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혜정
무대감독 저 애 얘기 좀 해볼까요? 쟨 여기 고등학교를 졸업했는데, 반에서 일등이었죠. 그래 장학생으로 메사추세츠 공대에 들어가 학과 수석으로 졸업했고요. 그때 보스톤 신문에 굉장했었죠. 헌데 막 훌륭한 엔지니어가 되려는 순간 전쟁이 터져 프랑스에서 전사하고 말았습니다. 모든 공부가 허사가 된 거죠.
— 손톤 와일더, <우리 읍내> 중에서
연극 <우리 읍내>의 무대감독은 무심한 듯 담담한 어조로 한 인간의 빛나던 미래와 무력한 죽음을 한데 엮어 관객에게 툭 내던진다. 무언가를 이루겠다고 자신을 갈아 넣으며 달리는 삶의 무용함을 묻듯이.
‘해외◯◯◯ 최종 선정’ 최종 한 팀으로 사업에 선정되었다는 전화를 받았을 때, 세상은 다 내 것 같았고 마음은 이미 비행기에 올라탄 듯 부풀었다. 세계 무대에서 마실의 연극을 마음껏 뛰놀게 하겠다는 열망에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몰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꿈이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길고 긴 싸움이 시작될 거라는 사실을. ‘예술계 블랙리스트’라는 진흙탕에 빠져 누군가의 손끝 하나로 내 정체성과 열정이 쉽게 지워지는 절망을 겪으며 나 스스로 길을 잃게 될 줄은 꿈에도 모른 채 나는 그렇게 웃고 있었다.
“젊은 사람이 오니 너무 반갑네. 밥 묵었어?”
모든 문이 닫힌 후 우연히 들렀던 곡성의 창문 너머로 신나는 뽕짝 가락이 흘러나왔다. 홀린 듯 들어간 동네 노래교실. 노래가 끝나자 할머니들은 대충 쓱쓱 비벼 얹은 밥 한 그릇을 내밀며 정답게 말을 건넸다.
“또 와, 다음에 또 언제든 와.”
할머니들이 던진 그 따뜻한 말 한마디, 땀을 뻘뻘 흘리며 노래 부르던 그 뜨거운 생명력이 오랜만에 설렘을 느끼게 해줬다. 며칠 뒤 커다란 수박 한 덩이를 짊어지고 다시 그곳을 찾았을 때만 해도 몰랐다. 연극 따위는 다시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건만, 그날 할머니들이 건네준 따스한 밥 한 덩이가 목을 넘어가며 호기심을 건드렸을까? 그 깊은 삶을 움직이는 힘이 궁금해져 질문하기 시작했고, 할머님들의 사연이 모여 끝내 연극 <심청길 비밀레시피>+)로 다시 피어나 버릴 줄은.
“도시락 하나 더 주면 북한 물김치 담그는 법 알려줄게.”
코로나 시절 미국에서 도시락 봉사를 하며 만난 치매 할머니는 ‘1인 1도시락’ 원칙 앞에서 계속 떼를 쓰셨다. 할머니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을 때는 몰랐다. 모든 기억이 가물거리는 치매 속에서도 ‘북한식 물김치 비법’을 말할 때만큼은 꼿꼿해지던 할머니의 자세, 그리고 그 속에 서려 있던 자부심과 삶의 특별함이 작가로서의 나를 끌어당겨 결국 미국으로 다시 건너가 이민자들의 삶을 수집하게 될 줄은.
언어가 통하지 않아 생사의 위기에 몰린 순간에 딸이 일러준 지하철역 이름을 목숨 걸고 외치며 서슬 푸른 총구를 내려놓게 만들었던 영희 씨의 콩글리시 ‘아이 엠 씨티센타’(실제 역의 이름은 씨빅센터(Civic Center)), IMF로 모든 걸 잃고 도망치듯 건너온 미국에서 자신보다 더 아프고 힘든 이웃들이 서로를 다독이며 나누는 소박한 주먹밥 한 덩이에 다시 살아낼 힘을 얻었다는 영애 씨의 고백, 입천장을 데어가며 먹었던 초콜릿 쿠키, 그리고 잔돈이 부족해 사드리지 못한 복숭아 때문에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 수년간 복숭아를 입에도 대지 못했다는 사연까지… 도시락 하나 더 달라던 치매 할머니의 떼를 들을 땐 상상조차 못 했다. 제 존재를 걸고 살아낸 그 세월의 언어들을 만날 수 있게 될 줄은. 그리고 그 이야기의 주인공들이 연극 <심청길 비밀레시피 캘리포니아>++)무대를 통해 또 다른 이민자들 앞에서 자기 삶을 꺼내 놓으며 서로의 손을 꼭 쥐는 장을 만들어낼 줄은 정말이지 꿈에도 몰랐다.
