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성현

남들과 다른 것이 남들보다 뛰어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다름’을 증명하는 것, 내 작업의 고유성을 인정받는 것은 그 자체로 예술의 시작점이 된다. 그리고 시작점에 선 예술 작업자들은 필연적으로 자신들이 도달할 곳을 그려보게 되며, 그 ‘도달점’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그의 세계는 다른 범위를 획득하게 된다. 도달점으로 이어지는 어렴풋한 선을 더 명확하게 그리려는 행위가 그의 ‘전망’이 되고, 전망을 다듬고 때론 내버리면서 도달점을 더 멀리 밀어붙이고 다시 다른 곳을 바라보며 흔들리는 모든 행위가 그의 작품 세계를 형성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가 제시한 결과물들을 매개로 그의 세계와 만난다. 작품이 가리키는 도달점이 너무 코앞이라 그 자족에 안타까워하기도 하고, 때론 너무 아득해 그 호기에 고개를 젓기도 하지만, 예술가의 작업을 만난다는 것에는 실질적인 교환 행위 너머 서로의 상상세계에 개입한다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우리는 무엇에 분노하는가

예술의 가치를 ‘수익’에서 찾는 것을 거부하며 ‘치유’나 ‘위로’ 따위 효용을 얘기하거나, ‘무가치함’이라는 도발로 물음 자체를 문제 삼을 수도 있지만, 예술이 주는 가장 커다란 위안은 누군가가 아직 아무도 가보지 못한 곳으로 나아가기 위해 절망적으로 발을 내뻗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데 있다. 모든 예술가가 그런 것은 아니고 모두가 그래야 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어떤 이가 자신만의 도달점을 그리며 어떻게든 나아가려고 애쓰고 있다는 사실은 세계가 같은 가치만을 강요할 때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가치가 된다. 세계는 다양한 방식으로 예술가에게 신호를 보내고 있기에. 성공이라는 것을 측정하는 잣대가 확고하게 존재한다는 신호, 동시대가 주목해야 하는 가치가 존재한다는 신호, 그 가치가 어떠어떠한 것이라는 신호, 어떤 소재가 다른 소재보다 그 자체로 뛰어난 것이라는 신호, 예술은 공공의 요구에 봉사해야 하며 그 요구는 어떤 것이라는 신호. 이런 신호들은 매체를, 정치인의 입을, 공모나 지원의 선정이유를 담은 글 따위를 매개로 예술가의 신경계를 교란시킨다.

그러니 문화예술 공공기관장이 누가 되느냐 하는 것이 개개인 예술가들 스스로 행동에 나설 만큼 분노나 좌절을 불러일으키지 않는 이유가 있다면, 세상이 그런 기준으로 예술을 재단한다는 걸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관광자원으로서의 극장’, ‘해외진출 가능성’, ‘세계에 이름을 떨치는’, ‘뛰어난 수익을 올린’, ‘유명한 상을 수상한’……. 예술을 보는 세상의 잣대가 이미 그러하다는 것을 매 순간 체감하고 있는데, 그러한 성과에 더 집중하겠다는 인사 조치에 새삼 분노하는 것은 억지스러운 일이다. 대체로 예술가의 나날이란 것은, 자신의 예술이 그러한 인정을 받지 못한다는 좌절감과 그를 이겨내려는 반발심, 세상의 기준과 자신의 각오 사이를 오가며 겪는 낭패감 따위와 싸우며 자신의 전망을 지켜나가는 고단한 시간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러한 세상의 잣대에 저항하는 일 없이 공공기관장 인사에 유독 화가 난다면, 스스로 자신을 돌아볼 일이다. 자신이 정말로 무엇에 분노하는 것인지.

