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이
여자 …내가 싫지?
동생 왜 그렇게 생각해?
여자 난… 그냥 행복해지고 싶었어.
동생 이번 생에 행복은 우리 거가 아닌 것 같아, 누나.
여자 …거긴, 여기랑 달라?
동생 죽는다는 건 별로 큰일이 아니야. 그냥… 멈춘 거야.
여자 ….
동생 누나랑 다를 게 없어.
-김슬기, <크레센도 궁전> 중에서
새해를 맞는 1월은 극작가의 탄생을 기대하는 시기로 여겨진다. 극작가 김슬기의 이름을 처음 본 것도 2011년 1월이었다. 그해 3월, 막 입사한 극장에서 처음으로 참여한 프로그램이 <봄 작가, 겨울 무대>였다. 그때 나는 신춘문예로 등단한 6명의 작가 중 한 명이었던 김슬기를 처음 만났다. 김슬기는 조선일보에서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등단했다.
극작가의 탄생
<봄 작가, 겨울 무대>는 1년의 호흡으로 진행되는 ‘작가’ 지원프로그램이다. 현재는 프로그램의 세부 구성이 바뀌었을 테지만 당시에는 봄에 만난 작가들에게 신작 장막 희곡을 제안하고, 여름에 함께 1박 2일 단체 워크숍을 다녀와 가을에 낭독을 거쳐 겨울에 본 공연을 올리는 과정이었다. 그중 한 작품을 다음 해 레퍼토리 작품으로 발전시키는 단계도 있었다. 사업을 진행하는 입장에서는 작가에게 필요한 과정이라고 설명하지만, 작가의 입장에서 과연 그럴까 싶을 때도 있었다. 초고가 나오기도 전에 먼저 연출자들이 섭외되었다. 작가들은 초고 이후 피드백을 받아 수정 작업을 진행하고, 그중 4편이 본선에 선정되어 관객을 만난다. 최종적으로는 1편의 ‘최우수작’에 올라야 이듬해 다시 공연될 수 있었다. 작가 김슬기의 <서글퍼도 커튼콜>은 그 어려운 관문들을 통과한 작품이다. 벌써 십오 년이 지나 어떤 기억들은 희미해졌지만, 작가가 그 작품을 무대화하기 위해 긴 수정 작업을 진행했던 것은 선명하게 남아있다.
나는 스무 살이 되던 시기부터 매해 신춘문예 당선 희곡들을 찾아봤다. 극작가 지망생으로 희곡을 투고하고 12월 한 달간 마음 졸이던 시간이 있었다. 혹여나 최종후보작에라도 내가 쓴 희곡이 거론되지는 않았을까 하는 마음으로 1월 1일을 신춘문예 심사평을 찾아보는 것으로 시작하기도 했다. 일을 시작하고부터는 투고는 포기했지만, 꿈이라는 것은 쉽게 사라지지 않아 매해 새로운 극작가의 소식을 부러움과 동경의 마음으로 찾아보았다.
그러다 한 번은 누가 계속 희곡을 쓰는지 궁금했다. 199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 선정된 신춘문예 희곡들과 심사평, 당선 소감을 찾아 읽고, 작가의 이후 작업과 개별 리뷰를 혼자서 정리해 본 적이 있다. 꾸준히 작품을 발표하며 이른바 ‘롱런’하는 작가들이 대부분 연출을 겸하고 있다는 사실은 놀랍지 않을 것이다. 신춘문예라는 제도를 통과했더라도, 작가가 되어 작품을 발표하기 위해서는 결국에 또 다른 제도들을 만나야 한다.
<서글퍼도 커튼콜>은 내가 기획팀의 AD로 작가를 만난 첫 작업이라 모든 것이 서툴렀다. 일이야 배우면서 시작하는 단계였지만, 희곡을 읽어내는 것은 다른 차원의 작업이었다. 내가 낙선했던 신춘문예로 등단한 작가를 만나는 것에 대한 묘한 컴플렉스가 동반됐을지도 모른다. 그래서일까? 재공연 작으로 작가 김슬기의 <서글퍼도 커튼콜>이 선정되고 그 희곡을 여러 번 곱씹어 읽으면서도 나는 그 희곡과 좀처럼 가까워지기 어려웠다. 성폭행, 근친상간, 가정폭력의 상처들이 인물들의 고통과 관계의 전사로 드러나 있었다. 그때 기획팀으로서 나는 독자 혹은 관객이 만나게 될 ‘서글픔’이 비단 연민에 머물지 않기를 바랐다. 그래서 고심하며 메인 카피의 단어를 골랐다. 그것은 ‘위로’였다.
늦게 도착한 희곡
극장을 나와 독립기획자로 활동하면서 나는 주로 창작극에 참여했다. 새로운 작가들을 만날 때 컴플렉스를 극복하지는 못하더라도 그것을 조금 인정하게 되니 작가와의 작업에 도리어 동력이 될 때도 있었다. 기획자에게 작가와 신작을 시작한다는 것은 비어 있는 도화지를 마주하고 있는 것과도 같다. 엄밀한 의미에서 희곡이라고 부르지 않는 말과 글들로도 공연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극이 어디에서 시작될지, 어떤 인물이 나올지, 혹은 사라질지, 채워지고 변하는 과정들을 겪으며 작업이 만들어진다. 나는 기존 희곡 텍스트를 선택하지 않았기에, 작가라는 사람을 먼저 만나고 그 뒤에 오는 희곡을 만났다.
