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아

서울문화재단 대표이사 송형종은 2025년 11월 18일 서울시의회에 나와서 “재단의 모든 사업은 공공성을 유지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이 발언은 웹진 《연극 in》의 일방적 휴간 사태와 관련한 질의응답 과정에서 나온 것으로, “서울 시민들을 위한 웹진이어야지, 특정인을 위한 웹진이어서는 안 된다”라며 웹진 《연극 in》이 소수에 의해 점유됐다는 취지의 주장을 하던 끝에 뱉은 말이다.1 문화예술기관이 기존 사업의 존폐나 방향 전환을 일방적으로 결정하면서 이를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공공성’을 내세운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독립 음악가이자 문화기획자인 정문식이 민관협치의 대표적 모범사례였던 서교예술실험센터의 일방적 운영 중단 문제를 이야기하며 “‘공공성’이라는 무기로 민간과 현장을 통제하고 관리”2한다고 비판한 것도 그 같은 맥락이다. 박근혜 정부 시절 대통령비서실장이었던 김기춘은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실행을 지시하면서 이를 “문화·예술계 공공성 강화 작업”3이라고 명명했다.

오늘날 예술의 공공성 문제는 예술 정책의 방향, 문화예술기관의 공적 기금 운용, 예술지원제도의 설계 등의 영역에서만 한정적으로 논의된다. ‘공공성’을 정책과 행정의 용어로 넘겨준 것이다. 이러한 사고의 틀 안에서라면 예술가는 정책과 행정의 대상이며 시민은 수동적인 소비자나 향유자다. 예술가는 매해 공지되는 지원사업에 응하고 그에 자신의 작업을 맞추며 주어진 평가지표에서 어긋나지 않도록 결과를 만들어내면 된다. 행정은 효율성과 가시적 성과를 기준으로 이를 관리한다. 이제 예술의 공공성은 다수의 대중에게 양질의 예술을 비용의 경제성과 효율성을 따지며 공급하는 일이 된다. ‘세금을 덜 쓰고’ ‘최대 다수의 관객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며’ 나아가 ‘산업적으로 경제적 이익을 창출하는’ 일이 예술 정책과 예술 공공성의 최우선 과제가 된 것이다.

국가처럼 보기, 혹은 국가의 눈에 띄기

제임스 C. 스콧은 현실을 단순화하여 통제하는 국가 주도형 공공계획의 맹점과 관료주의의 한계를 비판한다. 그는 이것을 ‘국가처럼 보기’라고 불렀는데, 국가가 사회를 통제하기 쉽게 하려고 단순화, 추상화, 표준화하는 것을 말한다. 그는 국가에 의해 읽히는 것, 국가처럼 읽는 것은 ‘결국 조작되는 것’이라 말한다.4 탄력적이고 변화무쌍하며 사람들 사이를 흐르고 관계 맺는 일들, 평가 시스템이나 지표로는 알 수 없는 가치들, 시장성은 없지만 또 대중적 지지를 폭넓게 받지는 못하지만 장기적으로는 풀뿌리 연대를 만들고 다양성을 포용하며 사회를 건강하게 만드는 데 기여하는 일들은 모두 무시된다. 국가가 보지 못하는(또는 보지 않는) 것은 무가치하거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예술의 공공성을 모두 국가 주도의 정책과 행정의 영역으로 넘겨준 채 정책과 지원사업에 적응하며 자신의 작업에만 몰두하게 된 예술계의 작금의 흐름이 본격화된 것은, 경제적 효율성을 중심으로 정부의 역할을 축소하고 사회적 기능을 시장화하는 행정 이론 ‘신공공관리론(New Public Management)’이 한국 사회에 본격적으로 도입되면서부터다.5 ‘국가경쟁력으로서의 문화예술’ ‘산업으로서의 문화예술’이라는 말도 이 시기 처음 등장했다.6 신공공관리론은 국가 개입을 최소화하고 시장의 자유 경쟁을 통해 자본의 효율성을 극대화하려는 신자유주의 사상과 밀접한 관련을 지니는데, 그런 이유로 이 둘을 묶어 ‘신자유주의-신공공관리’ 혹은 ‘신자유주의적 신공공관리(neoliberal NPM)’로 지칭하기도 한다. 신자유주의-신공공관리는 당초의 이론적 주장과는 달리 기관의 자율성과 책임성을 현저히 약화시켰다. 기관의 성과와 결과를 예산과 연계하는 성과중심주의가 기관에 대한 강력한 통제 수단으로 작동하면서 실질적인 기관의 자율성을 무력화했기 때문이다.