하나의 도달점을 가리키는, 가장 끔찍한 방식의 억압

그렇다고 해도 예술가들이 이 문제를 이미 우리 삶의 조건이 된 것이니 어쩔 수 없다며 자조한다든가, 기성세대 밥그릇 싸움으로 넘겨버리는 것은 그 행위의 안이함을 넘어서는 본질적인 문제가 있다. 그것은 그러한 일들이 예술가의 ‘도달점’을 한정 짓는 방식으로 예술가의 무의식에 개입한다는 점이다. 누구보다 자신의 작업이 인정받기를 원하는 예술가들이 세상이 보내는 성공의 신호를 외면하는 것은 각오가 필요한 일이고, 한번 각오를 세웠다 해서 끝나는 것도 아니다. 그렇기에 무엇이 뛰어난 것인가에 대한 일변도의 가치를 온갖 방향으로 강요하는 사회에서 예술가가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작업 세계를 펼쳐나갈 수 있다고 믿는 것은 무례한 일이다.

예술의 가능성은 시도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결과로서 예술을 강조하는 것은 시도를 제한하게 된다. 예술가들, 더욱이 이제 막 자신의 예술을 시작해 나가는 젊은 창작자들에게 그러한 개입은 아주 깊은 차원에서 일어난다. 자신의 무의식을 통제당한다는 걸 알지도 못한 채, 자신들이 도달해야 할 지점을 세속적인 성공 혹은 현재 주목받는 유행을 기준으로 그리게 되고, 그러한 기준에 저항한다 해도 최소한 동시대의 기준이니 무시할 순 없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한 ‘한계 지음’은 모두가 같은 곳을 ‘도달점’으로 놓고 달려가게 만들어 예술의 풍토를 척박하게 한다. 나는 이런 풍경에서 파멸의 징후를 본다.

예술이 수많은 가능성을 지녔다는 것이 그 세계가 뻗어나갈 가능성을 말하는 것이라면, 그 가능성을 하나로 수렴시키려는 시도는 세계를 절멸시키려는 것과 마찬가지다. 생각에 개입한다는 것, 이미 그런 세상이라는 상황에 빌붙어 예술의 ‘도달점’을 하나로 수렴시키고 있다는 것은, 그런 인사를 단행한 정치인도, 그 인사의 수혜자도 미처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그 성공의 기준을 의심하지 않는다면, 자신들이 하고 있는 일이 예술을 가장 끔찍한 방식으로 억압하고 있다는 걸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예술가 자신에 대한 예의의 문제

그렇다면 문화예술 공공기관장 인사가 잘못되었다며 다른 사람으로 교체하라고 요구하는 것이 예술가의 상상세계를 제한하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어떤 것이 더 좋은 것인지 재단하고 제시하는 것은 정치, 자본, 사회뿐만 아니라 기성 예술가들, 평론가들 또한 하고 있는 일인데.

늘 그래왔다, 늘 같은 조건이었다, 하면서 세계를 개척해 나가는 걸 오로지 예술가한테 달린 일로 생각하는 것은 이 시대에만 있는 일은 아니다. 나는 세상이나 타인의 기준을 잣대로 내 작업을 설계하지 않겠다는 각오로 예술가의 삶을 지속하고 있지만, 그것이 가능하려면 내가 그 기준에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 하지만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게 믿는다면, 그건 오히려 세상이 나에게 끼치는 영향을 놓친 채 홀로 자족하는 꼴이나 마찬가지다. 그런 정신 상태를 지니고 나아가는 길이 세계와 공유할 만한 가치를 남길 수 있을까.

우리에게 특정 가치를 강요하는 세계 그 자체와 싸울 순 없다 해도, 자신이 속한 세계 안에서 그런 경향을 대변하는 구체적인 사안에는 저항할 수 있다. 그것을 권력 다툼과 같은 지엽적인 문제로 간주해선 안 된다. 예술가의 정신세계 그 자체와 직결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시대에 아첨하지 않으려는 이들에게 그것은 자신의 전망을 지키는 일이며, 스스로 선택한 고난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다. 그 예의를 저버리고 동시대의 미학 지평선을 넓혀갈 수는 없다. 우리는 시도로서 말하고, 태도로서 자존하는 사람들이니까.

전성현

극작가. 사건의 세계와 사건 바깥의 세계를 통합하는 형식을 창안하여 세계의 총체성을 표현한다는 전망으로 작업해왔다. 최근에는 그 전망 다음을 고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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