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지
이태원역에서 앤티크 가구 거리를 따라 걷다가 안쪽 언덕으로 접어들면, 풍경이 사뭇 달라지면서 구옥들이 줄지은 거리 위로 버려진 가구나 폐 박스 같은 쓰레기들이 엉망으로 놓인 걸 보게 된다. 번화하고 소란한 역 주변과 다르게 퍽 잠잠한 길가를 간간이 오가는 주민들 뒤로는 불 꺼진 건물과 진입 금지 표식들, 모스크에서 멀지 않은 데 설치된 공사용 슬레이트 가벽들. 언젠가부터 ‘한남뉴타운 제3구역’이라는 이름으로 더 자주 회자되는 보광동은 2023년 관리처분계획이 인가된 후로 재개발을 위한 본격적인 철거의 막바지에 이르렀다.
그중에서도 폴리텍대학에서 가까운 한 골목 안쪽에 자리한 보광떡방앗간은 50년 넘도록 떡을 쪄온 조정비 사장님의 오랜 일터이자, 인근의 여느 곳처럼 가까운 미래에 철거될 나이 든 반지하 떡집이며, 2025년 11월 떡방앗간에서의 레이브 파티1를 표방하며 열렸던 <떡사랑사랑같이자유기념박수>의 공연장이기도 하다. 2003년 한남뉴타운 지정 이후 20년 이상 계속된 주민 퇴거를 거의 마치고 “서울 최대 규모의 재개발”민경미, 「철거 시작된 한남 3구역, 재개발 ‘끝판왕’이라 불리는 이유」, 『금경 르포』, 2025.5.28.을 위한 착공에 돌입할 시기를 앞둔 2026년 4월, 떡집을 기억하려는 이들이, 아니면 그런 마음에 대해서는 별 관심 없을지도 모를 이들이 다시 모여 춤을 췄다. 이러나저러나, 마지막이 될 춤을.
기념할 수 있는 만큼 기념하기
작년 가을 <떡사랑사랑같이자유기념박수>를 보러 처음으로 떡집에 들렀을 때 느낀 마음을 먼저 논해 보고 싶다. 범상한 주택가 한쪽으로는 철거를 위해 쳐둔 가벽들이 죽 늘어서 있었고, 방앗간은 그 길 끄트머리에 있는 벽돌색 건물의 낮은 지층에 있었다. 삐걱이는 철제 문, 그 안에 놓인 커다란 기계들, 층층이 쌓인 플라스틱 채반들, 스티로폼 판 위에 고이 포장된 가래떡, 면포에 싸인 찹쌀가루, 벽에 걸린 괘종시계, 민트색의 대성 스팀 보일러, 한국떡류식품가공협회에서 받아온 달력, 가게 안쪽에 놓인 DJ 부스, 천장과 벽을 따라 진동하는 소리에 맞춰 고개를 흔드는 사람들…
테크노 음악이 춤추는 사람들로 비좁은 가게 안을 메우는 동안 사장님은 당신에게 무척 익숙한 몸짓으로 쌀가루를 내고, 가루를 판에 담아 기계에 집어넣고, 더운 김을 창문 밖으로 빼내고, 두 가지 맛의 설기를 균등하게 잘라서 비닐에 담는다. 환호하며 뛰는 관객들로부터, 그리고 떡 찌는 기계로부터 새 나온 열기 때문에 더위를 달래려고 밖으로 나와 보면 작게 난 창으로 가게 안쪽이 들여다보이는데, 곧 있으면 무너질 집들과 들뜬 사람들 사이에서 별로 기쁘지도 슬프지도 않은 얼굴로 일하는 사장님이 눈에 들었다. 그러다 음악이 클라이맥스 같은 것에 이를 때 마침 떡이 나온다. 갓 찐 떡이라는 것은 참 맛있는 것이었고, 그걸 떼먹으며 귀가하는 마음은 좀 희한한 심경이었다.
