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소망

사회학자 김찬호는 존엄과 굴욕의 감정사회학을 다룬 『모멸감』에서 ‘모멸’을 “모욕하고 경멸하는 것, 즉 마음으로 낮추어 보거나 하찮게 여기는 것”으로 설명한다. 내가 처음 예술인으로서 ‘모멸감’을 느낀 건 대학 입학 이후였다. 이명박 정권 시절 학과가 통째로 없어질지도 모른다는 불안으로 수업보다 공청회를 더 많이 다녔고, 박근혜 정권 시절엔 블랙리스트 검열 사태로 어려움을 겪는 선배 예술 단체들의 억울한 호소를 들어야 했으며, 정권이 바뀐 이후에도 제대로 책임지는 이가 아무도 없어 꾸준히 피켓 시위를 하는 사진을 마주했다. 이 사회에서 예술인으로 살려면 ‘싸움’을 하는 법을 익혀야 하는 것처럼 보였다. 기관장 인사 참사와 맞물려 터진 예술활동증명 문제에서도 예술인은 스스로 움직여 싸움을 만들어 내야 했다. 자리를 만들어 화를 내고, 울분을 쏟아내어야만 하는 이런 모든 상황이 ‘모멸’ 그 자체가 아니고 무엇인가. 예술인은 함부로 낮추어 보고 하찮게 여겨도 되는 존재이자 신분인 것일까.

2026년 상반기, 문화예술계 기관장 인사 참사가 이어지는 풍경을 보며 내가 얼마나 순진한 사람인지 절감했다. ‘누가 기관장으로 온다더라’ 하는 소문을 들으며 ‘설마 그런 일이, 말도 안 되지’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말도 안 되는 일이 실제가 되는 경험은 난데없이 계엄을 선포하는 정권 아래에서나 겪는 일이라 생각한 것 또한 순진함의 결과였다. 예술계 동료들 사이에서는 “우리가 그렇게 만만한가?” 하는 질문과 함께 분노와 무력감이 공존했다.

목소리를 내지 않을 수 없었다. 기관장 임명 문제를 비롯한 예술 생태계 문제에 대한 <현장 예술인들이 묻는다, 예술에 미래는 있는가?>라는 성명에 참여했다. 이것을 계기로 예술인들의 다양한 목소리가 모였다. 무려 748명의 예술인이 참여한 <예술인의 목소리>가 카드뉴스로 제작되어 연일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에 올라왔다. 모두 현 상황에 대한 분노를 드러내며 각자의 언어로 말을 얹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았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대학로예술극장 1층 씨어터광장에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의견을 모으기로 했다. 2026년 6월 22일 월요일 오후 두 시, 늘 공연을 보러 가던 공간에서 <“리더 없는” 타운홀 미팅> 공론장이 열렸다.

공공예술기관은 누구의 것인가

장장 4시간 동안 이어진 미팅은 지친 기색 하나 없이 열기로 가득했다. 1부에서는 현 상황을 정리한 브리핑과 공공기관 기관장 임명 참사가 어떠한 결과로 이어지는지 살피고 그 영향과 문제를 짚는 두 편의 발제가 이어졌다. 2부에서는 각 예술 분야에 종사하는 현장 예술인들의 증언과 미팅에 참여한 이들이 제안하는 대안적 상상에 대해 자유로운 발언이 줄을 이었다.

기관장 임명 문제는 단순하지 않다. 예술인과 기관의 긴밀한 관계가 예술 생태계의 기반을 이루게 된 건 이미 오래된 일이며, 기관장은 곧 예술인의 작업, 나아가 생존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 기관장이 그저 어떤 기관의 대표인 존재가 아니라 예술 생태계의 방향을 결정하는 사람이 된 것이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변화하는 제도의 방향에 따라 예술인은 흔들린다. 아니, 흔들려야만 했다. 예술 현장에서 관객을 만나기 위해서는 제도에 길들여지기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1부에서 진행된 우연의 발제에 따르면, 제도를 필요로 하는 예술가는 제도에 쉽게 포섭되며, 기관은 그렇게 포섭된 예술인과 단체를 그저 ‘관리’하는 주체로 전락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술인은 누구보다 빠르게 관료와 행정 언어를 학습하고, 변화하는 제도의 입맛에 맞는 기획서를 써내는 것을 목표로 삼게 된다. 기관장, 심의위원, 관리자 또한 좌우로 나뉘어 돌아가는 정치권력에 의해 ‘소비’된다.

