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근애
명동역을 지나갈 때마다 보았던 장면이 있다. 세종호텔 앞, 고공 농성장에 올라가 있는 한 사람. 몹시 추운 날 그를 처음 보았고 이듬해 겨울에 또 보았으니 1년이 다 된 시간이었을 것이다. 윤석열 파면 집회가 한창이었던 시기에도 그는 그곳에 있었다. 차를 타고 지나가다 목을 꺾어가며 그 모습을 좇았던 기억이 난다. 정차 신호가 길어지면 피켓에 적힌 문구를 유심히 읽은 날도 있었다. 그러다 언제인지도 모르게 그 모습을 그저 지나쳤던 것 같다. 지상에 선 이들의 무심함과 고공을 지키는 이의 아득함이 풍경처럼 멀어졌다. 누군가의 절박함이 익숙한 일상처럼 느껴진다는 건, 설명할 길이 없는 불편한 마음을 만든다. 나는 왜 그만큼만 보고 그만큼만 생각했을까. 분명한 건 그곳에, 6차선 도로 위 10미터 상공 철탑에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근력 연대 운동>권효원·손나예·오로민경·최희범 공동창작/출연, 최희범 구성/연출, 신촌문화발전소 공연장, 2026.7.30.~8.1.을 보기로 한 후에야, 그 사람이 ‘고진수’라는 사실을 알았다. 세종호텔에서 20년간 셰프로 일했던 그는 코로나19 시기 정리해고를 당했다. 경영 위기의 책임을 노동자, 그중에서도 조합원이 지게 된 부당 해고였다. 팬데믹이 끝난 후 호텔 매출이 늘고 흑자로 전환되었지만 복직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정리해고 여파로 250명이 넘었던 세종호텔 정규직 직원은 10분의 1로 줄고 그 자리는 비정규직과 외주나 하청 직원으로 대체되었다고 한다. 고용 불안정과 노동 시장의 문제가 그렇게 개인을 내몰았다. 그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그들이 박탈당한 노동의 권리는 어디서 보상 받을 수 있을까.
몸으로의 운동, 저항의 자원
<근력 연대 운동>은 이와 같은 노동 문제를 전면화하는 대신, 고공에 있는 고진수 지부장과 함께 운동으로 연대해온 ‘몸’들을 극장에서 만나는 일로 이루어진다. 극을 이끈 최희범에 의하면, 당시 시민단체 활동가로 일했던 남편의 제안으로 매주 철탑에 있는 지부장에게 운동을 가르쳐주는 일을 하기로 한 것이 이 연극의 시작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점차 여러 몸들이 모여 함께 운동을 하게 되었고 그렇게 연루된 몸들이 투쟁에 연대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연극은 고진수 지부장이 ‘진수 동지’가 되기까지의 시간이 촘촘히 녹아들어 있는 몸들을 극장 안으로 소환한다. 신념이나 의지나 다짐이 아니라 함께 몸을 움직이는 일로부터 무언가가 시작된다면 그것은 어떤 힘을 가지고 있을까.
신촌문화발전소 극장에는 낯선 몸들이 모여 있었다. 입장을 하려는데 가방을 두고 신발을 벗고 들어가라는 안내를 받았다. 무대에는 1인용 은박 깔개가 듬성듬성 놓여 있었다. 이윽고 요가 복장을 한 최희범이 나타났다. 같이 운동을 하려는 거구나, 그제야 깨달은 나는 급하게 얼마나 몸을 굽히고 늘여도 되는지 옷매무새를 점검했다. 극이 시작되자 관객들은 최희범의 안내에 따라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고공에서 몸을 움직였던 ‘진수 동지’처럼 바닥에 몸을 대고 누워 불편함과 포근함을 동시에 느껴보고, 발가락을 오므렸다 펴고, 손을 하늘 위로 길게 뻗어보고, 근육이 굴러간다는 생각으로 앉았다 일어나 본다. 그렇게 조금씩 자기 몸을 알아차리는 시간이 차곡차곡 쌓여갔다.
관객들이 저마다의 속도와 모양으로 몸을 움직이는 사이, 스크린에는 세종호텔 투쟁의 장면들이 영사되기도 하고 함께 연대했던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오기도 했다. 장기화되는 농성으로 건강이 염려되는 사람을 위해 시작한 운동(exercise)이 어느새 운동(activism/movement)과 포개지는 순간이 만들어졌다.
애초 <1인의 몸을 위한 드라마트루기-고진수 편>이라는 제목으로 기획되었다는 이 연극이 ‘근력’과 ‘연대’와 ‘운동’이라는 낱말을 나란히 세우기까지, 어떤 고민이 있었을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저항의 자원은 큰 결심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취약함을 마주치는 데서 온다는 사실을 경험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삭발 투쟁을 하는 세월호 유가족의 표정이, 오체투지를 하는 장애인의 굳은 다리가, 고공 농성을 하는 사람의 그을린 얼굴이 던진, 그들이 의도적으로 주지 않았으나 내 쪽에서 받아든 무거운 질문. 왜 저들은 수치화되지도 증명되지도 않는 고통을 감내하면서 그 일을 하려는가. 어떤 세련된 구호나 연설보다 그 몸의 실재와 물질성이 더 완강하게 마음에 와닿는다.1 그들은 몸으로, 아직 그 사안이 종료되지 않았음을 항변한다. 저항은 승리가 아니라 지속으로 의미를 갱신한다. 몸을 걸어야만 말할 자격이 주어지는 이 왜곡된 구조를 향해, 완결되지 않은 지속을 향해 가는 그 마음은 무엇인가.
