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근애
신유물론의 물질적 전회(material turn)는 인간중심주의를 탈피하고 주체와 객체의 이분법을 해체하여 비인간 사물의 행위자성에 주목하는 인식으로 점화되었다. 이러한 성찰이 연극적 지형으로 유입되면서, 무대 위 비인간은 더 이상 의미의 재현을 위해 복무하는 수동적 객체가 아니라 그 자체로 고유한 역량을 지닌 존재로 부각되었다. 이제 사물은 기호학적 오브제로 포획되지 않고 ‘생동하는 물질’제인 베넷,『생동하는 물질: 사물에 대한 정치생태학』(문성재 역, 현실문화, 2020)로서 관객의 지각 방식을 흔든다. 그리고 관객은 의미를 길어 올리는 해석자가 아니라 일회적이고 우연적인 감응의 수행자로 극장에 존재한다.
<메모리를 위한 라이트 로딩 프로세스>김수려 작, 최현비 연출, 서울연극창작센터 서울씨어터 101, 2026.3.28.~4.5.는 극장의 물질성을 이루는 ‘빛’과 ‘소리’에 주목하고 있다는 점에서, 또 콘솔로 대체되는 조명감독의 일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신유물론을 비롯한 포스트휴먼 담론과 접속하는 면이 넓은 연극이다. 그러나 인간의 형상을 한 콘솔을 맞닥뜨린 조명감독의 당혹감 ―“당신은 너무나 인간이잖아요.”― 은 사물이 사물 그 자체일 수 없음을, 끝내 인간의 언어로 명명되어야 그 행위성을 일부 감지할 수 있음을 드러낸다. 그럼에도 이 연극은 조명 콘솔의 메모리와 인간의 기억을 병치시킴으로써 인간중심의 인식이 지닌 허약함과 불완전성을 직면한다. 기술적 메모리는 데이터를 저장하지만, 인간의 기억에는 ‘마음’이라는 상태가 함께 메모리되기 때문이다. 그 마음은 ‘알 수 없음’이라는 변수가 아니라 그때와 달라진 지금, 그리고 변화할 수밖에 없는 미래를 당겨온 시간성의 문제이기도 하다.
감각을 통한 기억의 재배치
관객은 극장에 들어가기 전에 받은 이어폰으로 콘솔이유라 분의 음성을 듣는다. 그 목소리는 속삭임처럼 한쪽 귀를 파고든다. 다른 쪽 귀가 극장을 향해 열려 있는 한, 이 청취는 내밀하면서도 개방적이다. ‘깊은 동굴’ 같은 어두운 극장 안에서 관객은 조명이 켜지기를, 무대가 밝아지고 객석이 어둠 속에 잠기기를, 어서 연극이 시작되기를 기다린다. 그러나 관객은 더는 숨겨지는 존재가 아니다. 곁에 있는 다른 관객을 의식하며 공연에 참여하고 극장 바깥에 두고 온 현실이 무대 위를 넘나드는 것을 목격하기 때문이다. 스포트라이트가 비치는 곳이 보이는 세계의 전부가 아니듯, 조명은 수시로 바뀌고 그림자가 무시로 드나든다.
무대에서 빛은 사물을 가시화하는 도구이기도 하지만, 그 자체로 극장의 온도를 바꾸고 공기의 밀도를 재편하는 물리적인 작용이다. 조명감독은 마치 마술사처럼 이 작용에 관여하는 존재였다. 지금 그 조명감독윤상화 분이 무대 한가운데 우두커니 서 있다. 그는 30년을 근무한 극장에 마지막 출근을 한 참이다. 곧 메모리가 필요 없는 새로운 콘솔이 도착할 것이고 그는 과거를 떠나보내고 극장 문을 나서야 한다.
연극은 “조명이 바뀝니다. 장면이 바뀝니다.”라는 말을 신호로 조명감독의 기억을 재배치한다. 이 지시는 무대 상태를 물리적으로 바꾸는 기술적 신호(cue)이면서 ‘장면화된 기억’이 상기되는 방식을 은유적으로 드러낸다. 무의지적인 기억은 떠올리는 것이 아니라 닥쳐오는 것이다. 능동적이며 의도적인 회상과 달리 기억은 몸을 통과하며 요동친다. 이것은 일방적인 침입이 아니라 얽힘(entanglement) Karen Barad,『Meeting the Universe Halfway』(Duke Uni. Press, 2007)이며, 몸은 기억의 물질적 흔적이다. 기억은 삭제, 과장, 왜곡되며 몸에 스미고 냄새, 소리, 온도, 기분과 뒤섞인다. 게다가 몸은 기억뿐만 아니라 노동으로 굳어진 근육, 심장박동, 호흡, 흉터, 감각이 분리되지 않은 채 얽혀 있는 상태다. 이 연극이 심장박동 소리로 시작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자기가 콘솔이라고 주장하는 인간이 조명감독 앞에 서 있다. 그는 조명감독의 메모리를 동기화할 생각이라고 말하며 조명감독의 기억을 함부로 불러낸다. 조명이 공간을 만들어내면 그가 조명회사 사장과, 연출가와, 선생님과, 아내와, 혹은 딸과 함께 있었던 시간들이 차례차례 장면화된다. 조명감독이 기억하는 일들은 파편적이지만, 그가 30년 동안 겪었을 일 중에 어떤 사건이 메모리되었을지 짐작 가능하다. 극장에 처음 발을 들인 순간, 연출가와 나눈 한탄, 딸과의 다툼, 배우였던 아내와의 일들, 그리고 선생님의 장례식. 그러나 사건의 강렬도는 제대로 된 설명이 아니라 말할 수 없음, 혹은 ‘알 수 없음’의 공백을 거느린다.
