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선‧우연‧홍은지
편집자 주
ACTiO가 1주년을 맞이하였습니다. 지난 1년을 평가하고 새로운 1년을 준비하는 마음으로 [창간 1주년 특집 : 연속 기획]을 준비했습니다. 첫 기사는 [ACTiO 메타 비평]입니다. 독자이자 필자인 박지선, 우연, 홍은지 3인이 ACTiO의 지난 1년을 날카롭게 평가해 주셨습니다. 총 2회에 걸쳐 발행되며 이번이 2회차입니다.
ACTiO를 중심으로 ‘ 예술의 공공성’ 문제를 논해보는 건 어떨까요?
박지선
공공성에 대한 이야기를 좀 더 해보아야 할 것 같아요. 예술 활동을 하나의 노동 활동으로 보기 시작하면서부터 ‘열정 페이’에 대한 문제의식도 생겼고, 예전과 동일한 방식으로 일하지 않는 것이 예술계에서 굉장히 중요한 화두가 되기도 했고요. 그러다 보니 우리가 어떤 일을 도모하거나 시작할 때, 서로 그 일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어떻게 마련하고 주고받을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생태계 안에 굉장히 강하게 자리 잡은 것 같아요. 그리고 지난 10년을 돌아보면 공공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거대해지고 관료화되고 체계화되면서 극장, 축제, 매체까지 모든 것이 공공 안으로 포섭됐잖아요. 그러다 보니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그 안에서 작업하는 방식에 너무 익숙해진 것 같아요. 제도 밖에서 무엇을 시작하는 것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방법을 모르겠다는 감각 같은 것들이 우리 모두가 공통적으로 겪었던 어려움이 아니었나 싶어요.
그런 의미에서 ACTiO는 창간할 때 지원에 의존하지 않겠다는 취지를 분명히 했잖아요. 편집위원들은 위계 없이 평등하고 민주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협·단체를 구성하지 않으며, 지원금도 바라지 않겠다는 이야기였죠. 그 취지에 공감하는 필자들과 함께 ACTiO를 꾸려나가겠다는 제안이었고요. 그래서 이 매체는 다른 기관지와 달리 원고를 쓰고 보상을 받는 계약 관계가 아니라, 매체의 방향성에 동의하고 함께 만들어 가는 수평적인 동료 관계를 제안했던 것 같아요. 필자들도 원고료 문제가 아니라, 이 방향에 동의하기 때문에 참여하는 것이고, 독자들도 그 점에 공감하면서 읽고 있는 것 같고요. ‘지원금이 없어서 못 한다’는 사고를 넘어서는 어떤 태도와 행동을 만들어 냈다는 점에서 저는 ACTiO가 공공성 논의에서도 굉장히 중요한 선례였다고 생각해요.
홍은지
조금 덧붙여 보자면, 왜 민간의 자발적인 예술 커뮤니티들이 지금처럼 위축되었는가? 라는 질문이 있을 것 같아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예술 노동에 대한 인식 변화와 함께 행정기관, 즉 공공기관에 대한 공적 자원 의존도가 높아진 것도 한 축일 것 같고요. ‘공공’이라는 명칭 자체가 사실상 행정기관을 의미하게 된 것도 문제인 것 같아요. 공공성은 원래 민간에서도 자발적으로 만들어왔던 영역인데 어느 순간 행정기관이 공공성을 독점하고 대표하는 것처럼 불리게 되었죠. 그러다 보니 민간에서 공공성을 이야기하면 누군가가 부담을 져야 하거나 대표성을 의심받는 분위기가 생긴 것 같고요. 그런 맥락에서 ACTiO가 어떤 역할을 자임하고 있는지, 어떤 방향을 제시하고 있는지를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아마 제 질문은 공공성이라는 이야기에서 출발해서 왜 ACTiO가 이 시점에 등장했는가에 대한 궁금증과 맞물려 있었던 것 같아요.