특히 이것이 예술계에 얼마나 치명적으로 작용하였는가는 이명박-박근혜 정권 시절의 블랙리스트 사태가 여실히 보여주었다. 블랙리스트의 작동은 ‘지원사업’(자본의 논리)을 중심으로 실행되었으며, 문화체육관광부와 산하 기관 사이의 위계적인 직렬구조, 그 결과 초래된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예술경영지원센터, 국립극단 등 문체부 산하 기관의 자율성과 책임성의 훼손이 가장 기본적인 토양이었다.7 여기에 사업의 심의와 평가의 전 과정이 민간 전문가에게 위탁되는 문화예술기관 사업의 특성상 책임성은 민간에게 미루어지거나 책임 소재 자체가 불분명해졌다. 이러한 상황은 블랙리스트 이후 더욱 공고해졌다. 오늘날 기관은 절차적 투명성을 강화한다는 미명 아래 점점 더 기계적이고 형식적인 투명성, 책임 소재를 불분명하게 만드는 방어적이고 수동적인 관리형 제도를 공고히 해 나가고 있다.

문화예술재단은 거미줄처럼 촘촘한데 왜 예술-하기는 더 나아지지 않지?

1997년 경기문화재단을 시작으로 전국의 각 지방자치단체마다 문화재단이 설립되었고 서울의 경우 구 단위에도 문화재단이 설립되었지만, 예술가의 ‘예술 하기’는 나아지지 않았다. 지난 6월 ‘예술가의 목소리’가 주최한 포럼에서 발제에 나선 우연에 따르면, 문체부 소속 산하 기관은 2,000년 당시 약 80개였던 것이 현재는 184개(2025년 12월 기준)로 2배 이상 증가하였으며 지역문화재단 또한 142개로 이전과는 비교가 불가할 정도로 비약적으로 늘었다. 전국에 산재한 기관들의 연결과 협력을 목적으로 한국문화예술회관연합회, 한국광역문화재단연합회, 전국지역문화재단연합회 등의 협단체도 구성되면서 공공예술기관들의 관료 체계는 양적 팽창과 함께 고도화되었다. 우연은 이러한 상황에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전국의 다양한 예술 현장의 목소리를 연결하고 모아내는 예술 네트워크가 될 것인가, 권력의 단일한 목소리를 일사분란하게 효율적으로 통제하고 전달하는 전체주의의 채널이 될 것인가?”8 적어도 예술계의 체감은 전자는 아니다.

정부와 행정에 의한 공공성의 전유는 예술가를 무력하고 수동적인 정책의 수혜자이자 지원 제도 안에서 기금 수혜를 받기 위하여 동료 예술인들과 경쟁하는 자로 만든다. 정책적 제안이나 공공사업에 예술가들이 참여하기도 하지만 모두 공공기관이 허락한 범주 안에서의 작업이며, 기관장이 바뀌거나 정부 정책 방향이 바뀌게 되면 “공공과 민간의 협력, 공동 책임 구조의 운영 시스템, 그리고 그로 인해 축적된 성과가 한순간에 허공으로 사라지는 일” “민간의 여러 주체들이 상당한 시간 동안 공을 들여 만들어낸 시스템과 성과를 신기루처럼 사라지게 만드는 일”9은 너무도 손쉽게 일어난다. 그리고 결국 이러한 구조는 예술과 예술가를 통제와 관리의 대상이 되도록 만든다.

신공공관리론을 비판하는 이영철은 기업가적 정부의 논리를 끝까지 밀고 가면 결국 정부는 시민을 소비자로 보고, 그들의 요구를 경제적 합리성의 시각에서 판단하여, 그들의 욕구를 만족시키는 정책만을 펴면 된다는 결과를 낳는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시민은 소비자가 아니다. “시민은 공동체가 가치 있다고 보는 것을 정부가 실행에 옮겨주기를 바라며, 더 나아가서 그 가치가 무엇인지 분명치 않을 때에는 정치적 토론과 절차를 통해서 그 가치를 찾아내고 표명하여 주기를 바란다.”10

“시민은 소비자가 아니다!”

