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연주

공연의 마지막 순서로, 오지연 작가는 희곡을 공개하는 대신 관객들에게 직접 만든 마들렌을 전하고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시를 읽는다. 마들렌을 주겠다고 약속한 작가는 반죽을 오븐에 넣으면서 관객들에게 불안한 질문을 남긴다. “그런데 안 준다면 어떨까요? 분명히 약속을 했는데 주지 않는다면.”

솔솔 풍기는 버터 냄새. 천천히 부풀어 오르는 마들렌. 작은 오븐 화면 사이로 마들렌이 구워지는 과정을 지켜보며 조마조마했다. 그럼에도 믿기로 했다. 어떤 경우에도 마들렌을 건넬 것이라고. 약속을 지킬 마음이 분명히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곧 그 판단에 오류가 있음을 발견한다. 마음이 분명하다고 느낀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마음이 있다는 것과 약속이 지켜지는 것은 같은 일일까. 우리는 무엇을 믿으며 약속을 기다리는 걸까.

공연이 던진 질문은 극장 밖으로도 이어진다. 공모를 통해 희곡 게재를 약속했던 <연극in>은 왜 끝내 약속을 지키지 않았을까. 혹은, 못했을까. 우리는 왜 <연극in>을 기다려야 할까. 언제까지 기다려야 할까. 애초에 서울연극센터는 무엇을, 어디까지 준비했을까.

‘-없이 쓰기, (아직) 없는 희곡을 위해

지금 당장 머릿속에서 희곡을 하나 떠올려 봅니다. 그것은 (아직) 없는 희곡입니다. 그 희곡이 하나의 물질이 되는 과정에는 다종다양한 존재가 다층적으로 협업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의 힘이 온전히 하나의 희곡이 된다고 생각하지만 글쎄요, 어떤 극작가는 저번 주에 쉬프트가 고장 나서 희곡쓰기를 미뤘답니다. (중략) 하나의 커다란 세계는 수많은 작은 존재들의 얽힘과 협업으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희곡도 그렇습니다. 몸을 가진 극작가는 몸으로 쓰고, 몸은 그 수많은 존재들과 닿습니다. 당연하고도 작은, 극-창-작과는 무관해 보이는 한 존재가 없는 세계에서 쓰여진 희곡들을 요청드려보고 싶습니다. 그 부재의 틈새에서 찾아오는 낯선 다른 손들을 받아들이며 도래할 새로운 희곡을 기다립니다.

-2024년 웹진 <연극in> 희곡 공개 모집 공고(2024.4.1.)

혜화동1번지 ‘2026 안전연극제: 면역력’에서 6명의 작가의 희곡이 <소거된 몸짓: 연극in 미게재 희곡 작가 페스티벌>1이라는 제목으로 무대화되었다. 2024년 당시 공모는 ‘희곡 쓰기를 구성하는 몸짓들 중 하나를 소거하기’를 제안했다. 아직 발견되지 않은 세계를 수동적으로 기다리는 대신, 하나의 몸짓을 소거하는 적극적인 수행을 통해 새로운 희곡의 가능성을 만들어보자는 제안이었다. 이에 응답한 71편 가운데 14편이 선정되었고, 이중 8편은 게재되었지만 6편의 희곡은 웹진 <연극in> 발행 중단으로 미게재 상태로 남았다. 이번 공연은 이 미게재 희곡들을 1년 10개월 만에 무대 위로 다시 불러낸 자리였다.

<오늘은>의 오승은 작가는 ‘지문 없이’ 썼다. 지문을 없애자 인물은 자신의 존재를 질문한다. 자신의 존재 이유와 어디로 가야 할지, 사라지는 것인지에 대해. 작가는 무대에서 희곡을 직접 타이핑하고, 모니터의 화면은 무대 벽면에 투사된다. 관객은 마치 텍스트가 그 순간에 생성되고 변형되는 과정을 직접 목격하는 듯한 시각적 경험을 하게 된다. 몸이 작아지고 커지는 앨리스처럼 활자의 크기로 드러나는 존재 가치에 대한 질문은 하나의 유희로 전환된다. <입꼬리 읽기>의 김유월 작가는 ‘뇌 몸짓 없이’ 썼다. 인터뷰 영상에 따르면 작가는 논리, 고민, 생각 등을 ‘뇌 몸짓’이라 칭하며, 정신활동을 몸짓의 하나로 바라본다.2 논리나 생각을 비워낸 희곡은 수행적 문장을 나열하고, 작가는 직접 희곡을 낭독하며 관객과 마주앉는다. 낭독하는 작가의 얼굴을 비추는 카메라의 영상은 벽면에 투사되고, 관객은 희곡의 문장을 작가와 함께 수행한다. 이 과정에서 희곡은 작가의 발화와 관객의 몸을 통해 새롭게 실현된다.