박지선
제가 말하는 공공 영역은 기본적으로 공공기관이 주도하는 영역을 의미하는 거였어요. 공공성 이야기는 너무 커질 수 있어서 조심스럽긴 한데 우리가 일하는 영역 안에서는 공공성, 공공기관, 민간이 개념적으로 분리되어 있잖아요. ACTiO는 공공기관이 직접 운영하는 매체도 아니고, 공공 지원을 받아 운영되는 매체도 아닌, 공공의 지원 없이 독립적으로 운영되는 매체라는 점에서 지금 시점에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물론 공공 지원을 받지 않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가에 대해서는, 저는 꼭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해요. 공공기금은 예술이 지속되기 위한 중요한 자원이니까요. 다만 현재 블랙리스트가 표면적으로는 사라진 것처럼 보이지만 모든 것이 공공기관 안으로 포섭되면서 보이지 않는 검열이 작동하고 있는 구조이기 때문에 공공으로부터 독립된 영역의 가능성을 실험하는 시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런 의미에서 ACTiO는 예술 생태계 전체를 바꾸지는 못하더라도 중요한 시작점과 방법론을 보여주고 있다고 느껴요.
우연
사실 지난 10년 동안 있었던 예술 검열, 공공기관의 독립성과 자율성 논의, 청년 예술에 대한 정의, 그리고 공공 지원이 확장되면서 다변화된 공공성에 대한 논의까지, 이런 모든 예술 현장의 흐름들이 ACTiO 창간에 압축적으로 반영돼 있다고 생각해요. ACTiO의 발간 시점이 이런 논의들이 점화된 이후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시점이라는 점에서 무게감이 실리는 것 같고요. 형식적으로는 몇몇 연극 평론가들이 편집위원을 맡아 지난 1년을 이끌어왔지만, 그사이 연극계 각 분야의 적지 않은 사람들이 여기에 동참해 주었잖아요. 그러니 이제는 이 취지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어떤 마음으로 이 웹진을 바라보고 있는지, 실제로 이들이 느끼는 주체적인 감각을 공유하고 점검해야 할 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홍은지
말씀하신 것처럼 독립적인 사례를 계속 만들어 낸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것 같아요. 중요한 건 공적 자금을 받느냐 받지 않느냐보다, ‘지금 이 시점에 공공성이 어떻게 지속 가능할 것인가’라는 질문이잖아요. 지난 10년 동안은 공공기관이 공공성을 담보해 줄 거라는 기대가 있었는데 그 기대가 너무 쉽게 무너지는 경험을 반복적으로 해왔잖아요. ‘그렇다면 예술적 공공성이 어디에서 어떻게 담보될 수 있을지’ 고민하는 흐름 속에서 ACTiO의 창간이 있었던 게 아닐까 싶어요. 비평뿐 아니라 창작 영역에서도 이런 고민들이 압축적으로 담겨 있는 것 같고요. 그런데 공공성이라는 말 자체가 토론 안에서는 어느 정도 합의된 의미로 쓰이지만 문자화되면 오해를 낳기 쉬운 말인 것 같아요. 정리되지 않은 상태로 쓰이면 혼란을 줄 수도 있어서 이 용어를 쓰는 게 괜찮을지 고민되기도 합니다. 덧붙이자면 공공성은 각 커뮤니티마다 합의된 가치일 수도 있잖아요. 서로 다른 커뮤니티가 지향하는 공공성이 다를 수 있고요. 그래서 저는 특정 커뮤니티가 지향하는 공공성을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ACTiO가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여기서 만들어 낸 공공성이 보편타당하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그 지점을 어떻게 오해 없이 전달할 수 있을지는 아직 잘 모르겠고요.
지난 일년 동안 ACTiO에서 누락된 주제는 무엇일까요? 이런 글이 필요하다고, 이런 주제의 글을 만나고 싶다고, ACTiO에 제안하고 싶은 의견이 있나요? 꼬리에 꼬리를 무는 글이 필요하다면 어떤 글일까요? 물론 ACTiO에게 ‘나라를 구해라’, ‘미래를 구해라’, ‘지구를 구해라’ 라고, 무작정 요구할 수는 없다는 것을 알고는 있습니다만.
