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승훈
2013년 국립극단에서 벌어졌던 빨간 줄 대본 사건은 이제야 그 진상이 대부분 밝혀졌습니다. 피해자였던 남인우 연출가는 대한민국과 국립극단을 상대로 한 긴 재판에서 최종 승소하여 정부로부터 배상판결을 받았습니다. 그동안 강한 의혹은 있었지만 완전히 밝혀지지 않았던 이 사건이 백일하에 드러난 것입니다.
요약하자면, 당시 국립극단 예술감독이었던 손진책 연출가가 곳곳에 빨간 줄이 그어진 대본을 봉투에 넣어서 당시 사무국장이었던 C를 통해 남인우 연출가에게 전달하였습니다. 이는 명백히 헌법이 보장하는 표현의 자유에 대한 침해입니다. 단, 아직도 애초의 그 검열 대본은 누가 만들었는지 밝혀지지 않았으며 당시에 C 사무국장에 의해 폐기되었다고 합니다.
무엇보다도 손진책 연출가에게 묻고 싶습니다
2018년 초겨울, 대학로의 한 카페에서 손진책과 여러 연극인이 만났습니다. 그는 거기서 자신은 그런 일을 잘 모른다며 애매모호한 태도로 일관했습니다. 그리고 은연중에 그것을 전달한 사무국장 C에게 물어보라는 식으로 발뺌했습니다. 저는 혹시 진짜로 손진책이 아닌 다른 정부 관료가 C를 통해 전달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까지 순간 했습니다. 손 연출가의 그런 태도에 당시 함께 자리했던 남인우 연출가는 매우 힘들고 불안한 표정이었습니다.
하지만 최근 대법원까지 갔던 재판에서 그런 사실이 모두 있었다고 인정되었습니다. 이런 소식을 접한 나로서는 당시 카페에서 손진책이 애써 부정하던 태도가 떠올라 큰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지독한 배신감이 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당시 그의 태도는 그 자리에 있었던 동료연극인들을 완전히 기만한 것입니다. 흔한 표현으로 뒤통수를 맞아도 된통 맞은 기분입니다. 왜 그랬습니까? 짐작하건대 아마도 그것이 사실로 밝혀지면 벌어질 일들이 두려워서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때 사실대로 밝히고 사과했어야 합니다. 그랬다면 모두의 피해는 최소화되었을 것입니다.
지금 가장 의문이 드는 것은, 왜 그런 행위를 능동적으로 수행했느냐 하는 점입니다. 국립극단 예술감독이라는 자리보전 때문이었나요? 아니면 관료들의 압박이 두려워서였나요? 저는 그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혹 당시 관료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안 되는 다른 이유가 있었습니까? 혹 압력을 거부한다면 자신의 미래 즉, 예술원 회원이 되는 일 등에 장애가 생길까 그랬던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강하게 듭니다. 만일 이런 의혹이 사실이라면 이는 예술가에게 생명과도 같은 표현의 자유를 일신의 영달과 바꾸어 버린, 너무나 무거운 마음의 죄가 되는 것입니다. 부디 그렇지 않았다는 답을 원합니다.
손진책은 그런 일이 있고 난 후에도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연극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이미 저질러진 것도 죄지만, 그 이후에 그걸 부정하고 애매하게 둘러대며 은폐하려 한 비겁한 행위는 더 큰 죄입니다.
최근에 남인우 연출가가 웹진 ACTiO에 쓴, 2013년부터 현재까지의 고통스러운 소회를 밝힌 글을 읽어 보았습니다. 거기서 저는 또 하나의 놀랄만한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2019년 12월, 나는 손진책 선생으로부터 당시 <구름> 수정 과정의 모든 대본을 보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이때 왜 남 연출가에게 대본들을 보내달라고 했습니까? 이것은 본질적인 사안과는 다른 것입니다. 본질은 빨간 줄이 쳐진 대본을 남 연출가에게 전달한 행위입니다. 그런데 수정된 모든 연출대본을 달라고 한 것은 무슨 이유입니까? 혹 남 연출이 공연대본을 수정하면서, 자신이 준 검열대본의 내용이 반영되었는지를 확인하고자 했던 것은 아닙니까? 증거를 확인하려고 한 건 아닌지 매우 의심됩니다. 또 본인이 그걸 전달하도록 한 주체라는 사실이 밝혀진 오늘날, 손 연출가의 과거 이런 행위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비겁한 행위가 아닐 수 없습니다.
누가 사전검열 대본을 만들었습니까?
이 마지막 물음에 답할 사람은 손 연출가 한 사람뿐입니다. 다른 사안들은 모두 밝혀졌습니다. 오직 봉투에 담아서 남 연출가에게 전달된, 그 빨간 줄이 곳곳에 쳐진 대본을 애초에 누가 만들었느냐만 아직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손 연출은 지금까지 아무런 답을 내놓지 않고 있습니다. 연극인 대부분은 손 연출이 직접 빨간 줄을 그었다고 의심하고 있습니다. 본인이 아니라면 그렇게까지 침묵으로 일관할 필요가 있을까요? 이제는 누구인지 말해야 합니다. 그것만이 우리 모두의 문제를 해결하는 마지막 열쇠입니다.
