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선 · 우연 · 홍은지
편집자 주
ACTiO가 1주년을 맞이하였습니다. 지난 1년을 평가하고 새로운 1년을 준비하는 마음으로 [창간 1주년 특집 : 연속 기획]을 준비합니다. 첫 기사는 [ACTiO 메타 비평]입니다. 독자이자 필자인 박지선, 우연, 홍은지 3인이 ACTiO의 지난 1년을 날카롭게 평가해 주었습니다. 격주로 총 2회에 걸쳐 발행됩니다.
ACTiO가 1주년을 맞이했다고 하네요. 필자로 한 번씩 참여했고, 나름 꾸준히 ACTiO의 글을 읽어온 독자 세 사람이 지난 일 년을 돌아봅니다. 일단 이야기를 시작하는 예열 단계로 가장 흥미로웠던 글에 대해 이야기해 보도록 해요.
박지선
이양구 작가가 쓴, [이제 한화만 잘하면 된다](2호, [이슈, 이슈]). 야구 캐스터와 패널의 대화를 통해 계엄 이후 헌법재판소의 대통령 탄핵 심판 결정 의미와 당시 상황을 생중계하듯 이야기해 주는 글이었죠. ‘정치나 삶이 야구와 같을 수는 없겠지만’, 우리도 늘 정치 문제에 대해 연결되어야만 하잖아요. 야구팬들만 아는 맥락의 제목이지만, 누구나 흥미롭게 읽을 수 있게 시대를 알려주는 글이었고요. 극작가만이 할 수 있는 새로운 방식의 대중적 글쓰기여서 흥미로웠어요.
홍은지
지난 일 년 사이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났잖아요. ACTiO 발간이 2025년 1월인데, 왜 그 시점에 발행해야만 했을까? 왜 연극웹진 ACTiO란 이름으로 시작되었을까? 워낙 강펀치 맞는 일들이 많았기 때문에, 그 일들이 이렇게 지면화되었다는 생각도 드네요.
우연
저는 백두산 평론가의 [폐가에서 알을 낳은 어린 새를 위하여 : <산난기>](4호, [리뷰, 리뷰])가 흥미로웠습니다. ‘말을 즐기는 연극’을 본 평론가가 이제 나도 말 좀 즐겨보자며 작정하고 쓴 글 같다고 할까요. 백두산 평론가의 말맛에 휩쓸려 보는 즐거움이 있었어요. 이양구 작가도 그렇고 백두산 평론가도 그렇고, ACTiO가 기존 매체와는 달리, 글쓰기의 관습을 벗어나도 된다는 일종의 일탈 욕구 혹은 자유로움을 필자들에게 주고 있다고 생각되네요. 이 글의 서두도 이렇게 시작됩니다.
“윤미현 작가의 말마따나 된장은 항아리에 담기니 된장이고, 강아지는 개집에 담기니 개이며, 사람은 집에 담기니 사람인 셈으로, 담기는 곳은 정체를 결정한다.<젊은 후시딘>, 2014 이 연극평론은 신생의 웹진에 담기고 있다. 그러니 나는 이 글에서 평론입네 하는 말을 버리고 옛 사람들의 희문戲文처럼 가끔 농담이나 잡담을 섞으며 손을 재게 놀려 쓸 것이다.”
홍은지
한 장르 씬에서 활동하다 보면 그 씬에서 익숙해진 어조에서 벗어나지 못하잖아요. 맡은 역할로만 바라보는 시선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 즉 부캐 역량을 보여주고 싶을 때가 있는데 그런 글을 읽을 수 있었어요. 평소에는 희곡 작가로만 알고 있었는데 위트가 있는 관객이었네, 줄곧 농담만 하는 줄 알았는데 시니컬하고 진지한 관심사가 있었네, 등등. 연극계 동료들의 대외적 모습과 또다른 면모를 접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박지선
그런 의미에서 저는 [말을 따라 시간을 듣는 일](9호, [그가 말을 걸었다])이 좋았어요. 전진모 연출이 지금은 연출보다는 극장장으로 더 많이 불리고 있잖아요. 그런데 저는 전진모 연출을 만날 때 극장장으로 부르기보다는 연출로 부르는 걸 더 좋아하거든요. 그 마음에는 전진모 연출이 좋은 작업을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어요.