박지선
개인적으로는 기후, 환경, 생태 이런 주제들을 가지고 작업하고 공부하다 보니 이 주제가 좀 더 다뤄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단순히 한 작품을 리뷰하는 방식보다는, 특히 코로나 이후 지난 4~5년 동안 예술가들이 기후를 어떻게 다뤄 왔는지에 대한 맥락을 조금 더 길게 바라보는 글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여전히 기후나 환경 문제를 다루는 작업들을 굉장히 좁은 시각으로 바라보는 경우가 있는 것 같아요. 1.5도 온도 상승 이야기만 해야 기후 이야기를 하는 것이라 생각하는 경우도 있고요. 이미 동물권, 포스트휴머니즘 관점에서 기후를 다루는 작업들도 많고, 창작 방법론에 대한 고민도 많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그런 흐름을 평론이나 비평의 관점에서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에 대한 글이 더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죠. 그런 글을 쓰려면 사실 끈질기게 붙잡고 공부해야 하는 주제잖아요. 그래서 누군가가 기후를 하나의 장기적인 주제로 삼아서 계속 이어서 써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었던 것 같아요. 21세기도 4분의 1이나 지났잖아요.
우연
그런 글쓰기도 꼭 완성된, 전형화된 평론 형식이 아니어도 좋을 것 같네요. 평론가들과 이론가들은 제대로 써야 한다는 부담 때문에 시간이 오래 걸리기도 하잖아요. 차라리 학제 간 전문가랑 같이 손잡고 공부하면서 나누는 대화를 과정 자체로 공개하는 방식도 가능하지 않을까, 한 주제에 대해 문답 이어달리기와 같은 방식의 글도 가능하지 않을까 싶어요. 이 매체가 ‘완결된 글만 전시하는 곳’이 아니라는 전제가 허용된다면 준비된 결과를 보여주는 게 아니라 탐색하고 질문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글도 충분히 의미가 있을 것 같고요. 지금 우리가 이렇게 셋이 산만하게 이야기 나누는 것처럼 기후라는 주제를 두고 연구자와 평론가가 함께 대화하면서 써 내려가는 글도 의미 있게 공유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물론 타 분야의 연구자들도 ACTiO의 취지에 동의하고 독자들을 흥미로워해 주셔야 가능한 일이겠네요.
박지선
그런 방식이라면 저도 좋을 것 같아요. 기후 문제뿐 아니라, 디지털 시대와 연극에 대한 이야기들도 그렇게 풀어갈 수 있을 것 같고요. AI나 기술 환경은 이미 극작, 비평, 창작 전반에 굉장히 큰 영향을 주고 있는데 그 영향에 대해 이론이 아니라 실제 예술가들의 작업을 통해 어떻게 다뤄지고 있는지를 이야기하는 글들도 학제 간 방식으로 가볍게 풀어갈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우연
이야기를 하다 보니 기술이나 SF, 미래 연극과 같은, 미래형 주제는 많이 다루어지지 않은 것 같아요. 연극의 미래로 향하는, 희곡 텍스트의 미래를 예견하는 논의도 많지 않고요.
홍은지
솔직히 연극이라는 장르 자체가 굉장히 고색창연한 장르이기도 하잖아요. 특히 한국 연극은 극장 예술, 그것도 드라마 기반의 연극을 연극의 중심으로 전제하는 무의식적인 합의 같은 게 있어요. ACTiO 역시 지금까지는 텍스트 드라마 기반의 극장 예술을 중심으로 다뤄왔던 것도 사실이고요. 그런데 SF나 비인간, 동물권 같은 논의는 이미 젊은 창작자들 사이에서는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 되어가고 있는데 여전히 이윤택, 손진책, 차범석 같은 이름들이 계속 반복되는 걸 보면 시대감각과의 간극이 느껴지기도 해요. 연극이 가진 제작 구조의 보수성, 긴 제작 기간, 집단 창작이라는 특성 때문에 급진적인 전환이 어렵다는 점은 이해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 시점에서 연극을 어떻게 정의하고 무엇을 비평의 대상으로 삼을 것인지는 한 번쯤 점검해야 할 시기인 것 같아요. 이게 연극이 가진 딜레마이기도 하고 비평가들이 늘 고민해 왔던 지점이기도 하죠. 연극 제작 구조 자체가 보수적이고, 사람을 설득하는 과정이 길고, 인간이라는 매체를 통해 구현되다 보니 담론이 충분히 내재화되지 않으면 표현에 한계가 생길 수밖에 없는 구조라는 것도 사실이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휴머니즘을 어떻게 유지하면서도 지금의 시대감각과 만날 것인지, AI가 장편 소설을 하루에 수없이 만들어 내는 시대에 연극이 무엇을 붙잡고 가야 하는지, 이제 정말 이야기해야 할 때가 아닌가 싶어요.