무대감독 옛날 바빌론에는 이백만 명이나 살았습니다만, 남은 거라곤, 왕들의 이름하고, 밀이나 노예 매매계약서 몇 장뿐입니다. 하지만 바빌론에서도 저녁이면 굴뚝마다 연기가 오르고, 아버지는 일터에서 돌아오고, 그리곤 둘러 앉아 식사를 했을 겁니다. 여기 우리처럼요. 사실 그리스나 로마도 그 실제 생활은 그저 재미있는 시구절이나 연극대본을 통해서 아는 정도죠. 그래 저도 이 연극의 대본 한 권을 정초석에 넣을까 합니다. 천년 후의 사람들이 우리의 평범한 삶을 알도록 말입니다. 전 그게 베르사이유 조약이나 린드버그의 대서양 횡단비행보다 더 중요하다고 보거든요. 아시겠죠?
예술계 블랙리스트 사건은 그 무엇으로도 보상받을 수 없을 것 같아 어떤 요구도 하지 못한 채 내 안에 해결되지 않은 깊은 상처로 남아 있다. 또한 나는 여전히 늘 뭔가를 증명하려 안달복달하느라 정작 눈앞의 소중한 순간들을 놓치고 살아간다. 하지만 길을 잃고 헤매던 그 길 위에서 삶을 버텨낸 이들의 소박한 밥상과 사연을 가만히 보듬어 안고, 세상이라는 넓은 좌표 위에 내 삶의 자리를 연극 덕분에 찾아가고 있다. 곡성의 증기기관차와 강, 그리고 미국 실리콘밸리와 아리조나, 백년 된 LA의 아파트에 이르기까지… 이름 없이 버텨낸 보통 사람들의 삶을 통해 길을 잃었던 나의 상처와 방황을 ‘우리의 비밀레시피’로 만들며… 곡성을 골짜기 곡, 밝힐 성, 그러니까 골짜기까지 밝힌다고 스스로 고쳐 부르며 보이지 않는 깜깜한 내일에 머문 눈을 번쩍 떠 오늘을 보자고 스스로에게 다짐하면서.
에밀리 안녕, 세상이여 안녕. 우리 읍내도 잘 있어. 엄마, 아빠, 안녕히 계세요. 째깍거리는 시계도, 해바라기도 잘 있어. 맛있는 음식도, 커피도, 새 옷도, 따뜻한 목욕탕도, 잠자고 깨는 것도. 아, 너무나 아름다워 그 진가를 몰랐던 이승이여, 안녕. (눈물을 흘리며 무대감독을 향해 불쑥 묻는다) 살면서 자기 삶을 제대로 깨닫는 인간이 있을까요? 매 순간마다요?
살아가는 일에 치여 숨조차 쉬기 힘들 때, 스스로를 다 갈아 넣으며 험난한 시간을 건너온 나를 보듬어준 것은 거대한 성취가 아니었다. 길 위에서 만난 보통 사람들이 피워낸, 소박하고도 온기 있는 하루하루였다. 천상병 시인이 노래했듯 소풍 온 나그네처럼, 다정한 시선으로 온기를 넣어 하루를 시작해본다.
“안녕, 나의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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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 출처 : 손톤 와일더, 『우리 읍내』 (오세곤 옮김, 예니, 2013)
손혜정
극단 마실의 엄마 배우, 삶이라는 놀이터에서 관객과 함께 연극을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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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년부터 5년간 진행된 곡성 할머니 20여 명의 인터뷰 중 최종 8명의 사연을 재구성한 공연이다. 2022년 첫선을 보인 이후 매년 곡성 섬진강 기차마을의 증기기관차 및 인근 공연장에서 관객들을 만나고 있다.
++) 2020년부터 2026년까지 미국 캘리포니아와 아리조나 거주 다국적 이민자 20여 명을 인터뷰하여, 이 중 9명의 사연을 바탕으로 창작된 작품이다. 2026년 7월 2일, K센터와 협력하여 리딩공연으로 첫선을 보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