“희곡을 읽는다는 건, 내게 그 느린 자리에서 사람을 다시 보는 일이다. 나는 그 느린 순환을 놓치지 않으려 한다.”
이 글의 마지막 문장인데요. 이것이 어떻게 보면 전진모 연출의 삶이면서 작업의 성격이자 특성이라고 생각하거든요.
ACTiO는 [이슈, 이슈] [리뷰, 리뷰] [그가 말을 걸었다] [다시보기, 다시읽기] 4개 세션으로 구성되어 있는데요. 이 구성과 각각의 세션은 흥미로운가요?
홍은지
저는 아무래도 ACTiO의 [이슈, 이슈] 세션에 집중했는데요. 다른 웹진들하고 달리 연극 작품 평만이 아니라 지금 현장에서 어떤 상황들이 벌어지고 있는지 보여주는 그 코너가 있다는 게 재미있었어요.
박지선
하긴, [이슈, 이슈] 세션처럼 연극계의 당장의 이슈를 다루고 있는 매체가 지금 있나요? 가장 그 기능을 잘 담당하던 웹진 <연극in>도 서울문화재단에 의해 잠정 휴간되었고, 대부분이 문화예술기관들의 기관지나 장르별 협회지이기 때문에 생태계 내에서 벌어지는 당장의 이슈들을 다루고 있는 매체가 거의 없다고 봅니다.
우연
‘적재적소’에 상응하는 시간적 개념이 ‘적시성’이라면, [이슈, 이슈] 세션은 적시성이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될 텐데요. 적시에 쓰여진 글은 드라마투르그로 활동하는 김슬기님의 [왜 웹진 <연극in>을 잠정 휴간해야 했을까](4호, [이슈, 이슈])라고 생각합니다. 서울문화재단이 새로 만드는 웹 플랫폼과 잠정 휴간 중인 기존 <연극in> 웹진을 비교하며, 예술의 가치는 대체 누가 공인하는가?를 질문하는 글이었어요. 재단의 새 플랫폼 명칭 ‘스파크(Seoul Portal of Artwork Certified, SPAC)’로부터 단어 ‘Certified’(보증된, 공인된)를 딱 거머쥔 채, 무작정적인 반론이 아니라 연극계 활동가로서 매우 우아하고 체계적인 얼굴로 문제를 제기한 글이었지요. 공론화 과정이 진행되던 바로 그 시점에 중요한 역할을 한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박지선
저는 [리뷰, 리뷰]는 좀 아쉬워요. ACTiO의 모든 세션은 방향성을 명시하고 있어요. [이슈, 이슈]는 “연극계의 가장 중요한 현안이나 쟁점 등을 다룬다. 논쟁을 환영하며, 반론을 수용한다.” [그가 말을 걸었다]는 “극의 인물이 오늘의 우리에게 전하는 말을 생각한다.” [다시 보기, 다시 읽기]는 “연극사 속 사건 인물 작품 등을 다시 보고 다시 읽는다.” 모두 명확하죠. 그런데 [리뷰, 리뷰]는 “동시대 연극 현장의 오늘을 기록한다. 오늘이 내일이 될 것이고, 역사가 될 것이다.”라는 거창한 문장 아래 소개되는 리뷰는 어떤 기준으로 선별되고 지면화되는 것일까, 편집위원의 기획 의도와 방향이 잘 안 보여요. 이 글들을 모아 놓는다면 과연 오늘의 역사로 볼 수 있을까? 그런 질문이 들어요. [리뷰, 리뷰] 지면이 일정한 방향 속에서 큐레이션 되어야 하지 않을까. 특히 여러 작품의 리뷰를 나열하는 기존 평론 매체와 달리 한 호에 하나씩 리뷰가 소개되고 있는데, 그렇다면 더욱 기준이 명확해야 하지 않나요?
