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양구
지난 9월 2일 저녁, 밀양 상동면 고정 마을 반장님 댁 마당에서 개막한 ‘2026 서울변방연극제’ 개막작 우주마인드프로젝트의 <반도챗 에피소드 1 : 뭔 얘기를 하다 만담>김승언, 신문영 창작을 봤다. 공연을 보기 전 활동가의 안내를 받아 송전탑을 답사하고 마당에 들어서자 감나무에 감이 아직 단단하고, 청포도는 파랗게 익었다.
수백 년 된 마을에 극이 시작될 시간이 다가오자 ‘밀양 할매’들과 마을 사람들이 하나둘 ‘극장’으로 들어와 자리에 앉았다. 오랜 시간 송전탑 반대, 탈핵 운동에 헌신한 활동가들, 서울에서 찾아온 연극인들과 축제 관계자들까지 둘러앉자 마당은 금세 극장으로 변했다. 말 그대로 마당극이 시작된 셈이다.
연극은 두 배우가 살고있는 경기도 용인시에서 반도체 국가산업단지 조성으로 사라지게 될 어느 마을에 대한 이야기였다. 전국의 발전소에서 만들어진 고압 전기가 송전탑을 타고 흘러와 용인시 국가산단에서 매듭이 묶이듯, 이야기는 핵발전소를 반대하는 여러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두루 누비며 바느질하고 있었다.
마을을 깊은 침묵으로 이끈 마당극
연극을 보고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연극이란 장르가 사실은 관객이 누구인가로 규정되는 장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마당에 둘러앉아 멀리 용인시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자기 마을의 이야기로 느끼며 끝내 눈물을 훔치던 ‘밀양 할매’들. 객석에 둘러앉은 ‘밀양 할매’들의 존재감에 압도되어 공연 중 끝내 눈물을 참지 못한 배우들. 그 사이에 앉아서 공연과 에프터 토크까지 지켜보고 있자니, 그런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었던 것 같다.
20년 넘는 시간 동안 송전탑 건설을 막기 위해서 싸우고 송전이 시작되는 핵발전소까지 해체하기 위해 싸웠던 ‘밀양 할매’들과 마을 사람들이 반장님 댁으로 모여들었을 때, 그들은 관객이라기보다는 연극이 시작하기도 전에 무대에 등장한 주인공들처럼 느껴졌다. 그들은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를 굳이 다 듣지 않아도, 연극이 그들이 겪은 시간을 굳이 재현하지 않더라도, 단어 몇 개만으로 그것이 무엇에 대해 말하고 있는지 이미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연극을 본 지인들과 집으로 돌아오며, 연극이란 것이 의미와 가치가 있다면 이런 자리가 그중 하나가 분명하겠구나 하는 얘기를 나눴다. 작가 페테르 나더쉬가 말하는, 마을이 곧 이야기 공동체가 되고, ‘이곳에서의 삶이 개인적 체험이 아닌 (…) 깊은 침묵(고요한 조화로움)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느낌을 받는’, 하나의 큰 이야기가 흘러가는 자리가 아닐 수 없었다.1
마을 축제, ‘15분 연극제’
그날로부터 약 2주 전 인천 배다리 마을에서는 ‘제13회 15분 연극제’의 막이 올랐다. 배다리 마을은 1호선 전철 도원역과 동인천역 사이에 있는데 1880년대 개항기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 ‘오래된 마을’이다. 1883년 개항 이후 ‘개항장’ 일대에 있던 삶의 터전을 일본인들에게 넘겨준 조선인 노동자들이 건너와 새로운 삶을 일군 곳이고, 6.25 전쟁 시기에는 피난민들이 많이 몰려와 살았다.2 드라마 <도깨비>의 촬영지로 잘 알려진 한미서점을 비롯한 헌책방이 지금도 몇 곳 남아 있는데, 한국전쟁 직후에는 이동식 리어카 책방이 모여들며 시작된 헌책방이 50여 곳이나 되었고, 한때 소설가 박경리 선생도 이곳에서 헌책방을 운영했다고 한다.3 최근에는 개발과 마을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산업도로 건설로 파괴될 위기에 처했다가 마을 사람들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 지하 도로화가 진행되고 있는 마을이기도 하다.
‘제13회 15분 연극제’는 차북 카페에서 시작하여, 도원역 쪽에 가까운 창영어린이공원으로 갔다가 마지막 공연장인 인천문화양조장 스페이스빔의 1층과 2층에서 공연을 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한 작품이 끝날 때마다 관객들이 다음 공연 장소로 이동하여 다음 공연을 관람한 후 다시 이동해서 마지막 공연장인 스페이스빔까지 간다. 전체 커튼콜까지 약 3시간 가량이 진행됐다.
창영어린이공원에서 놀고 있던 아이들이 몰려드는 사람들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다가 자연스럽게 공연의 관객이 되는 풍경을 지켜본 사람이라면 ‘15분 연극제’가 무엇보다도 마을 축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권근영 예술감독을 비롯한 연극제 집행부가 10년 넘는 시간 동안 마을 사람들과 맺은 우호적 관계를 느끼는 것은 어렵지 않다. 4년 전 내가 처음 축제에 참여했을 때 어느 집 출입문을 배경으로 하고 싶다고 하자 흔쾌히 허락해 주던 기억이 난다. 마을의 공원과 길거리뿐만 아니라 카페나 서점처럼 현재 영업 중인 공간도 영업을 잠시 중단하고 공연 장소로 내주곤 한다.