박정희 현 예술감독에게도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남인우 연출가가 소회를 밝힌 글에서 박정희 현 예술감독이 했던 일들에 의문이 가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 글에 의하면 1차 재판 후 국립극단이 항소를 했는데 그 이유가 항소를 안 하면 배임이 될 수 있기 때문이라 하였습니다. 그러나 2차 항소심 후 3차 대법원에 갈 때는 상고를 포기하였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명백히 논리적으로 모순입니다. 3차 때 포기가 가능했다면, 2차 때도 가능했던 것 아닌가요? 그런 결정을 할 수밖에 없었던 다른 이유가 있는 겁니까? 당시의 전후 사정을 듣고 싶습니다. 외부로부터 무슨 지침이나 압박을 받은 건 아닌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부연을 하나 하겠습니다. 당시 박정희 예술감독은 이런 내용을 남 연출가에게 직접 전화하여 전달하였다고 합니다. 피고 기관의 수장이 원고 개인에게 전화하여 2차 항소를 할 수밖에 없다는 식으로 말했습니다. 그건 무슨 경우입니까? 국가를 상대로 힘겨운 재판을 하는 일개인에게 국가기관의 장이 직접 전화한 것은 아무리 선의가 있었더라도 당사자에게는 심한 압박이 되었을 것입니다. 2차 가해가 될 수 있습니다. 아니면 항소할 수밖에 없어 미안하다는 의사 표현이었던가요? 그건 말도 안 되는 비겁한 태도입니다. 미안하다면 먼저 항소를 반대하고, 반대가 통하지 않으면 직을 내려놓은 다음에 전화해서 미안하다고 하는 게 예술가다운 올바른 처사입니다. 아닙니까?
재판 종료 후 국립극단의 사과문을 읽어보았습니다
국립극단은 블랙리스트 사태에 대해 2018년에는 공식적으로 사과를 했고, 2023년에는 자체 사례집을 발간하기까지 한 바 있습니다. 그럼에도 재판에서 정부와 함께 피고가 된 국립극단의 처신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비루합니다. 자체 진상조사를 통해 검열이 있었다는 사실을 국립극단 스스로 뼈저리게 인정했으니 재판을 적극 거부하고 피해자를 보호해야 하지 않았나요? 박 감독은 항소 결정 때에 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서 나는 그렇게 못하겠다고 선언하지 못했습니까? 만일 그리했다면 연극인들은 당신을 매우 자랑스러워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부당함을 거부하지 못한 채 끌려가며 협조한 것은 그저 자리에 연연하는 비겁한 태도로밖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더욱이 재판이 끝난 다음의 사과문에서 다시 이전의 자체 진상조사를 들먹이며 사과 운운하는 것은 순서가 크게 잘못된 일입니다. 그건 진정한 사과가 아닙니다.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행위일 뿐입니다.
손진책, 박정희 두 동료 연출가님. 연극인은 자고로 그냥 자유인입니다. 그렇게 연극을 해 오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무엇이 그토록 겁이 난 겁니까? 원래 공직자거나 회사원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냥 훌훌 털어버리고 다시 자연인, 연극인으로 돌아오면 되는 거 아닌가요? 우리는 연극을 시작할 때부터 이미 세속적인 모든 걸 버리고 시작하지 않았습니까? 그 결정적인 순간에 연극인의 편에 서지 않고 도리어 게슈타포와 같은, 조선총독부와 같은, 군부독재의 하수인과 같은 이들의 압력에 굴복하였습니다. 두려웠거나 아니면 자리보전이 먼저라고 생각한 것인가요? 자신의 영혼과 연극 정신을 팔아넘긴 행태라고밖에 볼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너무나도 아쉽고 안타깝습니다.
표현의 자유를 수십 년 후퇴시킨 죄인들이 되고 싶습니까?
이 사건의 경과를 보면서 과거 제가 겪었던 연극 <매춘> 사건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것과 너무나도 흡사한 행태들이 수십 년이 지난 다음에 그대로 자행되었기 때문입니다. 당시에 공연윤리위원회의 사전검열, 고치지 않으면 공연이 불가하다는 으름장, 공연을 강행하자 경찰을 동원한 공연장 폐쇄 등이 이어졌습니다. 그런 일들을 겪으면서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당시 예술인들이 앞장 서서 공연법을 개정하였고, 마침내 공윤의 사전검열제도가 폐지되었습니다. 드디어 표현의 자유가 이루어졌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21세기 민주 정부하에서 다시금 비슷한 일이 벌어지는 걸 보고 그때의 충격이 생생히 살아났습니다. 더욱 놀란 것은, 당시엔 관에서 직접 검열을 수행했는데 이번 국립극단의 경우엔 선배 연극인이 동료이자 후배 연극인에게 그런 일을 자행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사실로 밝혀진 지금, 그 검열에 관여한 연극인들은 우리의 생명과도 같은 표현의 자유를 수십 년 전으로 되돌린 장본인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바로 그 배신감이 더해져 더 크게 분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남인우 연출가가 병원에 입원까지 하고 현재까지도 그런 상처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은 가해자들이 다름 아닌 믿었던 동료, 선배 연극인, 심지어 스승처럼 모시는 분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두 분은 진심으로 사과해야 합니다. 한 개인에게 가한 표현의 자유 박탈 시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은폐하려는 과정에서 그와 동료들에게 심한 상처를 주었던 일, 그리고 항소까지 하며 결과를 뒤집으려 했던 행태, 무엇보다도 그런 행위들로 인해 표현의 자유를 수십 년 전으로 돌려버린 일, 그 말도 안 되는 죄들을 지은 것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해야 합니다. 그리고 공적인 지위에서 당장 물러나야 합니다. 오직 그러한 처절한 반성을 통해서만이 표현의 자유를 억압했던 암울한 시대로 뒷걸음치게 만든 여러분의 죄가 그나마 용서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이 마지막 기회입니다.
채승훈
뒷방 가기 싫어 문고리 잡은 연출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