이러한 구조는 결국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가. 어떤 예술을 빚어내는가. 예술을 지원하기 위해 생긴 제도와 기관이 어찌하여 예술을 망치고 훼손하는 일에 기여하는가. ‘생존’이라는 덜미를 잡힌 예술인이 무엇을 선택할 수 있으며, 선택해야 할까. 기관과 예술은 왜 서로를 지탱하는 관계로 존재하기 어려워졌을까. 이는 단순히 비판으로만 갈음할 수 없다. 공생의 방식을 찾고, 공존할 수 있도록 구조를 재편할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

이어진 발제에서 홍은지는 “단순 임명 문제를 넘어 근본적인 재정 구조와 거버넌스 법률 자체의 변화가 필요”하다고 지적하며 ‘팔 길이 원칙’을 언급한다. 팔 길이 원칙이란 “정부가 공공지원 정책분야에서 지원은 하되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간섭하지 않는, 즉 운영·인사·실행 측면에서 독립성과 자율성 보장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원칙이 문화예술 분야에서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예술인의 목소리

2부 현장 예술인의 릴레이 증언에서는 다양한 키워드가 등장했다. 현장, 담론, 안전, 검열, 거버넌스, 행정……. 전통, 무용, 시각, 연극, 국제교류, 축제 등 각기 다른 분야에서 서로 다른 키워드로 이야기했지만, 기실 이것들은 ‘예술 생태계’라는 이름 아래 공통으로 얽혀 있는 문제로 볼 수 있다. 예술 창작자(생산자)와 소비자(관객)를 비롯하여 지원 시스템(기관)의 유기적인 네트워크로 형성되는 예술 생태계는 각 주체에게 주어지는 역할과 책임에 의해 순환된다.

2018년에 김천에서 일어난 공연 스태프 고(故) 박송희 님의 안전 사망 사고에 이어 2022년에 세종문화회관에서 리허설 중 사고를 당했던 성악가 안영재 님이 2025년에 유명을 달리했다. 잇따른 공연장 관련 사망 소식에 국정 감사에서 장관이 직접 원인을 묻기도 했지만, 이제껏 두 사람의 사망에 대한 책임을 진 이는 아무도 없다. 심지어 고 안영재 님은 서울시오페라단 객원 단원으로 무대에 올랐다가 사고를 당했음에도 당시 단장이었던 이가 올해 국립오페라단 예술감독으로 선임되었다. 사고 당시부터 분노한 예술인들의 목소리가 이어졌지만 오래도록 침묵하던 그는 예술감독 선임을 계기로 논란이 일자 1년이 지나서야 “나는 아무 책임이 없고, 심지어 몰랐다. 1년 뒤에 알았다”라고 발언해 물의를 빚고 있다. 자신이 이끌던 단체에서 사람이 죽었다. 공연을 돕기 위해 참여한 ‘객원’ 연주자가 사고를 당했는데 당시에도 그 이후에도 전혀 몰랐다는 진술은 오히려 더 큰 책임 유기를 드러내는 것 아닌가.