박지선
결국 우리가 ACTiO에 기대하는 건 기존의 평론지 같은 리뷰 웹진이 아니라 조금 다른 방식의 리뷰, 다른 형식의 대화와 기획인 것 같아요. 기후, 기술, 인종, 그리고 앞으로 만날 새로운 관객들에 대한 이야기까지, 모든 걸 다 담을 수는 없겠지만 지금 시점에서 미래를 조금 앞당겨 바라보는 ‘미리 보기’ 같은 세션이 하나쯤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우연
[다시 보기, 다시 읽기] 밑에 [미리 보기] 세션이 신설되어야겠네요.
홍은지
모든 걸 할 수는 없지만, 연극이라는 장르가 가상과 현실이 뒤섞인 이 시대의 감각과 어떻게 만날 수 있을지에 대한 질문을 조금 더 첨예하게 던질 수 있는 공간은 분명히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ACTiO를 핑계로, 비평의 위기에 대해 우리 한번 떠들어 볼까요?
우연
비평의 위기에 대해서 거칠게 한번 이야기해 볼까요? 여전히 비평은 필요한가?
홍은지
저는 어떤 형태이든 ‘외치는 것’으로 끝나는 활동은 없다고 생각해요. 어떤 식으로든 피드백이 있어야죠. 그런데 지금은 지적 생산으로서의 비평보다는 관객 수나 수익처럼 ‘얼마나 팔렸는가’로 창작의 결과를 단순히 판단해버리는 경향이 강하잖아요. 그러다 보니 비평의 권위나 영향력이 예전만 못한 것 같아요. 하지만 여전히 비평이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는 생각해 볼 문제예요. 비평 없이 한 시기가 간다는 건 결국 ‘그 흐름에 나를 맡기겠다’, 혹은 ‘그냥 돈을 벌겠다’로 귀결되지 않을까요? 나의 존재 이유, 의미, 가치 같은 것들은 누군가가 그것을 언어로 명명해줄 때 비로소 드러나죠. 그런 점에서 비평이 사라진다면 연극이 존재하기도 쉽지 않을 것 같아요.
박지선
비평은 필요하죠. 다만 지금 시대에는 ‘비평가가 어떤 비평을 해야 하는가’를 먼저 물어야 할 것 같아요. 비평가도 예술 생태계를 구성하는 중요한 구성원 중 하나잖아요.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는 비평가와 연구자가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 것 같아요. 서구의 경우 비평가들은 주로 저널리즘을 기반으로 활동하며 동시대 예술을 비평하고, 연구자들은 학문적인 틀 안에서 그 흐름을 정리하거나 새로운 이론을 만들어내죠. 반면 한국에서는 두 역할이 혼재되어 있는 듯해요. 비평가이면서 동시에 연구자의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사실 생태계의 흐름을 만들고 다음을 설계하거나 개척하는 건 창작자들의 몫이잖아요. 그래서 한국의 비평가는 단순히 작품을 리뷰하는 데 그칠 게 아니라 지금 이 시대에 어떤 예술가들이 있고, 그들이 만들어내는 흐름이 어떤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는지를 읽어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우연
요즘은 작품이 정말 다양해졌잖아요. 여러 가치가 동시에 다뤄지고 그 우선순위를 매기는 기준도 사람마다 다 달라요. 교차성의 문제도 중요하지만 지금은 너무 많은 가치들이 한꺼번에 등장해서 그 안에서 위계나 우선순위를 정하기가 거의 불가능하죠. 그 복잡한 흐름을 하나의 도식이나 맵으로 보여주기도 어렵고요. 그러다 보니 아주 매니악한 사이트나 소규모 창작 생태계들이 각자 발달하는 것 같아요.