나는 한 번도 좀처럼 마음을 나누거나 긴밀히 연결되어 본 적 없던 지역 공동체의 한구석으로 우연히 흘러들어서 신나게 춤이나 추고 무탈하게 집으로 돌아가는 일이 어쩐지 겸연쩍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떡집과 떡집 근처를 터라고 믿고 살아온 이들 중 누군가가 바람과는 상관없이 보광동을 떠나야만 하고, 철거로 누구보다도 막대한 영향을 받을 것이 명백함에도 재개발이라는 이 거대하고 오래된 기획에서 자기 과거를, 현재를, 혹은 미래를 이야기할 권리를 할당받지 못하리라고 생각하면, 이처럼 곧 없어질 남의 터에서 춤을 춰도 좋을지 염려스러웠다. 특히나 한국전쟁 직후부터 철거 이전까지 보광동이 그간 흡수해 왔던 계급적, 인종적, 신체적, 성적 타자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모르는 채로 말할 수 있는 ‘사랑’이나 ‘자유’, ‘기념’과 ‘박수’가 어떤 모습의 ‘같이’로 이어질는지 의심스러웠다.
한편으로는 춤을 추면서, 사장님에게 떡을 얻어먹으면서 나눈 당장의 두 시간을 기념하며 같이 박수 칠 수 있던 것도 사실이다. 테크노 클럽에서의 저항적 실천들에 주목한 매켄지 워크는 천국이 사유화되어 버리는 바람에 구원으로 가는 문이 잠겼을 때, 주변화된 집단으로서 ‘우리’에게 도통 지속적인 것이 주어지지가 않을 때, 쉽게 말해서 미래라는 게 없을 때, 그럴 때 천국의 뒤편으로 돌아가 담을 넘을 수 있게 허락하는 것이 레이빙일 수 있다매켄지 워크, 『레이빙』, 김보영 옮김, 접촉면, 2025, 111쪽고 말한다. 어쩌면 떡집 테크노라는 희한한 세계 역시도 부동산-주체들의 내일을 대신해 오늘을 유예해야 했던 보광동 선주민들의 곁으로 무작정 끼어들어서, 소란과 야단을 떨면서 담을 넘어 보는 일이 될 수 있을까. 그렇다고 고작 며칠 밤 모여든 무작위의 관객으로서 ‘우리’가 테크노를 통한 대항적 구원을 논하며 자본화된 미래를 거뜬히 침탈하거나 한남뉴타운의 신화를 둘러싼 공고한 신자유주의적 야심들을 무찌를 수는 없을 테지만, 즐거운 낯으로 보광동의 한 구석과 한시적으로 공동체가 되어 볼 수는 있다. 바닥과 천장을 울리는 비트를 타고 말 그대로 진동했던 시간, 떡 나오는 일에 환호하는 기분을 나눴음은 아무래도 의심 없이 기념할 수 있다.
