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인우
2014년, 나는 한 달 사이 세 차례나 응급실로 실려 갔다. 혈압이 220까지 치솟아 떨어지지 않았고, 결국 뇌출혈 위험으로 입원했다. 주치의는 갑작스러운 혈압 상승의 원인으로 ‘부신암’ 가능성을 90%라 진단했다. 정밀 검사를 받는 열흘간, 친구들은 조를 짜서 움직이지 못하는 나의 배설물까지 받아내야 했다. 다행히 암은 아니었다. 원인은 ‘극심한 스트레스’! 의사는 모든 일을 중단하고 요양할 것을 권했다. 나는 직감했다. 2013년 9월, 국립극단의 <구름>공연으로 시작된 일련의 사건들이 내 몸을 갉아 먹고 있었다는 것을…
정권이 바뀌고 블랙리스트 조사가 시작되자 잊으려 했던 고통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2017년 11월 20일, ‘블랙리스트 진상조사 및 제도개선위원회’(이후 ‘블랙리스트 조사위’) 조사를 받으며 나는 2013년 당시 문체부와 청와대 사이에 오고 간 공문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당시엔 ‘미학적 조언’이라 여겼던 압박들이 사실은 정부 주도의 조직적인 행위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런 것은 좀 빼면 어때? 아 이건 좀… 참… 나… 미안해요.”
그때 그 장면이 벼락처럼 소환되었다. <구름> 무대 리허설 날, 당시 사무국장 최OO 연출가가 봉투 하나를 들고 찾아왔다. 그 안에는 자를 대고 정갈하게 빨간 줄을 그어놓은 대본이 들어 있었다. 그는 매우 곤란하고 민망해하면서, 무려 두 시간 동안 그 대본을 한 장 한 장 넘겼다. “이런 것은 좀 빼면 어때? 아 이건 좀… 참… 나… 미안해요.”
그 기묘하고도 폭력적인 정중함. 최OO 사무국장은 빨간 밑줄 친 대본을 받겠냐고 했지만 나는 거절했다. 그는 그 대본을 국립극단 마당의 쓰레기통에 버렸다고 훗날 말했다. 나는 블랙리스트 조사위에서 그날의 ‘빨간 밑줄 친 대본’과 당시 상황을 진술했다. 그 증언이 이토록 길고 험난한 재판으로 이어질 줄은 꿈에도 몰랐다.
2018년 11월, 대학로의 한 카페에서 당시 국립극단 예술감독이었던 이성열 감독의 매개로 동료 연극인들과 손진책 전 예술감독을 만나게 되었다. 당시 손진책 선생은 본인 역시 블랙리스트 문제로 고통받고 있다면서도 자신이 국립극단을 떠난 이후에는 그쪽을 돌아보고 싶지도 않았다고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여전히 그를 향한 깊은 존경과 애정을 담아 말했다. 국립극단이 다시는 정치에 휘둘리지 않도록, 진실을 밝히는 데 최선을 다하겠노라고… 그것이 스승을 지키는 길이라 믿었다. 손진책 선생은 그날 연극인들의 끈질긴 사과 요구에도 불구하고 신중히 생각해 보겠다며 자리를 마무리했다.
2019년 12월, 나는 손진책 선생으로부터 당시 <구름> 수정 과정의 모든 대본을 보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러나 빨간 줄이 그어진 대본은 당시 사무국장이었던 최OO 연출가에 의해 버려졌기에 나는 다음과 같이 이메일을 보냈다.
문제는 ‘빨간 줄이 그어진 대본’이 존재했으며, 최OO 선생님을 통해 당시 연출가였던 저에게 내용을 전달했다는 것입니다. 즉, 명백하게 국립극단이 관료들에 의해 압박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문체부 관료들은 모른다 하고, 전달자는 입을 닫으니 이 자체가 없었던 일이 되고 있습니다. 제가 당시 일을 생각하기도 싫고 상황이 곤란해져도 사실을 정리하는 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제 생각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정진하겠습니다.
간절했던 나의 이메일엔 아주 짧고 무의미한 답변만 돌아왔다.
2020년 4월 28일, 최OO 연출가가 연습실로 나를 찾아왔다. 그는 ‘빨간 밑줄 친 대본’의 존재를 비로소 시인하며, 언제든 나를 돕겠다고 했다. 그날 나는 펑펑 울었다. 내 기억이 하나도 틀리지 않았다는 안도감과 동시에 왜 고통과 수치는 가해자가 아닌 우리의 몫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서러움 때문이었다.
피고 대한민국과 국립극단의 항소, 검열 부정
모친상으로 받은 부의금을 들고 변호사를 찾아갔다. 그렇게 4년의 긴 싸움이 시작되었다.