2부 릴레이 증언에서 임인자는 “신자유주의적으로 고용을 최소화하는 효율 체제 안에서 예술 활동을 하다 보니 안전사고가 나도 책임지지 않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결국 이 또한 ‘구조’의 문제라는 것이다. 그의 말마따나 “리더십의 문제가 예술인의 노동·작업 환경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 문제는 남인우가 제기한 ‘검열’ 사태로도 이어진다. 그는 대본 검열의 책임, 리더십 문제를 넘어 “공공기관의 역할, 소관 부처의 관료제 문제”가 더 밀도 있게 이야기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관료들은 애초에 예술 현장에서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는 사람에게는 관심이 없다. “그저 잡음 없이 기관을 잘 관리하고, 성과를 잘 내는 사람”, “국민의 세금으로 시끄럽고 소란스럽지 않게 ‘예술’하는” 사람을 원한다. 남인우는 이러한 관료 중심 문화가 “신종 검열”로 이어진다고 지적한다. 예술가의 욕망을 담보로 관료제에 저항하지 못하게 길들이고, “원하는 상품을 만들어 납품하게” 하며,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게 만들고”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생태계 안에서 예술가는 ‘검열’을 스스로 내면화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자주, 더 많이 말하고, 스스로 알아차려야 한다. 사회자 박지선의 코멘트처럼 “우리도 모르게 익숙해진 것이 많”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를 기록하고, 비평하며 담론을 만들어 가는 것이 예술계 담론의 장(場)이다. 정진세는 서울문화재단이 <연극in>을 폐간한 사태를 비판하며 자신이 생각하는 기관장의 전문성이란, “담론이 존재할 수 있는 조건을 지켜내는 능력”이라고 말한다. 담론은 이 세계를 애정하는 이들이 품을 내어 형성하는 장이다. 쉽게, 허투루 만들 수도 없다. 정진세에 따르면, 이는 “공공의 자산”이다.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리더는 “담론이 모이는 ‘공론장’의 중요성을 아는 사람”이며, 이는 곧 “우리가 어떤 예술 생태계를 만들고 싶은가에 대한 질문”이 된다.

앞서 말했듯, 각기 별개의 것으로 보이는 문제들은 기관장 임명 문제를 계기로 표면화되었을 뿐, 모두 연결되어 있다. 기실 기관장 리더십 문제가 제기된 것이 처음도 아니며, 정권이 바뀌어 새로운 정치세력이 들어설 때마다 코드 인사, 자질 문제는 반복적으로 제기되어 왔다. 결국 개인의 문제가 아닌 ‘시스템’의 문제인 것이다. 예술이 이데올로기에 포섭되어도 되는가. 이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할 예술계 종사자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예술인은 때마다 바뀌는 정치권력에 의해 관리 대상이 되어야 하는가. 공무원이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적응하듯, 예술인 또한 이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가? 건강한 예술 생태계 조성에 조금도 관심이 없는, 동료 예술인의 죽음에 아무 책임을 느끼지 못하는, 후배 예술가에게 검열을 요구하는 것에 거리낌이 없는, 그저 자기 생존에만 몰두하며 정치권력에 힘을 더 보태어 주기에 급급한 사람들. 그런 이들이 장(長)이 되는 세계에서 안전, 검열, 담론, 거버넌스를 논할 수 있을까. 곳곳에서 터져 나온 예술가의 목소리를 이 글에 모두 담기엔 버거워 보인다.

대안을 상상하기

비판에서만 그치지 않았다. 대안적 상상들도 나누었다. 예술인들이 지원서를 쓰지 않는 ‘총파업’부터 기관장에게 미션 부여하기, 예술인이 기관에게 평가받듯 예술인이 예술 기관 평가하기와 같은 상상에서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함께 웃었지만, 영 이루어지지 못할 상상도 아니다. 지원받는 주체만 평가 대상이 되란 법은 없지 않은가. 지원하는 주체가 올바른 시스템과 기준을 가지고 운영되고 있는지는 지원 대상이 가장 잘 알 것이다.

기재부 예산으로 운영되는 문체부, 문체부 예산으로 운영되는 예술 기관에게 ‘예산’은 중요한 자원이다. 이 ‘돈’은 때로 기관 종사자를 압박하는 수단이 되고, 이는 곧 예술(인) 지원 사업으로 연결된다. 우연의 말과 같이 “공공자금은 볼모 자산이 아니다.” 돈 때문에 서로를 압박하거나 의식하는 문화는 예술 창작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문제는 이것이 ‘당연한 문화’가 되는 것이다. 지원 사업 체계 안에서 기관과 예술인 모두 “예산을 볼모로” 압박하거나 의식하게 만드는 문화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끈질기게 지적해야 한다.