사라질 동네에서의 테크노 파티가 무언가를 대변하거나 표상할 수 있다면, 그건 “일시적인 떡 뭉텅이”2가 되어 보길 점치려는 ‘우리’의 어설픈 욕심이자 열망일 것이다. <떡사랑사랑같이자유기념박수>는 주민들의 정서적 안녕을 묻거나 역사적 행적을 기념하려 들기보다는, 춤을 추고 떡을 먹는 동안 가능한 만큼만 지역과 지금 함께해보는 일, 그리고 사장님이 내준 시공간만큼만 지역의 현재와 대화해 보는 일을 통해 커뮤니티 연극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커뮤니티 연극의 그림자를 상연한다. 그러니 그날 밤 춘 춤은 보광동과의 무척 불완전하고, 좋게 말하자면 느슨한 연결을, 그런데 사실 느슨한 만큼 조금 비겁하고, 하지만 그런 만큼 진솔하고, 그래서 어쩌면 덜 가식적인 연결의 모양을 궁리해 보는 실천이었을는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우리는 ‘우리’일 것입니다
그리고 올해 4월 <라스트 댄스 @보광떡방앗간>3이라는 이름의 레이브 파티가 철거 직전의 떡집에서, 그리고 연극실험실 혜화동1번지에서 다시 한번 열렸다. 가게를 이전하지 않고 그간 사용했던 기계들을 모두 처분하기로 하셨다는 사장님의 소식을 듣고, 사실 떡집과는 별 연고도 없을 혜화동의 지하 소극장을 찾았다. 어두운 극장 안으로 진입하는 길목에 두 편의 글이 놓여 있었는데, 그중 하나에는 작년 보광동 공연에 대한 일간지 리뷰가 일부 수록돼 있었다. 장소특정적 커뮤니티 예술이라면 마땅히 담보해야 할 “공동체적 인식”과 보광동이라는 지역의 역사성에 대한 “헌사”가 부재하다는 평과 함께, 흥미롭게도 기사는 떡집에서의 춤을 “20·30대” 창작진과 관객이 범한 일종의 착취적 퍼포먼스로 해석하고 있었다.4
리뷰를 쓴 필자는 어쩌면 공연이 이태원을 견인한 냉전과 가난의 역사가 떡집 사장님의 일생과 만나는 지점을 탁월하게 포착하거나, 레이빙을 경유하는 대안적 문화 공동체가 젠트리피케이션과 인종주의에 도전하는 순간을 만들어 내길 내심 기대했을까. 그런 공연이 있었더라면 물론 근사할 것이다. 하지만 공연을 만든 이들은 그보다 그간 커뮤니티 예술을 시도하는 동안 “너무 쉽게 ‘공동체’를 선언”하면서 느꼈던 피로함, 작업 이후 필연적으로 찾아오는 작별의 난처함을 응시하고자 했다고 기사에 답한다.5 커뮤니티 예술을 할수록 불거지는 것은 커뮤니티 되기의 불가능성이었기에, 보광동과 조정비 사장님의 소상한 이야기를 공연적 텍스트 속으로 포괄하지 않는 형식을 고안하면서 ‘공동체적 인식’으로부터 거리를 두고자 했다는 것이었다. 창작진이 기사에서 지적한 커뮤니티의 부재를 진실로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커뮤니티 예술을 창작하는 기존의 방법론에 대한 “실천적 딴지”였음을 밝히기 위해 극장 입구에 자신들의 비평적 대답을 공연의 일부로 설치해 두었다는 사실은 철거된 떡집을 생각하며 별안간 혜화동1번지에 모인 우리, 다시 말해 공동체성 없이 모인 이 공동체의 모습을 돌이켜보게 한다.
재미있는 것은 커뮤니티 예술에 딴지를 걸어 보려던 실천에도 불구하고, 창작자들이 결국은 그 비평이 요청했던 ‘공동체적 인식’과 맞닥뜨리게 되었다는 점이다. 철거를 앞둔 떡집에서의 4월 11일 공연을 마치고 쓰인 것처럼 보이는 글에서 창작진은 그동안 조정비 사장님과 나눴던 어설프고 부분적인 친밀감만으로 보광동과 공동체를 형성하고 말았음을 회고하고 있었다. 이들은 작년 가을과 다르게 한층 더 가속화된 철거의 경관을 눈앞에서 목격하면서, “작업복을 입은 인부들”과 “보광동을 부수는 포크레인”을 지켜보면서 압도하는 ‘서운함’을 감지했다고 쓴다. 그리고 동네를 떠나야 할 사장님과 사장님의 가족들에게서 비슷한 모양의 서운함을 확인했다고도 기록하고 있다.