예전에는 분명히 위계나 가치의 서열이 있었고, 평론이 사회적 요구나 수준을 따져가며 작품을 선별할 수도 있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그런 시대가 아니잖아요. 평론가들도 이 다원적이고 동시다발적인 가치들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에 대한 새로운 방법을 찾아야 하는데, 여전히 기존의 방식에 머물다 보니 깊이가 얕아졌다고 할까요. ‘평평해진다’는 게 바로 그런 의미일 것 같아요. 결국 창작자 입장에서도 비평이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는 상황이죠. 여러 의견을 들어보려 해도, 수많은 작품 사이에 몇 안 되는 평론가들은 흩어져 있고, 그래서 비평의 기능 자체가 약해질 수밖에 없는 구조예요. 이제는 비평이 혼자 고군분투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에요. 이 다변화된 환경을 기존의 ‘비평’이라는 그릇만으로는 담아내기 어렵다는 게 지금의 현실이죠.
홍은지
공연예술, 특히 연극은 다른 장르와 달리 그 특수성이 ‘휘발성’에 있잖아요. 한 번 하고 나면 사라지죠. 시각예술처럼 작품이 오래 남아서 학계나 연구, 아카이빙으로 이어질 수 있는 구조가 아니라 그 시간에 함께했던 사람들의 기억 속에만 남고 금세 사라져 버리니까요. 그래서 비평가가 단순한 평론가가 아니라 연구자이자 기록자이자 증언자,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는 지식인으로서 피드백을 주는 존재가 되어야 하는데 지금은 그 여러 역할이 한 몸에 겹쳐져 있는 상황 같아요. 더 이상 예전처럼 한 명의 제왕적 연출가를 중심으로 그 사람의 작품 세계를 따라가거나 그 연대기를 기준으로 공연계를 바라볼 수도 없죠. 말씀하신 것처럼 지금은 세계관 자체가 너무 다변화돼 있고 비평가들은 그 흐름을 다 따라가야만 해요. 그런데 물리적으로 그게 가능할까요? 공연은 뜨문뜨문 본다고 되는 게 아니고, 전체적인 맥락을 본 뒤에야 비로소 의미가 읽히는데 그걸 다 매핑해낼 수 있는 비평가는 사실상 존재하기 어렵죠.
그렇다면 최소한 ‘나는 이런 주제에 대해 연구하고 비평하겠다’라는 식의 자기 관점이나 비평의 흔적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그런 일관된 시도를 찾기 힘든 것도 사실이에요. 예를 들어 제왕적 연출가의 시대가 끝나고 나서 등장한 여성주의적 흐름에 대해 꾸준히 추적한다든가, 어떤 주제적 연결성을 기반으로 연구와 비평을 병행하는 시도 말이에요. 물론 우리가 아는 몇몇 선생님들의 사례는 있지만 그런 흐름이 전반적이라고 보긴 어렵죠.
또 하나는 다학제적 관점이에요. 요즘 공연은 더 이상 고전의 무대화로 끝나지 않고 우리의 삶과 생존 같은 여러 주제들이 교차되잖아요. 그렇다면 그런 교차성과 복합성을 이론적 토대 위에서 설명해주고 지금의 현상을 분석해줄 수 있는 비평의 시각이 과연 존재하느냐, 저는 그게 의문이에요.
우연
저는 총론화된 매핑을 기대하는 게 아니라, 비평가가 제시하는 시각의 연결, 연결과 연결 안에서 하나의 세계가 형성되는 것이라 보거든요. 그러니까 하나의 작품을 본 뒤 새로운 의제로의 점핑, 튐, 확장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홍은지
네, 그렇게 비평이 도약대가 된다면 정말 좋겠어요. 그런데 지금까지 제가 경험했던 비평, 그러니까 지면화된 비평의 대부분은 말씀드렸듯이 너무 결과 중심이에요. 이미 발표된 작품으로서의 공연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죠. 물론 그 안에서 만들어지는 연대기적 역사나 인문학적 접근도 중요하긴 해요. 하지만 지금의 비평이 여전히 그런 선형적인 세계관 안에서 예술을 설명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듭니다. 그래서 저는 비평가가 창작자들에게 긍정적인 피드백을 주고, 서로 의견을 주고받으면서 예술 생태계 안에서 함께 작동할 수 있는 방식, 그 역할을 함께 고민해보고 싶어요.
