마지막 한마디 안간힘을 써봅니다. 좀더 좋은 희곡은 없는가고…….” 전세권, 「연출의 말」, 『<이민선> 프로그램』, 국립극단, 1966. ↩︎
  4. 인용은 전성희, 「드라마투르그의 말」, 『‘제11회 여성연극제’ 프로그램』, 한국여성연극협회, 2026. ↩︎
  5. 위의 글. ↩︎
  6. 여석기, 「국립극단 공연 <이민선>-의욕적 소재·‘스타일’ 결여된 연출」, 『동아일보』, 1966.06.16. ↩︎
  7. 임영웅, 「‘앙상블’ 못 이룬 연기진-‘국립극단’의 “이민선”」, 『경향신문』, 1966.06.08. ↩︎

ACTiO에서 더 알아보기

구독을 신청하면 최신 게시물을 이메일로 받아볼 수 있습니다.

인기 검색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