<2024년겨울>의 임세륜 작가는 ‘스페이스바 없이’ 썼다. 띄어쓰기 없이 이어지는 문장은 2024년 겨울을 상상했던 작가와 희곡이 품었던 시간을 현재의 무대로 불러온다. 희곡 속 인물이 다짐했던 미래는 현재의 자신과는 어긋나고, 발표되지 못한 희곡이 상상했던 미래는 어느새 과거가 되었다. 작가는 과거의 희곡을 회고하기보다는 앞으로 쓰게 될 미래의 희곡에 대한 질문을 관객과 나눈다.

채윤 작가의 <가면무도회 준비물 : 상상력>은 ‘배우 없이’, 극장 공연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는 희곡의 조건을 변용한다. 가면을 쓴 7인의 관객이 희곡의 일부를 역할로 나누어 읽었다. ‘작가’와 ‘등장인물’의 대화로 이루어진 희곡에서 채윤 작가는 ‘작가’를, 관객은 ‘등장인물’을 맡는다. 대사와 행동을 그 자리에서 선택하며 역할을 수행하는 관객은 낭독자의 위치를 넘어, 희곡이 공연으로 구현되는 과정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게 된다. <친목 없는 클라이밍 동호회>의 해서우 작가는 ‘시프트키 없이’ 썼다. 사적인 대화는 배제한 채 클라이밍을 이어가는 동호회를 배경으로 한 희곡이다. 작가와 관객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초크 주머니를 돌리며 대사를 이어 읽는다. 조심스럽게 전달되던 주머니는 때로 던져지며 희곡의 호흡을 바꾸고 참여자들의 몸의 리듬을 드러낸다. 어느새 극장은 ‘함께 있다’는 감각을 조용하지만 선명하게 전한다. 막바지에 이르면 초크 주머니는 작가에게 되돌아가고, 작가는 스스로 희곡의 끝을 고한다.

다섯 편의 희곡은 ‘-없이 쓰기’를 통해, 하나의 몸짓을 지우는 대신 또 다른 몸짓을 만들어냈다. 희곡쓰기를 몸짓으로 바라보는 과정은 등장인물뿐만 아니라 지문, 활자, 배우, 극장, 논리, 맥락 등 희곡을 구성하는 조건들을 하나의 물질적 요소로 다시 감각하게 한다. 작가들이 직접 구현한 무대는 희곡을 완결된 텍스트로 재현하기보다, 희곡이 쓰이고 읽히며 수행되는 과정을 드러내었다. 여기서 ‘소거’는 희곡이 존재하고 수행되는 방식을 확장하는 형식적 장치였다. 그러나 공연을 둘러싼 현실에서 ‘소거’라는 단어는 전혀 다른 무게를 갖게 된다.

길 위의 작가들

작가들은 무대에서 희곡을 직접 쓰고, 스스로 희곡의 인물이 되며, 동시에 무대의 가능성을 탐색했다. 관객은 그 과정의 한가운데 놓여 집필과 마감, 원고의 승인, 그리고 예기치 않은 사건이 개입한 시간까지 함께 통과한다. 그럼에도 이 공연이 흥미로운 실험에 그치지 않는 것은 그 안에 쉽게 해소되지 않는 결핍의 감각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희곡의 가능성을 새롭게 열어낸 무대는 극장 안에서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내지만, 동시에 무언가가 빠져 있다는 감각을 남긴다. 그리고 그 감각은 공연 바깥의 현실을 끊임없이 환기한다.

공연이 끝난 뒤에도 그 감각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공연은 ‘소거’라는 단어가 가진 여러 층위의 의미를 드러낸다. 희곡 공모에서 제안된 ‘소거’가 익숙한 형식을 비워 새로운 관계와 감각을 발생시키는 창작의 방법이었다면, 미게재와 웹진 <연극in> 발행 중단이라는 현실을 통과하며 ‘소거’는 사건으로 변모했다. 가능성을 열기 위한 ‘소거’가 현실에서는 창작의 기반을 지우는 ‘소거’와 마주한 것이다. 그 과정에서 드러난 것은 희곡들이 존재하고 읽히고 연결될 수 있었던 자리의 부재였다.

무대에 직접 등장한 작가들이 낯설지 않았던 이유는 서울연극센터 앞의 ‘웹진 <연극in> 폐간 반대에 연대하는 릴레이 1인 시위’를 통해 먼저 마주했던 얼굴들이었기 때문이다. 웹진 <연극in>의 발행 중단이 아니었다면, ‘희곡결산수다회’ 혹은 작가들과 희곡운영단, 관객들의 대화 자리에서 만났을 얼굴들이었다.