이러한 일이 가능한 것은 축제에 우호적인 마을 사람들의 마음도 있겠지만, 축제 측에서 공연에 참여하는 팀이나 관객들에게 소정의 ‘쿠폰’을 나눠주어서 축제 기간 동안 일정한 소비를 유도하는 까닭도 있는 것 같다. 말하자면 공연장소가 별도 대관료를 받지 않더라도 공연 참여팀이나 관객들이 자연스럽게 일정 액수의 매상을 올려줄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공연팀이나 관객이 인근 카페나 식당에 머물며 ‘오래된 마을’을 거닐며 구경하고 공연까지 관람하고 돌아가게 마련이니 자연스럽게 지역 경제에 조금이나마 도움도 되고, 조용한 마을에 짧은 기간 동안 활기가 돈다.
‘15분 연극제’는 참여자들에게 15분이라는 시간적 제약 이외에 특정한 주제나 형식을 요구하지 않는다. 참여자들에 따라 배다리 마을의 장소성을 적극 활용하는 작품도 있고, 이를 특별히 의식하지 않는 작품도 많다. <김단추식 고전희곡읽기 1>김단추 작, 김솔 연출처럼 즉석에서 관객들을 참여시켜 시민과 함께 낭독하는 공연도 어색하지 않고, 실험소극장에서 할 법한 심미적인 작업을 하여도 이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 지켜보는 관객을 찾는 일이 어렵지 않다. 어느 쪽이든 정형화된 극장 공간에서 하는 작업이 아니다 보니, 참여자들은 아무래도 평소 극장 작업과는 다른 결의 작업을 시도하게 마련이다. 사실 내가 보기에 ‘15분 연극제’는 개별 작품이 공연이라기보다는 창영어린이공원에서부터 스페이스빔까지 공연팀과 관객이 함께 이동하는 과정 자체가 하나의 수행적 공연처럼 여겨지는 축제다.
정체성을 천천히 함께 만들어가는 축제
‘15분 연극제’는 비교적 경력이 있는 연극인부터 이제 막 커리어를 시작하는 연극인까지 어울려서 각 15분씩 공연한다는 특징도 있다. 제1회부터 참여했다는 연출가가 있는가 하면, 전회에 배우로 참여했던 배우 3명이 수어통역사가 되어 나타나서 사람들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연극제가 젊은 작업자들이 성장하는 공간이라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축제를 지탱하는 핵심 거점 공간이라고 할 수 있는 스페이스빔은 1920년대에 처음 문을 열 때는 술을 빚는 양조장이었지만 지금은 술의 신 디오니소스를 신봉하는 연극인들을 빚어내는 ‘문화양조장’이 된 셈이다.
사전 강연에서 스페이스빔 민운기 대표는 ‘지붕 없는 박물관’을 지향하는 배다리 마을에서 ‘15분 연극제’가 매년 지속적으로 개최되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고 하였다.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겨우 4년 정도 참여하면서 축제 때나 잠시 들렀다가 가는 사람으로서 짧은 생각일 수도 있겠지만, 내가 느낀 것은 마을의 정체성을 천천히 함께 만들어가는 축제의 가능성이었다. 개발에 맞서 ‘오래된 마을’을 지켜냈던 마을 사람들에게, 해마다 여름이 되면 외지에서도 사람들이 찾아오는 ‘15분 연극제’는 어느덧 또 하나의 배다리 마을 이야기 중 하나가 되어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밀양시 고정 마을도, 배다리 마을도 ‘오래된 마을’에는 투쟁이 끝난 뒤에도, 연극제가 끝난 뒤에도 여전히 마을에서 함께 살아가야만 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다. ‘서울변방연극제’는 밀양시 고정 마을에서 출발하여 홍성, 용인을 지나 서울로 올라오며 멀리 팔레스타인까지 이야기의 실타래를 풀어 놓는다. ‘15분 연극제’는 마을의 가장자리에서 한복판까지 천천히 함께 이동하며, 마을을 두 동강 내려던 산업도로를 지하로 지나가게 하기까지 배다리 마을이 겪은 이야기를 상상할 수 있게 해주었다. 개별 작품이 지닌 이야기도 있지만, 그 이야기들을 한땀 한땀 꿰매고, 이를 다시 마을의 이야기들과 덧대어 꿰맨 축제의 이야기도 있다. 두 축제는 참여 작품마다 가진 이야기와는 별개로 축제 자체가 ‘공동체를 구축하고 의미를 형성하는’4이야기라는 것을 느낄 수 있게 해 주었다. 축제는 연극과 마을을 잇고, 이야기와 사람들을 엮어 ‘우리’를 만들고 있었다.
이양구
유난히 더운 여름이 지나가고, 억새가 바람을 부르는 가을산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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