우연
[리뷰, 리뷰]에서 ACTiO만의 특성을 발견하기 어렵다는 의견 같아요. 예를 들면, ACTiO에는 특별한 글쓰기의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데, 이런 부분들이 확장되어서 평론이란 형식을 실험적으로 확장한다거나, 아니면 작품을 읽는 방식을 구태에서 벗어나 ACTiO만의 방식으로 제안할 수도 있겠고요. 지금 연극계 내부는 워낙 메타 비평이 부재하니 ACTiO에서는 서로가 서로를 리뷰하는 상호 리뷰, 릴레이 리뷰 방식을 보여주면서 형식적인 변별성을 갖는다든가 하는 기획적 접근도 필요할 수도 있겠네요.
박지선
물론, [리뷰, 리뷰]에서 개별적으로 인상 깊은 글도 있었어요. 저는 장기영 평론가의 [장애 재연, 장애 연기에 얽힌 정언들에 대하여](창간 준비 2호, [리뷰, 리뷰])도 좋았어요. 이 글은 모두예술극장에서 낭독공연으로 진행된 데이비드 프리먼(David Freeman)의 <크립스(Creeps)>에 대한 리뷰인데요. 이 글도 장애 예술 행보에서는 적시성 사례가 될 수 있는 글이기도 하네요. 우리가 비장애 배우들의 장애 재현 연기가 더 이상 통용되는 시대가 아니라고 인지는 하고 있지만, 그 장애 안에서의 장애 재현, 또 다른 장애 안의 관계성에 대해서는 사실 크게, 또 깊이 생각하지 못했었던 측면이 있잖아요. 이 글은 장애 연기를 우리가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읽어야 할 지에 대한 질문들을 던져주고 있는 것 같아요. 리뷰가 단순하게 어떤 작품을 설명해 준다기보다, 관객에게 장애 배우들이 참여하는 작품을 관람할 때 그들의 연기를 어떻게 해석하고 봐야 하는가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공하고 질문을 던져주고 있다는 점에서 인상 깊었습니다.
우연
이 글을 쓴 장기영 평론가의 또 다른 글 [‘이곳에서’ 실패 말하기, ‘이곳의’ 실패 말하기 : <매드 어사일럼>](10호, [리뷰, 리뷰])은 ‘미친존재감프로젝트’의 작품 리뷰인데요. 이글은 청탁이 아니라 투고 형식으로 게재되었다고 알고 있어요. 본인이 이 작품에 대한 글을 쓰고 싶다고 먼저 제안한 경우였는데, 그런 적극성, 역동성이 이 웹진의 중요 특징이 될 수 있겠네요! 창작과 밀접한 평론가들이 이 매체를 자신의 관점을 이야기할 적합한 공간으로 인식하고 글을 던진다는 점에서 의미도 있구요.
홍은지
두 분이 말씀하신 글 모두 시대의 증언이라는 느낌이 강했어요. 연극 예술가만이 할 수 있는 방식의 증언이었고, 기록을 넘어 예술가의 언어로 시대를 포착했다는 점에서 인상 깊었습니다. 또 다른 세션인 [그가 말을 걸었다] 에는 연극이 가진 문학적 즐거움을 잘 보여주는 글들이 실려 있는데요. 리뷰와는 또 다르게 문학으로서의 희곡, 우리가 이것을 어떻게 접해야 할 지에 대한 메타적인 시선들도 들어가 있어서 이 부분이 참 재미있었습니다. 저도 전진모 연출의 [말을 따라 시간을 듣는 일](9호, [그가 말을 걸었다])은 연극성을 문학적 감성으로 섬세하게 내재화한 글이라 좋았어요.
우연
[그가 말을 걸었다]는 희곡 텍스트의 한 문장으로부터 비롯된 글쓰기라고 할 수 있는데요. 필자가 밑줄 그은 희곡의 특정 텍스트 덕분에 희곡 전문에 대한 근거리 궁금증이 갑자기 커져서 다시 책장을 펼칠 수도 있고요. 이 한 문장 때문에 저기 멀리 안드로메다 같은, 당장 희곡 전문과는 상관이 없는 엉뚱한 화제나 이슈로 껑충 건너갈 수도 있는 원거리 상상력을 제공해 주기도 하죠. 그런 점에서 즐겁게 읽고 있어요. 저는 후자 방식을 더 좋아하긴 해요.