사람들 간의 복잡한 관계를 모두 삭제하고, 결과와 성과, 효율성의 개념으로 사회를 바라보는 오늘날의 관료주의를 인류학자 그레이버는 ‘경제주의’라고 비판한다. 경제주의의 관점으로 본 인간은 최소한의 희생과 노력으로 최대한 많은 만족을 얻으려 한다. 그런데 이러한 전제를 받아들이면 사회는 개인적 이익 추구 활동의 결과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된다. 그레이버는 인류학적 관찰에 의하면 사람들은 경제적 이익이 발생하지 않는 곳에도 투자할 뿐 아니라 어떤 행동은 이타적 동기로밖에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다고 지적한다. 다만 경제주의와 성장중심주의가 이러한 부분을 주목하지 않는 것이다. 이는 달리 표현하면 ‘사람들이 세계에 어떻게 참여하는지’에 대하여 정작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것이다.11

한나 아렌트는 ‘공적’ ‘공공적’이라는 것을 다음의 두 가지 현상으로 설명한다. 첫째는 “공중 앞에 나타나는 모든 것”으로, 누구나 보고 들을 수 있다는 개념이다. 다른 하나는 “세계가 우리 모두에게 공동의 것(common to all)”이라는 점, 즉 모두가 속한 ‘공동의 세계’다. 공동의 세계는 사람들을 이어주기도 하고 갈라놓기도 하는 객관적이고 지속적인 공통의 무대다. 그렇기에 공동의 세계에서는 사람들 ‘사이(in-between)’가 중요하다. 사이의 공간은 사람들이 ‘자신의 다름을 유지’하면서도 ‘타인과 서로 공존’할 수 있게 만든다. 그리고 이러한 공동 세계의 실재성은 세계를 구성하는 사람들이 ‘다양한 입장과 관점을 갖는다’라는 것으로부터 온다.

그런데 이러한 공적 공간의 파괴, 즉 ‘공동 세계의 사멸’은 언제든 일어날 수 있다. 이것은 “근본적인 고립의 조건에서”, “독재의 경우처럼 누구도 자기 이외의 사람들과 협동하고 의사소통할 수 없는 조건에서” 때로는 “대중사회 또는 대중적 히스테리의 조건에서” 발생한다. 이러한 조건들이 갖는 공통점은 우리가 타인을 보지도 듣지도 않으며 타인도 우리를 보거나 들을 수 없는 상황, 다시 말하면 “수많은 측면과 관점들이 동시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삭제하고 통제하는 상황이라는 점이다. 아렌트는 이를 ‘공동의 세계에 대한 감각’을 잃는 것이라고 말한다.12

권력이 다양한 관점과 의견이 소통되는 것을 억압하거나, 시민들이 비판의식을 잃고 그저 순응적이고 획일화된 대중이 되거나, 개인이 타인을 만나고 서로 다른 관점을 교환할 수 있는 연결이 끊겨 고립된 채 주관적 경험에만 갇히게 될 때, 우리는 ‘공적 공간’을 잃게 되며 ‘공동의 세계에 대한 감각’도 잃게 된다. 공동의 세계에 대한 감각을 잃게 되면, 예술가는 고립된 채 지원금과 작업 결과와 성과에만 몰두하게 되고, 공공기관은 정책이 원하는 방향을 지지할 수 있도록 여론을 구성・관리・통제할 수 있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다양한 목소리, 특히 소수자의 목소리는 가장 먼저 삭제된다. 공론장으로서의 예술의 역할, 실제 삶의 영역과의 접촉이 모두 사라지는 것이다. 남는 것은 인간적 유대가 사라진 행정적 절차와 효율성, 그리고 지표를 만족시키는 성과다.

‘공동의 것’으로서의 예술, ‘공동 세계에 대한 감각’으로서의 예술

지식과 문화예술은 본디 ‘모두에게 속했던 것’이며, 화폐로 교환되고 물적 가치로 평가되는 시장의 ‘바깥’에 존재했던 것이다. 데이비드 볼리어는 예술은 기본적으로 ‘공동의 것’ ‘공유재’였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는 “태곳적부터 인간은 창의성을 서로 자유롭게 나눠왔다. 문화는 늘 이전에 만들어진 창작물을 모방하고, 발전시키고, 변형하는 것에 기반했다. 예술은 언제나 공동체 안에서, 세대 간에 일어나는 빌려옴의 행위였다.”13고 말한다. 바로 그 때문에 예술이 공동체를 구성하는 필수 자원이자 상호 교류하고 소통할 수 있는 근간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셰익스피어도, 괴테도 이러한 ‘공동의 것으로서의 예술’ 없이는 존재할 수 없었다.

