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경모
아말 … 맞습니다, 그래도 뇌는 기계입니다, 생물학적인 기계, 생각도 하고요. 살아있는 세포로 구성되었지만, 전자회로와 게이트, 서류 집게나 고무줄 뭐로 만들든 그런 기계랑 다를 게 없습니다, 계산만 할 수 있다면요.
리오 컴퓨터는 계산을 하죠. 뇌는 생각을 하고. 기계가 생각을 하나요?
아말 체스를 두는데, 어느 쪽이 컴퓨터인지 분간을 못한다면, 그럼 생각하는 거겠죠.
리오 그건 수많은 이진법 연산의 결과이지 않나요, 프로그래밍 규칙에 따른.
아말 뇌도 그렇죠.
리오 그럼 뇌가 하는 걸 컴퓨터도 할 수 있나요?
아말 농담이시죠? 뇌는 따라가지도 못하죠!
리오 (힐러리에게) 끼어들겠어요?
힐러리 괜찮습니다.
리오 아니? 왜요?
힐러리 깊이가 없어서요. 그게 생각이라면요. 그냥 속도를 올린 기계죠. 메모리를 가진 양방향 스위치. 체스를 왜 못 두겠어요? 그런데 제 차례가 되었을 때, 컴퓨터가 생각을 할까요, 아니면 그냥 토스터기처럼 앉아 있을까요? 토스터기겠죠.
리오 그럼, 깊이가 있다면 어떤 걸까요?
힐러리 컴퓨터가 지기를 싫어하는 거죠.
(리오가 잠시 멈춰 힐러리를 바라본다.)
아말 컴퓨터가 인간 뇌를 뉴런 하나하나까지 시뮬레이션하면, 지기를 싫어할 겁니다.
리오 (힐러리에게) 동의하나요?
힐러리 아뇨.
리오 아말이 말한 기계는 의식이 없어서?
힐러리 아뇨, 물론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요? 톱니바퀴가 돌아가는 걸 본다고 그걸 알 수는 없습니다. 뇌도 마찬가지죠. 뇌가 작동하는 걸 본다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죠.
아말 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려드릴게요. 뇌가 의식을 만든다는 증거는 차고 넘칩니다.
힐러리 뇌 활동과 의식이 연관되어 있다는 증거는 넘치죠. 의식을 감지하죠. 그런데 뇌가 어떻게 의식하는지는 그 누구도 증명한 바가 없어요.
아말 궤변이에요!
리오 (힐러리에게) 그럼, 의식은 어떻게 생겨나나요?
힐러리 저도 모릅니다, 아니 아무도 모르죠. 저희가 여기 모인 이유라 생각되는데요. 그 난제(the hard problem)를 깨기 위해서.
리오 (짧은 사이) 그렇지. 그래서 우리가 여기 있겠죠. (중략)
– 톰 스토파드, <난제 The Hard Problem> 중에서
21세기 들어 스마트폰과 태블릿, 클라우드 시스템은 생활양식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통신과 정보 접근, 기록과 공유의 전 과정을 대체하며 시간을 단축하고 공간을 좁히고 물량이라는 한계도 넘어서게 했다. 그로 인해 인간의 행동양식도 많이 바뀌었다. 그런데 최근, 이런 변화보다 더 크게 느껴지는 게 인공지능이다.
제한되었던 정보의 폐쇄성이 깨진다. 담장 안에 있던 고급정보라는 말이 무색해진다. 그 정보에 기댄 전문성도 추락한다. 정보지식과 함께 전문성으로 인정받던 절차지식의 위계도 흔든다. 매뉴얼이 없어 난감한 게 아니라 너무 많아 선택이 힘들 정도다. 인간 고유영역으로 간주했던 ‘맥락’과 ‘추론’도 인공지능이 대체한다. 자료변환은 프롬프트 몇 줄로 해결되고 실무보조는 에이전트 AI가 대신한다. 급기야 인공지능을 탑재한 휴머노이드까지 급증하며, 회사 체계의 업무와 조직 또한 재편을 예고한다.
반응은 두 가지이다. 한쪽은 편이함와 수월성에 경탄하며 적극적인 활용을 제안한다. 언어 경계를 넘어선 방대한 빅데이터의 활용, 텍스트 기반을 넘은 각종 매개 자료로의 전환, 숱한 이미지 생성과 변형, 영상변환의 수월성까지, 그 결과는 텍스트부터 영상이나 심지어 팟캐스트, ppt까지 다양한 결과를 산출한다. ChatGPT, Gemini, Perplexity, Claude 등 애플리케이션은 사용자 취향에 따라 끝도 없이 확장된다. 다른 한편에서는 사고 과정의 외주화, 사생활과 저작권의 침해, 에너지 과소비와 디지털 쓰레기에 대한 우려, 전문노동과 직업의 소멸 등 인공지능이 가져오는 인간활동에 대한 위협을 경계한다. 물론 유행에 따른 거품이 사라지면 일정한 자정작용이 있으리라 예상하지만, 그 가속이 너무 빠르기는 하다.