재판의 기록
2022. 10. 05. 소장 접수 및 사건번호 통지
2023. 07. 14. 최종 조정 불성립 (대한민국 정부는 합의 대신 재판 선택, 국립극단은 입장 없음)
2024. 05. 29. 1심 재판: 대한민국은 검열 부정, 국립극단은 검열 인정
2024. 10. 16. 1심 판결: 원고 일부 승소 (재판부 검열 사실관계 인정)
2024. 11. 04. 국립극단 항소장 제출
2025. 04. 09. 2심 서울고등법원: 항소 기각 (원고 승소)
2025. 04. 25. 국립극단 3심 상고장 제출
2025. 05. 16. 국립극단 상고 취하서 제출
2026. 03. 12. 3심 대법원: 최종 상고 기각, 원고 최종 승소
재판 과정은 비루했다. 1심에서부터 대한민국은 검열을 부정했지만 다행히 국립극단은 검열 사실을 인정했다. 1심 재판부는 결국 검열의 사실성에 대해서 자세하게 판결문에 적시했다. 그러나 피고 대한민국과 국립극단은 항소를 결정했고, 국립극단의 박정희 현 예술감독은 나에게 전화를 걸어 ‘항소하지 않으면 배임과 횡령이 된다’는 괴이한 논리를 펼쳤다. 나는 2심 재판정에서 판사가 “첫째, 검열 사실이 없다. 둘째, 있더라도 공소시효가 만료되었다. 셋째, 공소시효가 만료되지 않았더라도 배상액이 크다. 이런 주장이죠?” 라며 피고측의 항소 요지를 말하는 것을 직접 들었다. 스스로 블랙리스트 피해자를 자처하던 박정희 예술감독이 권력의 자리에 앉자마자 검열을 부정하며 가해자의 논리를 앞세우는 모습에 나는 다시 한번 절망했다. 그때 느꼈던 배신감과 패소 가능성에 대한 두려움, 패소 그 자체보다도 패소함으로써 검열 자체가 부정당할까봐 몸서리쳤던 기억이 지금도 내 몸의 모든 세포에 각인되어 있다.
2024년 말, 한국 사회에 계엄령이 선포되는 등 권력 남용이 극에 달하던 시기, 나의 불안장애와 우울증도 극에 달했다. 대학병원의 입원 권고와 8개월간의 이석증 치료를 견디며 나는 이 재판을 끝까지 밀어붙였다. 사건 발생으로부터 12년 6개월 2일, 정확히 4457일만에, 소송 개시로부터는 4년 만에 드디어 <구름> 공연 과정에서 발생했던 일들이 ‘검열’이었음을 법적으로 확인받았다.
승소 후에 시작된 또 다른 가해, 위선이라는 폭력
재판 후라고 달라진 것은 없었다. 판결문에는 당시 검열을 자행했던 주체와 일시가 실명으로 명시되어 있다. 그러나 손진책 선생은 여전히 사과 한마디 없이 2017년에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이 되었고 현재는 심지어 예술원 회장직을 맡고 있다. 2024년에는 ‘아름다운 예술인상’을 수상하는 등 예술가로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명예를 누리면서 여전히 연극계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문체부 역시 국가 폭력인 ‘검열’에 대한 사과나 재발 방지를 위한 시스템 구축에 입을 닫고 있다.
나는 이 재판을 통해 국립극단이 독립성을 지키는 데 도움이 되길 바랐다. 하지만 그것은 매우 낭만적인 바람이었다. 재판에서 최종 승소하고 일주일이 채 지나지 않아 박정희 예술감독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통화는 “고생했다”는 위로로 시작되었지만 내가 공식적인 사과를 요구하자 그는 태도를 바꿨다. 이후 국립극단 직원을 대동한 미팅 자리에서 나는 두 가지를 요구했다. 첫째, 검열에 대해 사과할 것. 둘째, 항소를 통해 검열을 부정하고 공소시효를 핑계로 재판을 무력화하려 했던 행위에 대해 사과할 것.
2주 후, 국립극단 홈페이지에 게시된 사과문1)은 극히 ‘비겁하고 위선적’이었다. 그들은 김광보 전 예술감독이 발간한 『국립극단 블랙리스트 사례집』2)을 들먹이며 마치 자신들의 노력을 다한 것처럼 포장했다. 정작 박정희 체제에서 자행된 항소와 검열 부정, 예술가에게 가한 2차 가해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 언급도 없었다. 박정희 예술감독이 ‘부득이한 행정적 절차’라 변명했던 그 항소 과정은 명백히 국립극단이 미래로 나아갈 기회를 스스로 걷어찬 행위였다.