다양한 타입의 작가를 만났다. 하루에 한 페이지씩 써서 그 감각을 공유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초고를 탈고할 때까지 하염없이 기다리게 하는 작가도 있었다. 공연 날짜가 정해져 있는 상태에서 극작을 시작하면(그런 작업도 있다, 사실 많다), 인물 수가 제한적이기도 하여 일종의 ‘오더메이드’가 된다. 이메일 수신함에 도착한 초고나 수정본을 보면 반가운 마음과 동시에, 그 작가가 보낸 시간을 헤아려 조금 더 촘촘한 대화를 나눠야 한다는 부담감이 들기도 했다. 초기 창작 프로덕션에서는 무척 적은 수의 첫 독자들이 모인 셈이니, 첫 리딩에서 나는 종종 편파적으로 작가의 편을 들 수밖에 없다. 내가 경험한 대부분의 창작극은 계속 수정될 수 있는, 수정되어야 하는 ‘초고’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엄마 딸!
여자 응?
엄마 저기에 뭐가 들어오는 거야?
여자, 엄마 옆에 다가와 선다.
여자 글쎄. …뭐가 들어오든 뭐가 중요해. 언젠가 또 부서질 텐데. …세워지고. 부서질 텐데.
엄마, 무언가가 새로 지어지고 부서지고 또 새로 지어질 빈 터를 오래오래 골똘히 바라본다. (75)
나는 <크레센도 궁전>의 이 대목을 읽을 때마다, 작가가 그리는 가족과 관계가 계속해서 새로 지어지고 무너진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무대와 세계 역시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으로도 읽혔다.
완고로서 희곡은 마지막 공연까지 올리고 나서야 정리되지만, 희곡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지켜봤던 내게 그 희곡은 그저 텍스트로만 읽기 어렵다. 그만큼 거리감을 두기 어렵다는 말일 테다. 작가의 그 이후 작업도 그저 독자 혹은 관객으로서 온전히 감상하기가 어렵기도 하다. 초고에서 완고까지의 과정에서 만났던 수많은 버전의 희곡 사이에서, 작가가 오롯이 혼자 보냈을 시간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극작가의 부고
나는 극중 인물과 작가를 결코 동일시하지는 않지만, 작가가 그려낸 인물을 통해 세계를 엿보곤 한다.
2017년 5월 국립극단 잔디마당에서 게릴라 공연 <페미리볼버>를 봤을 때 작가 김슬기의 작업이 다른 국면을 맞이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날 멀리서 공연을 지켜봤기에 인사를 따로 건네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의 작업을 한동안 보지 못했지만, 이따금 그의 소식을 건너 건너 듣게 되었다.
그러고도 한동안, 그의 작업을 보지 못했다.
아마 그의 부고를 듣지 않았다면 그의 희곡을 먼저 찾지는 않았을 것 같다.
그리고 나는 2024년 12월 그의 유고 희곡집을 받았다.
만났던 작가가 떠나고 난 뒤 남겨진 희곡을 어떻게 읽어야 할지 나는 아직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의 희곡에서 내가 보고 싶은 세계를 만나기로 한다. 나는 작가 김슬기의 작업이 작은 원룸(<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에서 카페 커튼콜(<서글퍼도 커튼콜>), 궁전맨션 203호(<크레센도 궁전>)를 배경으로 삼으며 지나온, 2011년과 2014년 사이의 시간을 다시 들여다본다. 그러다 <크레센도 궁전>의 ‘안방’에 시선이 머문다.
엄마, 안방 문을 연다.
침묵.
안방의 소리, 완전히 멈춘다.
모두 그 안을 본다.
어둠.
희뿌연 먼지가 피어오르는 어둠이 거기 있다.
아버지는, 없다. (70)
만약 이 희곡을 지금 여기서 다시 무대화한다면, 나는 극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줄곧 소리로 존재하는 ‘안방’, 아버지의 자리를 전면화하는 극을 제안할 것 같다는 상상을 해본다. <크레센도 궁전>에는 이미 죽은 동생이 등장한다. “죽는다는 건 별로 큰일이 아니야. 그냥…멈춘 거야.”(42)라는 동생의 대사에서 나는 존재의 유한성을, 죽음이라는 사건을 다시 해석해 보고 싶다. 그것은 아마도 작가 김슬기의 시간이 그저 잠시 멈춰있다고 여기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2011년 1월 그를 만나게 된 희곡을 다시 살펴본다. 발랄한 그의 당선 소감도 남았다. 그의 문장과 목소리가 지금 내게 어떤 위로를 보내고 있다.
“죄송하고 죄송하고 계속 고맙습니다. 끝으로 전국에 계신 문우 여러분, 세상에 이런 글도 됐어요! 건필!”
(극작가 김슬기의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소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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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 출처 : 김슬기, <크레센도 궁전>, 『김슬기 희곡집 : 크레센도 궁전』(2024)
*) 본문에서 인용한 문장은 모두 김슬기의 희곡집에서 가져온 것이며 괄호안의 숫자는 책의 쪽수다.
김진이
변방을 질문하는 기획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