‘알 수 없음’의 공백과 메타의 문턱
새로운 콘솔은 0과 1 그리고 ‘알 수 없음’을 옵션으로 가지고 있다고 말하며 알 수 없다는 가능성이 더 많은 장면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알 수 없음’이라는 변수가 극장을 생동하게 할 수는 있어도, 인간에게 ‘알 수 없음’은 어디까지나 사후적이다. 조명감독은 혼란스럽다. ‘알 수 없음’은 정말 선택할 수 있는 부호였을까.
<메모리를 위한 라이트 로딩 프로세스>는 쓸모를 잃은 인간의 노동과 인간을 대체하는 AI 기술을 메타적으로 다룬다. 콘솔이 시뮬레이션을 위해 인간의 기억을 데이터로 바꿀 때, 정작 조명감독에게 소환되는 기억이 고통의 잔여와 잉여라는 점에서 그렇다. AI는 끝내 인간의 고통을 데이터화 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몸의 일이기 때문이다. 조명감독은 콘솔의 작업에 저항하며 극장을 나가려고 하지만 나갈 수 없다. 콘솔은 “이미 당신은 당신이 연기하고 있는 인물이니까. 이미 당신은 당신의 삶 속에 있으니까. 이미 이곳이 당신의 삶이니까.”라는 대사로 메타성을 강화한다. 그러나 이 장면에서 윤상화 배우가 “나갈 수가 없어.”라는 대사를 “나, 갈 수가 없어.”로 발화할 때의 이격이 더 많은 것을 말해준다. 자막으로 영사되는 문자는 배우의 몸으로 와서 주체의 마음과 의지가 반영된 말로 재생성된다. 관객은 문자언어와 몸언어 사이를 유동한다.
이 연극의 메타성을 지지하는 다른 한 축은 고전 희곡을 인용하고 배치하는 방식으로 드러난다. 조명감독은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마지막 순간’을 기다리는 장면을 통해 극장과의 안녕을 준비하고, 과거의 사건을 <리어왕>의 대사를 통해 떠올리며, 딸과의 언쟁 끝에 <안티고네>와 <오이디푸스 왕>을, 그리고 <바냐 아저씨>를 만난다. 이 장면들은 기다림<고도를 기다리며>과 견딤<오이디푸스 왕>, <리어왕>, 결행<안티고네>, 그럼에도 지속되는 삶<바냐 아저씨>으로 연결되며 조명감독의 파편화된 기억을 매끄럽게 의미화시킨다. 그러나 여전히 이 연극이 다 말하지 못한 것, 혹은 아직은 말할 수 없는 일에 대해서 언급하려면 메타성의 문턱을 훌쩍 뛰어넘어 가장자리로 도약해야만 한다.
로딩의 시간, 이행의 흔들림
그 일이 무엇인지 제대로 말하지 않지만, “사람이 사람을 알 수 있니? 타인을 알 수 있니? 자신을 알 수 있니?”하고 물었던 선생님과의 일이 아내에게, 딸에게 그리고 조명감독에게 영향을 미쳤음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아내는 배우를 그만두었고 딸은 아빠, 엄마와는 다른 방식으로 연극을 만들겠다고 소리를 높인다. 기억 속에서, 조명감독은 그 일을 제대로 직면하지 못한다. “우리가 그냥 넘어갈 수는 없”다고 말하는 아내에게, 누군가를 상처 준 사람이 만든 연극을 인정할 수 없다는 딸에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중첩된 기억 속을 부유하는 조명감독의 로딩(loading) 상태는 다음 세대로, 다른 연극으로 이행하지 못하는 마음의 파열과 부하(負荷)를 드러낸다. 새로운 기술로 대체되는 미래는 거스를 수 없을 것이고 해소되지 못한 과거는 돌이킬 수 없다. 그는 다르게 살기를 택하지 않고 기억을 여러 차례 되살며 아직 결과값이 나오지 않은 로딩 상태에 오래도록 머물러 있을 것 같다. 그러나 다른 연극을 하겠다는 딸의 선언과도 같은 다짐이 조명감독의 그림자를 잡아챈다.
딸의 이야기는 인간을 대체하는 AI 기술과 예술-노동자의 회한이라는 표면을 긁는 노이즈다. 조명감독의 기억과 함께 소환된 고전 희곡 속 장면들은 딸이 직면한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현실을 받아내지 못한다. 연극은 책임의 공백과 유예된 선택을 섣불리 판단하지 않고, 조명감독의 서사로 수렴되지 않는 딸의 목소리를 남겨 놓는다. 딸의 미래는 고통스러울 것이지만, 조명감독이 겪은 고통과는 다를 것이다. 다른 고통을 겪겠다는, 불안하고 흔들리면서 다음 세계로 가겠다는 목소리는 풍크툼(punctum)롤랑 바르트,『밝은 방』(김웅권 역, 동문선, 2006)으로 기존 연극의 의미 덩어리를 뚫고 나온다.
연극으로 인해 상처받았으나 끝내 연극을 떠나지 않으려는 자들은 오랫동안 연극이 밀어낸 존재들을 응시하며 아직 읽어내지 못한 비인간의 자리를 더듬는다. 그들과 함께 다른 사랑의 방식을 만들어내려는 까닭이다. 이 ‘다른 연극’들은 인간이 독점해온 무대의 권위와 권력을 성찰하며, 불안정하게 진동하는 감각으로 미래를 상상한다. 대상을 장악하지 않고 실패를 수행하는 연극들이 있다. 그 실천과 고투 곁에서 ‘흐릿한 현존’이 왜 매끄러운 ‘재현’보다 아름다운지 더 생각해 볼 일이다.
양근애
예술의 미학적/정치적 수행성에 관심을 두고, 극장에 머물지 않으려는 연극의 안간힘을 상상하고 기록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