이런 일이 다시 반복되지 않기 위해서는
이것은 단순한 블랙리스트가 아니다. 대본에 빨간 줄을 쳐가며 직접적으로 자행된 ‘검열’이다. 나는 이 재판을 통해 2013년 그곳에 국가의 폭력이 실재했음을 알리고 싶었다. ‘검열’은 예술가를 너무나도 고통스럽고 비참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런 경험을 또 다른 누군가에게, 또 다른 시대에 물려줄 수는 없다. 일제 강점기도 아니고 민주적 절차를 통해 합법적으로 구성된 2013년의 대한민국 정부하에서 이런 ‘검열’이 일어날 것이라고 누가 감히 예상했을까? 얼마 전 대구시립미술관의 검열 사태를 비롯하여 아직도 곳곳에서 더욱 교묘하고 은밀하게 검열이 자행되고 있다. 그러니 앞으로 또다시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으리라고 누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겠는가. 당시 블랙리스트 관련자들은 사과 한마디 없이 정권이 바뀌자 차관이 되고, 교수가 되고, 지역문화재단 대표로도 임용되었다. 그야말로 화려한 부활이다. 그래서 내게는 승소가 필요했고, 판결문이 절실했다. 기록되지 않은 진실은 언제든 부정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국립극단은 김광보 예술감독 재임 기간에 블랙리스트 사태에 대한 사과와 자체 사례집 제작을 통해 일정한 노력을 보인 바 있다. 그 과정에서 재발 방지를 위해 직원 교육과 제도를 보완하겠다고 했지만 어떤 제도적 장치가 만들어졌는지는 여전히 알 수 없다. 이번 재판 과정에서 보여준 국립극단의 행태는 마치 아무런 행정적 원칙이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명백한 잘못을 부정하고, 이사회의 의견을 핑계로 항소하며, 1심 판결을 무력화하려 했던 시도가 이를 방증한다. 만약 국립극단이 예술감독의 성향에 따라 원칙이 좌지우지된다면 이런 일은 언제고 다시 반복될 수 있다. 그러니 국립극단은 기만적인 사과문이 아니라 진정한 반성이 담긴 사과문을 올려야 한다. 그 사과문은 앞으로 국립극단 측에 명백한 과오가 있을 경우, 재판의 항소 등을 통해 예술가에게 2차 가해를 하지 못하게 막는 ‘행정적 가이드라인’이 되어야 한다. 또한 이를 정관이나 조례, 규칙에 명시하여 다시는 이런 비극이 반복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국립극단과 박정희 예술감독에게 요구한다.
국립극단은 한 개인의 소유도, 정권에 입맛에 따라 그 행동과 예술방향이 바뀌는 기관은 더더욱 아니어야 한다. 블랙리스트와 검열로 국립극단이 더 이상 부끄러움의 한가운데 있지말라. 지금이라도 당장 이 비극이 반복되지 않도록 모든 구체적인 조치들을 취하고 그 경과와 결과를 공지하라. 제대로 사과하라. 그러지 않고서는 감히 국립극단도, 박정희 예술감독도 블랙리스트 피해자라고 말하지 말라. 감히 ‘부득이한 행정적 절차였다’고 변명하지 말라. 잘못을 시인하고 나아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더 이상 국립극단이 수치심의 주인공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문체부는 블랙리스트 진상조사 이후, 몇 차례 사과를 한 바가 있다. 그러나 그 사과 후에 재발 방지를 위한 구체적인 노력이 얼마나 있었는지 반문하고 싶다. 정권이 바꿀 때마다 문체부의 입장은 조변석개처럼 바뀌었다. 지난 정권에서 블랙리스트 실행의 원흉인 유인촌 장관도 블랙리스트 자체를 부정하지 않았던가?
문체부에 다시 요구한다.
판결문에 명시된 반헌법적 검열 행위를 시도한 성명불상의 공무원을 찾아내지 않아도 좋다. 다만 문체부는 성명불상의 직원을 통해 국립극단에 검열을 지시하고 실행했음을 공개적으로 사과하라. 소속 산하 예술단체의 재정적,예술적 독립성을 보장하는 조례나 규칙을 만들고 문체부 직원 및 산하기관을 대상으로 ‘검열 감수성’ 교육을 실시하는 등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라.
또한 국회와 정부는 관련한 입법을 제정하고 ‘검열 감수성’ 및 교육실태에 대한 지속적인 관리 감독을 해야 한다. 정권의 성향에 따라 검열과 블랙리스트가 반복되는 한 문화강국은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하다.
수치심, 불안, 두려움은 더 이상 나의 것이 아니다
나는 최종 3심까지 가면서 3개의 판결문을 받았다. 검열은 더 이상 나만의 주장이나 왜곡된 기억이 아닌 ‘사실’이 되었다. 판결문에 적시된 것처럼 반헌법적인 행위인 ‘검열’이 사실로 인정받기까지 나를 짓누르던 무력감과 수치심, 불안과 두려움을 어찌 다 말할 수 있을까. 그러나 나의 곁을 지켜주고 응원해주신 동료, 선배, 후배님들, 은밀히 전화해서는 고맙다고 하는 분들, 재판하는 줄 몰랐다며 밥을 사주시는 분들, <구름> 사례를 계속 글과 논문으로 세상에 알려주시는 분들, 나보다 더 분기탱천하여 대신 분노하고 아파해주시는 분들, 그분들 덕분에 긴 시간을 버티고 나아갈 수 있었다. 무엇보다 블랙리스트 진상조사위의 조사가 없었다면 재판을 시작할 수도,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었다. 그래서 이제는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다. 수치심과 불안, 두려움은 나의 것이 아니다. 침묵으로 방관하고 거짓으로 회피했던 그들이 이제 그 책임을 마주할 때다.
남인우
버티는 건 잘하는 공연예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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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연극 <구름> 검열 사태에 대한 국립극단 사과문
2.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태-국립극단 사례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