강단의 혼돈도 크다. 이미 학습과정에서 AI는 동반자가 되었고, 리포트와 논문은 직간접적인 AI의 결과물이 되어 그 구분과 변별이 무의미해졌다. 논문 쓰기 편해졌다(?)는 말은 이런 현상을 대변한다. 온라인시험에서 AI 사용을 걱정했던 게 지난해 말이었지만, 이젠 AI를 활용한 수업설계를 대학마다 제안한다. 학습자에게 AI와 협력하여 지적 유기체를 형성하되, 시험은 독립적으로 수행하라고 한다(!). 인간의 고유 활동이라 여겼던 두뇌작용이 인공지능에 의해 대체되니, 학습과 교육에 대한 정의가 새롭게 요구된다. 이미 벼랑 끝에 매달려있던, 정보기억과 문제풀이 및 그 평가에 집중된 교육 패러다임은 추락한다. 교육자는 정보오류를 보정하는 정도로 역할이 축소되고, 교육자의 지식보다 더 넓은 지평을 인공지능이 안내하기도 한다.
직업 변화의 예고도 대학교육을 혼란하게 만든다.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직업 양산이 어느새 대학의 목적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미 국제포럼의 통역은 AI로 대체되고 있고, 디자인의 필수영역이던 애플리케이션 활용기술조차 그 수월성을 AI에 넘겨주고 있다. AI를 활용한 법률상담, 세무상담, 심지어 주식투자와 개인상담까지 직업 전 영역에 영향을 미친다. 기계의 출현에도 위협받지 않았던 지식노동이 흔들리는 것이다. 당연히 지식전문성과 기술전문성의 위협은 급격한 직업 재편까지 예고한다. 물론 기계가 대체하지 못하는 육체노동에 더 관심이 쏠리기도 하지만 인공지능 휴머노이드는 이마저도 흔든다.
인공지능의 인간 대체 현상은 재화의 교환으로 간주했던 인간노동에 대한 재정의까지 요구한다. 생산에 쓰일 노동의 필요성이 감소한다면, 경제활동의 기반이자 정체성의 상징으로 여겨지던 노동은 이제 무엇으로 다시 정의할까? 노동이 소득을 보장해 주지 못한다면,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생의 연장은 무엇으로 보장될까? 플랫폼 노동으로 인해 고용의 경계마저 지워지는 상황이라면 노동과 소득은 분리되는 것일까? 더불어 과거의 의식을 반영한 빅데이터가 과거의 편견과 불평등, 인간집단의 과오를 답습하고 재생산한다면, 사회의 긍정적인 발전은 어떻게 기대할 수 있을까? 희곡 <난제 (The Hard Problem)>에서 아말의 주장처럼, 모든 것을 기계가 대체한다면, 인간의 고유성은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인간 고유성을 주장하는 것이 인간계를 중심으로 한 사고라면, 물질계의 지배자가 아니라 그 결과물인 인간은 이 거대한 물질계의 작은 존재로서 어떠한 역할을 기대할 수 있을까?
인공지능의 목적이 수월성이라면, 그 가속은 수월성 만능주의에 기댄 우리 사회의 패러다임과 연결되어 있다. 인간의 행동도 많이 바뀌고 있다. 물음과 답 사이 시차로 생겨났던 사유의 시간이 사라진다. 즉각반응의 기대에 따라 기다림이라는 인간 고유의 행동패턴도 무시된다. 머뭇거림은 참지 못하는 일이 된다. 나를 깊이 내어주며 온전히 상대를 들여다보는 일도 간과된다. 당연히 서로 온전히 받아들이고 수용하는 관계도 실종된다. 자신을 깨어 타자를 수용하는 성장의 기본방식도 쉽게 폐기된다. 이런 상황들을 찬찬히 보노라면, 사라지고 무시되고 간과되고 실종 폐기되는 그 무엇에 ‘인간다움’이 있지는 않을지, 효율성이 지배하고 가속되는 상황에서 그 어떤 쓸데없음이 ‘인간다움’을 정의하지는 않는지 떠올려 본다.
어쩌면 이 희곡으로 인공지능이 가져올 사회변화까지 확대해서 생각하는 일이 비약일 수는 있다. 하지만 희곡으로 이런 상상을 하는 것은, 시대변화에 따른 연극의 소임을 떠올리기 때문인 듯하다. 효율과 능률이 지배하는 사회 분위기, 연극마저 상품성을 부각하는 시장중심 패러다임에서, 인간다움을 이야기하고픈 갈망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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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 출처 : Tom Stoppard, 『The Hard Problem』 (Faber & Faber, 2015)
**) 인용문의 한글 번역은 글쓴이가 하였다.
안경모
연출가, 인식과 행동 사이의 모순으로 늘 갈팡질팡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