그런데 지식과 문화의 인클로저가 일어난 지난 세기 동안 문화는 더 이상 공동체 모두의 것, 공동의 것이 아니게 되어버렸다. 볼리어는 공동체의 것이자 사회를 결속하는 힘이었던 문화와 예술이 이제 ‘지적 재산’의 하나에 지나지 않게 되었으며, 시장의 법칙에 따라 배타적으로 유통되고 이윤을 창출하는 상품이 되었다고 비판한다.14 문화와 예술이 오직 상업적 가치로 여겨지는 사회에서 희생되는 것은 ‘사회적 관계’, ‘공동체 문화’, ‘인간 삶의 질’이다. 볼리어는 필수적 자원을 빼앗긴 공동체는 결국 사회의 성격이 바뀌게 된다고 경고한다.

역시 ‘공동의 것’으로서의 예술을 강조하는 루이스 하이드는 예술을 ‘선물15’의 개념으로 본다. 선물은 시장에서 사고파는 상품이 아니다. 주고받음으로써 ‘관계와 순환의 고리’를 만들고, 이를 통해 사회적 유대를 형성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선물은 함께 ‘공유’함으로써 가치가 배가되는 그런 것이다. 예술이 선물인 것은 설사 돈을 지불하였다고 하여도 그것을 완전히, 또 영원히 배타적으로 소유할 수는 없으며, 사용(향유)한다고 하여 사라지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예술은 사회적 관계 안에서만 가치가 발생하는, 나아가 그것을 사회 안에서 나눌 때에 그 가치가 더욱 배가되는 그런 것이다. 그러한 이유로 예술은 사람들 사이를 순환하면서 관계를 형성하고, 이를 통해 사회의 유대감을 만든다. 하이드는 “예술은 시장 없이도 살아남을 수 있다. 하지만 예술은 선물이 없는 곳에는 존재하지 않는다”16고 지적한다. 이것이 창조적 정신과 예술이 공동체에 기여하는 방식이자 예술의 공공성인 것이다.

예술은 창작자 혼자 완성하는, 창작자만의 것이 아니다. 그것을 표현하고 공유하고 그 과정에서 다시 창출되는 ‘공동의 작업’이다. 우리가 티켓 값을 지불하였다고 해도 무엇을 받을지는 보장되지 않는다. 그것은 나의 의지와 무관하다. 그리고 이것이 선물의 본질이다. 선물은 자신의 노력으로 얻거나 의지에 따라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선물은 ‘선사되는 것’이다. 선물을 주고 받는 것은 ‘새로운 에너지가 창출’되는 일이다. 그것이 관계와 순환을 만든다. 그리고 이것이 예술이 공동체 문화 안에서 지니는 의미인 것이다.

우리가 회복해야 하는 예술의 공공성은 바로 ‘공동의 것’으로서의 예술, ‘선물’로서의 예술이다. 공동체는 고정된 형태가 아니며 현실의 상호 교류 속에서 출현하는 사회적 관계 그 자체다. 이 관계에서 문화와 예술은 공동체를 구성하는 필수 자원이자 상호 교류와 소통의 근간이다. 예술은 심지어 자본주의에 포획될 때조차도 항상 그것을 초과한다. 예술은 모든 것이 경제적 가치로 환산되고 이윤으로 평가되는 작금에도 여전히 자본주의의 외부가 있음을,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증언하는 존재다.

정치와 행정이 전유한 공공성, 특히 경제중심주의와 성과중심주의로 돌아가는 정책과 행정은 이러한 관계, 순환, 변화의 역동적 움직임을 보지 못하게 만든다. 예술을 중심으로 한 사회적 행위자들의 실천을 이해하고 평가하지 못하게 만든다. 예술은 사회적 행위자들의 공동의 것이며, 관계 참여의 문제이자 세계 참여의 문제다. 우리가 회복하고 논해야 하는 공공성은 바로 여기에서 출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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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예술의 공공성 개념 재정립을 위한 시론: 광장 이후, 예술계 백래시와 대응을 중심으로」(『횡단 인문학』23호, 2026.06)의 일부를 수정 · 재구성한 것이다.