우연
저는 완성 작품이든 과정이든, 결국 작가가 ‘이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는가’를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어떤 작품은 상황만 보일 뿐, 그 사람의 세계가 안 보일 때가 있어요. 작가가 세상을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는지 전혀 감이 안 올 때도 있죠. 그런데 어느 날, 한 작품이 비평이 던져준 시선과 절묘하게 겹치면서 전혀 새로운 세계가 열릴 때가 있잖아요. 그럴 때 정말 가슴이 뛰어요. 저는 바로 그 지점이 비평의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창작이 비평을 만났을 때 또 다른 방식으로 확장되고 낯선 세계로 이어지는 것. 비평이란 결국 그런 기능을 하는 거죠. 그래서 앞으로의 비평은 훨씬 다학제적일 수밖에 없다고 봐요. 완전히 다른 인문학적 시각을 끌어올 수도 있고, 아주 개인적인 에피소드를 얹을 수도 있겠죠. 그게 작품을 낯설게 만들고, 우리의 시야를 확장시킬 수 있다면 비평은 분명히 유의미하다고 생각해요. 창작자라면 누구나 그런 비평을 만나고 싶을 거예요.
홍은지
예술이 체계잖아요. 체계의 언어잖아요. 근데 창작의 체계는 상징과 은유와 감각의 체계잖아요. 감각의 제국이잖아요. 물론 텍스트가 있다 해도 그것들이 요소가 돼서 감각적으로 만나 하나의 세계를 만드는, 감각의 체계가 쌓아 올린 일종의 체계라면 비평은 언어의 체계잖아요, 명백하게. 이들은 만나기도 하고 좀 굉장히 다른 체계이기도 하다고 저는 생각해요. 언어의 체계는 언어가 가지는 또 상징의 체계가 있지 않습니까? 근데 이제 이 감각의 체계를 언어가 포획해서 이것을 규정해 주기도 하고 또 말씀하신 대로 세계를 확장해 주기도 하고 감각의 체계가 발견하지 못한 어떤 세계를 이제 벽돌로 잘 만들어서 설명을 해주거나 이해를 해주거나 확장을 해주거나 이런 역할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을 하거든요. 왜냐하면 두 개의 체계는 너무 다른 체계이기 때문에 그런데 이 체계가 저 체계에 도움이 되는가, 만났을 때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살펴봐야죠. 근데 말씀하신 대로 두 체계가 만나서 뭔가 이렇게 붐 하는 순간 우리는 ‘와!’ 하게 되는 지점이 분명히 있거든요. 창작자들도 ‘내가 이런 걸 만들었어? 난 몰랐는데?’ 하는 순간요.
박지선
연극은 조금 덜한데 무용 같은 경우는 그렇죠. 언어, 그러니까 명확한 텍스트 없이 작업하는 창작자들을 몇 년 지켜보다 보면 그 사람이 보여요. 왜 그런 작업을 하는지, 어떤 세계를 품고 있는지 감이 오거든요. 그런데 정작 본인은 그걸 잘 설명하지 못해요. 이런 부분을 평론가들이 짚어주면 좋겠지만 잘 안 하죠. 왜냐하면 평론가들이 예술가들과 많은 대화를 안 하거든요. 늘 그게 궁금했어요. ‘평론가들은 왜 예술가들과 대화하지 않을까?’ 대화하지 않으니 결국 그 사람의 작업을 인상 비평으로만 쓰거나, 자신이 가진 이론적 틀 안에서 해석할 뿐이에요. 그렇게 되면 그 예술가의 세계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죠. 물론 이해는 해요. 비평가가 작품 창작 과정을 속속들이 알거나 예술가와의 거리가 너무 없으면 글을 쓰는 데 방해가 될 수도 있겠죠.
우연
지금 우리 대화가 막 던지는 분위기 같아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드네요. ‘리터러시가 참 중요한 시대구나!’ 작품을 말과 글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하는 시대가 온 거죠. 예전엔 그렇게까지 중요하지 않았는데, 지금은 지원금 자료부터 각종 증빙 서류까지 창작자가 직접 논리적으로 써야 하는 일이 너무 많아요. 결국 행정과 관료 시스템 안에서 작품이 유통되고, 예술이 자본 안에 포섭되어버린 거죠. 그러니 창작에 필요한 자본을 얻기 위해서라도 리터러시가 필요한 시대가 된 거예요. 아마 그래서 드라마터그가 이렇게 성행하는 걸까요? 창작 과정에서도 논리가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잖아요. 한동안 현대예술에서는 ‘개념’이 앞서가면서 말이 작품보다 앞에 서는 경우가 많았죠. 이제 공연예술도 그런 흐름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않은 것 같아요. 그러다 보면 리터러시는 아주 훌륭한데, 정작 그것에 상응하는 창작의 힘은 부족한 경우도 많아요. 아이러니하네요.