이러한 문제를 지속적으로 제기하고 논의하기 위해서 민간 거버넌스가 필요하다. 1부 발제에서 홍은지는 상설 민간 거버넌스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문화예술계가 거버넌스 주체로 참여하는 지속 가능한 구조를 만들어 내야 임명 문제를 비롯한 예술 생태계의 여러 문제를 민주적이고 자율적인 방식으로 논의할 수 있다는 것이다. 기관장 임명 기준이나 기관과 예술인이 상호 견제할 수 있는 제도 또한 민간 거버넌스를 통해 제안될 수 있다.

예술인들은 기관의 언어를 이미 깊게 이해하고 있다. 둘 사이의 소통은 늘 그들의 언어로만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관은 예술인의 언어를 얼마나 학습했는가. 기실 기관장이 예술인의 언어로 예술인과 기관 사이를 매개해야 하지 않을까? 일방향의 소통과 외침만으로 변화를 이루어낼 수는 없다.

당신을 향한 정언 : 이 소음을 들으라

공통의 문제를 논하는 공론장이 잘 열리지 않는 세계에 몸담은 사람으로서 이번 타운홀 미팅은 상당히 고무적인 자리였다. 함께 몸담은 세계의 정화를 바라는 사람들이 모여 ‘리더 없이’ 수평적으로 대화하는 것 자체가 개인적으로는 생경한, 그러나 희망적인 풍경이었다. 어떠한 이해관계나 정치적 얽힘 없이, 자기검열하지 않고 생각을 그대로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있는 안전한 공간이 존재한다는 게 그저 신기할 따름이었다. 한편, 내가 몸담은 세계에서는 왜 이러한 공론장이 좀처럼 열리지 않는지 골똘히 생각하게 된다.

사회자 박지선은 마무리 발언에서 국립발레단 단장 임명 논란에 대해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여러분은 공연이나 열심히 하십시오.”라고 자신의 SNS를 통해 발언한 문체부 장관을 비판했다. 기실 전통공연예술계 일원들은 스스로를 ‘공연만 열심히 하면 되는 존재’로 상정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사회자의 말처럼 예술인은 “공연이나 열심히 하”는 존재가 아니다. 예술인에게 ‘공연-하기’는 행위의 일부일 뿐이다. 예술인은 예술 생태계를 이루는 중요한 주체로서 이 세계에 참여하고 이 세계를 건강하게 만들어갈 마땅한 책임과 의무가 있다. 어떻게 나의 세계에서 이 중요한 사실을 공유할 수 있을지 난망하지만, 나에게도 동일한 책임과 의무가 있다는 사실을 상기한다.

너무 많은 의제를 한꺼번에 나누어 소화가 잘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서도 이 모든 의제가 얽히고설켜 생겨난 문제임을 다시 한번 알아차린다. 어쩌면 필요한 변화는 예술인들의 연대만으로 이루어낼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예술인 당사자들과 더불어 예술 생태계 조성에 같은 책임과 의무를 지닌 예술 기관 종사자들, 더 나아가서는 관객들까지 여러 층위의 연대가 필요하다. 정치권력에 휘둘리지 않는 예술 생태계 구조를 만들기 위해서는 당위 제시만으로는 어렵다. 설득의 언어를 갖추고 이 운동을 장기적으로 지속·확장할 수 있는 민간 거버넌스가 필요해 보인다. 당장 민간 거버넌스 구성이 어렵다면, TF라도 구성하여 반복적으로 의제를 던지고, 압박하고, 실제적 대안을 제시할 수 있으면 좋겠다. 모든 예술 분야가 참여해서 각 세계의 문제 또한 나누고, 시의적인 이슈 파이팅도 함께하는 전략도 유효해 보인다.

이번 공론장을 통해 울려 퍼진 예술인의 목소리는 그간 누적된 모멸에 대한 절규다. 이 목소리를 외면하거나 회피하는 건 예술인에게 그 모멸을 다시 감내하라고 요구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는 예술 생태계를 이루고 있는 모든 이가 귀 기울여야 할 목소리이며, 결코 취사선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이 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무관한 이는 아무도 없다. 침묵의 반대는 소음일지도 모른다. 소란스럽게 울려 퍼지는 이 소음을 단호한 정언으로 들으라.

백소망

음악가, 기획자, 비평가.

음악그룹 아마씨 동인으로 노래를 짓고 부른다. 전통공연예술에 대한 애증을 동력으로 비평에 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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