부풀어 오르는 마들렌, 그리고

<밤에는 낮을 기다리고 낮에는 밤을 기다려>의 오지연 작가는 ‘희곡을 공개하지 않겠다’는 선언으로 공연을 시작한다. 그리고 1인 시위를 했던 길에서 누군가에게 받았던 마들렌을 이번에는 자신이 직접 굽는다. 관객은 그것이 반드시 주어질 것이라는 기대와 동시에 “주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는 불안 사이에 놓인다. 오븐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까 봐, 약속이 유예된 작가들이 또 다른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될까 봐 조마조마했던 마음은 극장에 모인 몸들을 다시 바라보게 한다. 결국 관객의 손에 쥐어진 마들렌은 희곡의 부재를 메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 부재를 함께 확인하기 위해 우리가 다시 극장에 모였음을 환기하는 역할을 한다.

공연은 미게재된 희곡들을 무대 위로 불러냈다. 그러나 공연이 웹진을 대신할 수는 없을 것이다. 두 매체는 경쟁하거나 대체하는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창작을 다양한 방식으로 읽고, 기록하고, 축적하는 문화예술 생태계의 서로 다른 구성 부분들인 것이다. 이는 <연극in>의 ‘희곡 코너’가 갖는 성격과도 관련이 있다. 웹진에 게재된 희곡은 언제고 독자의 선택에 의해 다시 읽히며 새로운 의미를 얻는 텍스트가 된다. 이번 무대는 희곡의 생명력이 공연의 현장성에 머물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드러내었고, 그렇기에 <연극in>의 부재는 더욱 선명해진다.

결국 소거된 것은 <연극in>이 아니라 매체가 수행해 온 공적 역할이었다. 이는 창작의 목소리가 기록되고 연결되는 구조의 약화로 이어진다. 이러한 기록과 담론의 부재는 문화예술에 대한 논의가 단일한 의제로 수렴되는 구조를 낳고, 다양한 현장이 기록되지 못하는 상황을 가속화한다. 그 자리를 대신한 것은 절차의 부재와 기준 없는 행정이었다. 기관 지원작을 홍보하는 매체로의 기능 강화, 서울시 계약 구조에 따른 압박, 담론 대신 대중성 중심의 정보지로의 전환 등, 발행 중단의 이유로 제시된 설명은 1년 동안 계속해서 바뀌었다. 서울문화재단은 2025년 10월 17일 <연극in> 재발행 추진 계획을 공지했으나, 이후 현재까지 구체적인 추진 경과나 후속 공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끝내 소거되지 않는 것

<소거된 몸짓: 연극in 미게재 희곡 작가 페스티벌>은 <연극in>의 공백을 메우지 않는다. 오히려 그 공백을 끝까지 드러낸다. 미게재 사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고, 희곡들이 다시 읽히고 토론될 수 있는 공적인 자리는 여전히 복원되지 않았다. 결국 공연이 보여준 것은 무엇이 사라지고 무엇이 끝내 남는가에 대한 질문이다.

공연은 이러한 질문에 성과의 논리로 답하지 않는다. 기관의 게으름에 성실하게 응답하는 대신, 질문을 ‘기다리고 견디는 시간은 무엇을 남기는가’로 옮긴다. 작가들은 극장을 열어준 동료들과 관객들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길에서 받은 마들렌을 다시 만들어 관객에게 전달한다. 그들은 희곡에 대한 구상에서부터 선정 발표, 그리고 웹진 중단 이후 미게재 원고에 대한 원고료를 받을지 말지를 적극적으로 선택하기까지의 지난한 시간을 지나면서, 쓸 때는 예측하지 못했던 희곡의 문장들을 다시 들여다보고 새롭게 읽어내고 있었다.

작가들의 적극적인 실천으로도 끝내 소거되지 못한 것은 그들이 견뎌내고 있는 시간일 것이다. 우리는 그 시간을 정확히 알지 못한다. 부풀어 오르다 이내 푹 꺼지고, 때로는 단단하게 굳는 마들렌을 수없이 지켜봤을 시간만이 그 기다림이 얼마나 길고 반복되었는지를 말없이 증명한다.

이연주

연극 쓰고 연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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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참여 작가/출연 김유월·오승은·오지연·임세륜·채윤· 해서우, 기획 김은정·이성직, 인터뷰 촬영 송평강·허선혜. 연극실험실 혜화동1번지, 2026.4.14.~4.15.

2. 김유월 인터뷰 영상 (https://www.facebook.com/reel/1217313613534681?locale=ko_KR) 참조.

참여 작가들의 인터뷰 영상은 아래와 같이 찾아볼 수 있다.

오승은 https://www.facebook.com/reel/923188714042673.

오지연 https://www.facebook.com/reel/2542770609486397?locale=ko_KR.

임세륜 https://www.facebook.com/reel/1997169580831619.

채윤 https://www.facebook.com/100063756091710/videos/2006758739919398?__so__=permalink.

해서우 https://www.facebook.com/100063756091710/videos/1443351987289344?__so__=perma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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