<라스트 댄스>에 참여한 이들 사이를 감도는 서운함이라는 마음은 오로지 재개발이라는 거대한 자본주의적 각본을 중지할 수 없으리라는 무력감 같은 것만은 아닐 것 같다. 오히려 애초부터 모쪼록 우회하려고 했던, 어떤 의미에서는 기피하거나 멀찍이 벗어나 보려고도 했던, 그러므로 부재하다고 진단되었던 ‘공동체적 인식’을 나누었다는 명백한 증상이 아닐까. 서운함이라는 열병은 이들 커뮤니티가 커뮤니티 되지 않기에 실패했다는 정서적인 증거이자, 커뮤니티와의 멀끔한 거리 두기에 얼마간 실패하면서 맞이한 면역 체계의 작동처럼도 보인다. 혜화동1번지를 메운 땀 냄새 같은 것을 맡으면서, 어쩌면 공동체가 뜻 없이 유행했던 소문이나 오래된 전설인 것만은 아니고, 불가능하기보다 불가피한 것일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러자 객석 의자 여기저기에 놓인 보광떡방앗간의 오래된 간판과 철거의 잔해들이 그 실패를 입증하는 자조적인 농담처럼 느껴진다. 이제 관객들은 떡집이 아직 떡집이었을 때처럼 사장님이 갓 쪄낸 강화섬쌀 백설기를 기다리지 않고, 벌써 다 처분되었을 기계들이 쪄서 과거로부터 보내온 떡들을 극장에 비치된 전자레인지에 돌려 가면서 춤을 춰야 한다. 조정비 사장님과의 대화를 담은 영상을 보니, 그나마도 보광떡방앗간의 마지막 주문일 것을 약속하고 맞춘 떡이었는데 사장님이 단체 주문을 몇 개 더 받는 바람에 마지막도 아니게 된 눈치였다. 마지막도 아닌 마지막 쑥설기를 해동해서 떼어먹으며, 쿵쿵대는 소극장의 벽과 세워놓은 덧마루를 붙잡고 춤을 춰 보았다. 그러고 보니 이런 실패담을 상연하고, 엇나감을 애도하기에 극장은 적절한 공간처럼 보였다. 지극히 조건적인 형태의 만남으로도 우리가 연결된다는 것은 연극을 보면서 많이 배웠으니까. 그 사실이 싫거나 무서울 적에도 우리는 아마도 우리일 것이다.
김현지
연극을 만들면서 기록도 합니다. 그런데 그보다는 자주 관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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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이브(rave)란 본래 열변을 토하며 무언가를 상찬하는 일이나 고양된 감정으로 소리치는 일을 의미하는데, 1990년대부터는 클럽이나 빈 건물 같은 공간에 모인 사람들이 빠른 비트의 전자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파티를 가리키는 용어가 되었다. 레이브 파티에서 DJ들은 테크노와 같은 일렉트로니카 음악을 주로 재생하지만, 레이빙 자체가 특정한 음악 장르를 지칭하지는 않는다.
- <떡사랑사랑같이자유기념박수>에서는 공연 제목을 이루는 단어들을 제목으로 삼아 쓰인 몇 가지 짤막한 글들을 웹으로 공개했다. 그중 이서연의 글 「같이」에서 말을 빌려왔다.
- 떡집 사장님 조정비, 디제이 낭낭·라리·점핑개구리·코뿔소·ianbahc, 콘셉트 이호연, 프로듀서 이성직, 테크노드라마투르기 박이현, 웹 조각글 이서연, 웹 제작 최정화, 음향 안세운, 영상 정근호. 보광떡방앗간 및 연극실험실 혜화동1번지, 2026.4.11, 4.17.
- 김건표, 「이태원 보광떡방앗간, 사라져가는 것에 대한 ‘커뮤니티 축제’… 다 함께 테크노로 “떡사랑사랑같이자유기념박수”」, 『스마트경제』, 2025.11.27.
- <라스트 댄스> 공연장에 비치된 이성직의 글 「커뮤니티 없는 커뮤니티」와 「서운해」에서 말을 빌려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