이진아

비평을 필요로 하지 않는 시대에 비평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고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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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송이수, 「이제와 연극in 필진 문제 삼는 서울문화재단… 특정인을 위한 웹진?」, 『미디어스』 , 2025.12.04. <https://www.mediaus.co.kr/news/curationView.html?idxno=315400&gt; ↩︎
  2. 정문식, 「서교예술실험센터의 사례 – 민관 거버넌스로 시작하였지만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린」, 『제11차 대학로X포럼 자료집: “현장과 공공이 만든 예술자산, 누구도 파괴할 수 없다” – 웹진 《연극in》 잠정휴간사태가 의미하는 것』, 폐간대책위원회, 2025.06.30. 23쪽. ↩︎
  3. 정진우, 「블랙리스트 시발점은 박대통령 풍자 연극 ‘개구리’」, 『중앙일보』, 2017.01.26. <https://www.joongang.co.kr/article/21178757&gt; ↩︎
  4. 제임스 C. 스콧, 『국가처럼 보기 – 왜 국가는 계획에 실패하는가』, 전상인 역, 에코리브르, 2010. 참조. ↩︎
  5. 김대중 정부는 1998년 출범 초부터 신자유주의-신공공관리를 정부 관리 개혁 모델로 받아들였다. 신공공관리론은 그 이전부터 도입이 논의된 바 있었으나 여러 반대 의견에 부딪혀 본격화되지는 못하였는데, 1997년 외환위기와 국제통화기금(IMF) 관리 체제를 맞아 개혁과 구조조정의 필요성이 긴급하게 대두되면서 별다른 도전과 비판 없이 빠르게 도입될 수 있었다. ↩︎
  6. 1997년 문화체육부가 발표한 <문화비전 2000>에 “문화의 경쟁력”이라는 개념이 등장하면서, 문화를 산업으로 접근하는 관점이나 문화예술이 국가경쟁력이라는 논리가 이 시기 정립된다. 이에 따라 1999년에는 ‘문화산업진흥 기본법’이 제정된다. ↩︎
  7. 김미도,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태의 전말 : 한번 물면 살점 떨어질 때까지』, 연극과인간, 2025. 320~328쪽. ↩︎
  8. 우연, 「발제1. 예술계 리더십 부재는 예술 현장에 어떤 파국을 가져오는가?」, 『예술인의 목소리 포럼 자료집: “리더 없는” 타운홀 미팅, 예술인의 목소리로 채웁니다』, 2026.06.22. 10쪽. ↩︎
  9. 정문식, 앞의 글, 23쪽. ↩︎
  10. 이영철, 「신공공관리론의 이론적 비판 – 원자화된 개인, 강력한 시장, 축소지향형 정부」, 『정부학연구』 9-1, 정부학연구소, 2003. 69쪽. ↩︎
  11. 데이비드 그레이버, 『가치이론에 대한 인류학적 접근』, 서정은 역, 그린비, 2009, pp.25-70, pp.117-124. ↩︎
  12. 한나 아렌트, 『인간의 조건』, 이진우・태정호 역, 한길사, 2010, 110쪽. ↩︎
  13. 데이비드 볼리어, 『공유인으로 사고하라』, 배수현 역, 갈무리, 2015. 107쪽. ↩︎
  14. 볼리어는 이를 현대판 인클로저(enclosure)라고 말한다. 모두가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었고 사용할 수 있었던 문화와 예술을 이제는 돈이 없으면 혹은 자격을 갖추지 않으면 접근할 수 없도록 울타리를 치고 구획을 만든 후 상품화했기 때문이다. ↩︎
  15. 루이스 하이드가 주목하는 ‘선물(gift)’은 인류학자인 마르셀 모스가 자신의 저서 『증여론』에서 주목한 ‘선물 경제’를 확장한 개념이다. 즉 ‘관계의 순환’을 만들고 신뢰를 형성함으로써 공동체의 유대와 질서를 공고히 하는 교환 체제로서의 ‘선물’이다. 북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재화를 베푸는 포틀래치(Potlatch)는 인류학에서 널리 알려지고 연구된 대표적인 ‘선물 경제’의 사례다. ↩︎
  16. 루이스 하이드, 『선물: 대가 없이 주고 받는 일은 왜 중요한가』, 전병근 역, 유유, 2022, 28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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