홍은지
요즘 젊은 세대들은 옛날 작품들을 보고 ‘너무 세다!’고 한다면서요?
우연
네, 매운맛이에요, 캡사이신!
홍은지
한편으로는 이제 여러 층위로 ‘안전하게 매개된’ 작품들을 편하게 관람하려는 전반적인 문화 흐름도 있는 것 같아요. 센 게 오더라도 “당신은 극장 안에서 안전하게 감상하실 수 있어요. 다 설명해 드릴게요” 같은 식이죠. 사전에 경고를 다 해주고, 각종 안내와 해설을 통해 관객이 ‘안심할 수 있는 상태’로 작품을 소비하게 되는 거예요. 여러 겹으로 포장된 말들이 전면에 나올 때 비로소 관객은 ‘이해했다’, ‘향유하고 있다’고 느끼는 거죠. 드라마터그가 많아지고 작품을 둘러싼 말들이 늘어난 것도 그런 이유 아닐까요? 이제 그런 설명이 없으면 관객은 “이게 뭐지? 왜 이래?”라며 불안해하고, 소통이 안 된다고 느끼게 되니까요. 작품보다 말이 앞서서 관객을 안심시키는 문화랄까요.
우연
그러니까 비평은 줄고 작품에 붙는 각종 텍스트는 오히려 폭발적으로 늘었어요. 정보와 해석, 지식의 층은 많아졌지만 정작 ‘작품을 둘러싼 비평적 피드백’은 점점 협소해지고 있죠. 작품에 붙은 살은 비대해졌는데, 작품 자체는 오히려 왜소해진 느낌이에요. 전문가의 수는 제한적이다 보니 일인다역이 늘어난 것도 사실이에요. 드라마터그, 기획자, 연출가, 연구자, 보고서 작성자까지 한 사람이 다 하죠. 리터러시는 넘쳐나는데 정작 그만큼의 깊이를 지탱하지 못하는 기형적인 생태계가 된 거예요.
홍은지
맞아요. 어떻게 보면 창작진 내부에서 이미 비평의 방향을 지시하고 있기도 해요. 지원서만 봐도 그렇잖아요. “당신은 어떤 맥락에서 작업을 하나요?”라는 질문에 답해야 하니까요. 이제는 ‘이걸 해보고 싶어요’로는 안 되고, 반드시 어떤 맥락에서, 어떤 사회적 의미로 하는지를 서술해야 하죠. 마치 홍보문구처럼요. 결국 그렇게 쓰인 모든 텍스트가 자기 비평을 포함하게 되고, 창작 과정 자체가 자기-비평적인 구조로 흘러가요. 자신이 쓴 기획 의도나 설명문이 이미 비평을 내장한 상태로 존재하는 거죠. 예술가들이 나의 비평을 자평하면서 쓰는, 결국은 비평을 지시하게 되는, 자기 재귀적인 작품들을 계속하고 있는 거죠.
우연
ACTiO의 일 년을 돌아보는 우리들의 이야기도 트리오 랩처럼 한도 끝도 없이 이어질 판국이네요. 이쯤에서 마무리가 필요할 것 같아요. 불안한 예술 생태계, 비평의 위기를 말하는 시대에 시작된 ACTiO는 분명 흥미로운 매체 실험인데요. 이 매체 실험이 앞으로 어떤 미래를 만들어 가게 될지는 이미 ACTiO에 연루된, 곧 연루될, 필자이자 독자인 우리 그리고 여러분들 손에 달려있다는 결론입니다. 함께 서로를 응원합니다.
대화 나눈 이들
박지선
혼자, 때로는 동료들과 산책하며 낯선 길을 열어가는 것을 좋아합니다.
우연
무대 곁에서 일복이 많았습니다. 여전히 창작의 황홀함을 좋아하고, 그 힘을 믿습니다.
홍은지
상상을 현실로 옮기는 것이 즐거워 공연예술 연출, 축제·공간 운영 등의 일을 해왔습니다.
진행 및 정리:우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