박탈당한 자들의 투쟁과 ‘마주침’을 겪는 일은 나를 흔들고, 내가 알던 세계 바깥으로 나를 이탈시킨다. 주디스 버틀러가 말한 두 개의 박탈(dispossession)은 이 지점과 맞닿아 있다. 인간다운 삶을 누릴 자격을 박탈당한 이들에게 영향받음으로써, 나 역시 기존의 자아를 벗어나 자기-외부에 위치하게 되는 박탈.2 결국 저기 존재하는 고통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이미 함께 살아가는 세상의 실존적 바탕이며, 그 복수성(plurality)을 보존하는 것이 윤리적 책무라는 뜻이다.3 죄책감 없는 부채감으로부터 솟아난 저 몸들과의 연대는, 바로 그 자리에서 우리에게 응답(response-ability)을 요구한다.
운동이 연극이 될 때
<근력 연대 운동>은 그 응답-책임을 향해 열려 있는 공연이었다. 서로 다른 몸들이 함부로 동일화되지 않고 자기 방식으로 공존하는 자리가 내내 이어졌다. 운동을 위해서 운동을 해야 한다는 사실–세상을 바꾸기 위해 몸을 단련해야 하고 자기 몸을 지키기 위해 세상이 바뀌어야 한다는 사실이 몸으로 와닿았다. ‘동지가’와 ‘처음처럼’에 맞춰 몸짓이나 율동 대신 근육을 자극하는 운동을 하는 장면에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 이색적인 조합이 새롭고도 지속 가능한 운동의 형식이라는 사실이 내심 반가웠기 때문이다.
주디스 버틀러는 공적 공간과 사적 공간을 구분했던 한나 아렌트를 비판하면서, 저항은 정치적 요구에 필요한 토대가 아니라 광장 안의 다양한 구석구석들, 대피소, 화장실, 식사 장소 등 인프라를 구축하는 가장 일상적인 차원에서 발생된다고 언급한 바 있다.4 삶을 지키는 저항의 형식은 먹고 돌보고 몸을 움직이게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창작 과정에서 주고받은 편지들은 공적 인프라보다 더 깊이 연결된 마음의 교환이다. 무대에 놓인 손 편지를 읽는 관객들에게도 그 마음이 전이되지 않았을까. 한 사람의 안위를 살피고 건강 상태를 걱정하는 일로부터 시작된 운동이 연극이 되기까지, 무수히 많은 몸이 모이고 서로 얽히면서 공존하는 장면들이 누적되었을 것이다. 그것은 돌봄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그 사실이 다행스럽게 느껴졌다.
명동 한복판, 세종호텔 고공 농성장에 걸려 있던 ‘프리 팔레스타인’을 기억한다. 무지개 깃발도 떠오른다. 좋은 정치란 하나의 구호 아래 도열하는 일이 아니라 다양한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다른 몸들을 관찰하고 헙력하는 가운데 이루어지는 지속적인 운동일 것이다. 연극이 운동이 되고 운동이 연극이 될 때, 극장 바깥에 존재하는 실재의 몸들이 서로를 지탱하는 모습을 재연하는 일이 왜 중요한지 새삼 깨닫는다. 서로 의존할 수밖에 없는 취약한 몸들이 함께 살기 위한 연습을 하는 일이 곧 삶이라는 생각이 든다. <근력 연대 운동>이 그 한 장면 같았다.
양근애
예술의 미학적/정치적 수행성에 관심을 두고, 극장에 머물지 않으려는 연극의 안간힘을 상상하고 기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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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객에게 링크로 제공된 연대 노트에서 이런 대목을 발견했다. “김종필 감독은 자신이 어떻게 한화오션 희망 뚜벅이를 함께 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마음이… 마음이…”라고 말하며 손을 반복적으로 그곳, 그러니까 아까 말한 그 흉골 아래 명치 쪽으로 가져가셨다. 그의 이야기를 듣는 나도 그 부분이 다시 조이는 것 같은 감각이 들었다. 내 뇌의 어떤 부분이 활성화되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작용이 연쇄적으로 몸의 그 부분에 사인을 보내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묵직해져라 묵직해져라. 너의 생존과 관련된 문제를 직면할 때와 비슷한 몸의 감각을 느껴라.”
- “세상에서 우리가 갖고 있는 위치, 그리고 타자와의 관계성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 말입니다. 응답하라는, 책임을 떠맡으라는 타자의 부름에 영향받고, 허물어지고, 그것에 얽매이게 되는 우리 자신을 발견할 때, 우리는 그렇다면 어떤 종류의 정치 공간이 가능하며 열리게 되는 것인지 고민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주디스 버틀러, 아테나 아타나시오우, 『박탈-정치적인 것에서의 수행성에 관한 대화』, 김응산 옮김, 자음과모음, 2016, 177쪽.
- 주디스 버틀러, 『연대하는 신체들과 거리의 정치』, 김응산·양효실 옮김, 창비, 2020. 167~179쪽.
- 위의 책, 2장과 4장 참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