박지선
[다시 보기, 다시 읽기]에서는 이진아 평론가의 글 [“나는 보편적이고 중립적인 관객이에요”라는 말 : 우리 안의 인종주의](3호, [다시 보기, 다시 읽기])가 계속 곱씹게 되더라고요. 한국 사회 안에는 인종주의가 없는 것처럼 이야기되지만, 사실 저는 ‘헤게모니적 백인성’이 우리 안에 내면화되어 있다는 말에 동의하거든요. 앞으로 창작하다 보면 인종주의 문제가 계속해서 질문으로 등장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잘 짚어줬다고 생각해요.
우연
얼마 전 모두예술극장에서 회의 준비를 하며 자료를 보다가 아일랜드 극작가인 케이트 오라일리(Kaite O’Reilly)의 “Cripping up is the twenty-first’s answer to blacking up.”(비장애인의 장애인 연기는 흑인 분장에 상응하는 21세기 방식이다)라는 문장을 접하게 되었는데요. 그때 바로 ACTiO의 이 글이 생각나서 다시 찾아 읽었습니다. 이후 필자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는데 ‘이 표현이 인종주의를 흑인성의 문제, 특히 피부색의 문제로 국한 시키는 것 아닌가? ‘인종화’라는 더 넓은 문제의식을 고민해야 하는 것 아닌가’라는 추가 질문도 들을 수 있었고요. 지금은 인종주의를 특정 인종, 피부색의 문제에만 국한 시키지 않으며, 장애 문제를 바라볼 때도 교차성 관점에서 인종주의에 대한 기본적 성찰은 매우 중요하기에 이 글이 길잡이 역할을 해줄 수 있는 텍스트였습니다.
홍은지
지금의 [다시 보기, 다시 읽기]는 대부분 연극사 안에서 연출가나 작가 연구를 기반으로 연구 중심의 글들이 많아서, 조금 더 사회적·문화적·심리학적 질문을 던질 수 있는 담론형 글들이 앞으로 더 들어와도 좋겠다는 생각은 들었어요. 연극의 입장에서 우리를 다시 읽게 만드는 글들, 담론을 형성할 수 있는 이론적 근거를 제공하는 글들이 개인적으로는 더 기다려집니다.
우연
[불온한 생태연극의 역사 : 한국 반공해마당극에 대한 메모](6호, [다시 보기, 다시 읽기])를 눈여겨 볼 수 있었는데요. 생태 연극과 반공해마당극을 연결하는 사고를 한국연극학회 학술행사에서 처음 접하고 매우 흥미롭게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구태의연하다고 생각했던 과거의 연극자산을 현재의 이슈로 다시 소환한다는 점에서요. 그런데 ACTiO에 소개되어서 반가웠습니다. 사실 학계에서 활동하는 이가 아니면 이런 글은 찾아서 보기 힘든데, 학술적인 글들의 접근성을 높여준다는 점에서 긍정적이기도 합니다.
홍은지
총평을 해보자면, 그동안 연극 관련 매체가 작업의 결과만 보고, 결과에만 초점이 맞춰진 글쓰기였다는 점에 항상 아쉬움이 있었던 것 같아요. 모든 과정이 생략되고, 또 특정한 글쓰기의 방식으로만 마지막에 정리되는 이런 부분이 늘 뭔가 매체 안에서 연극이 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고립이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ACTiO의 4개 세션을 보면 연극의 전 과정에 참여하는 다양한 사람들이 연극의 첫 시작을 이루는 텍스트, 그리고 연극을 만드는 과정, 연극을 둘러싼 시대사적인 문제, 과거와 현재의 사건들 속에 놓인 연극 등, 다양한 관점으로, 또 필자의 자기 캐릭터를 가지고 바라본다는 것이 풍요로운 구성이라고 생각되었어요. 그래서 기존 매체 지면에서는 아주 납작해져 버린 글쓰기를 조금은 입체적으로 만들어 주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 점에서 전체적인 구성은 좋다고 봅니다.
ACTiO는 왜 2025년 1월에 창간되었을까요? 왜 ACTiO란 이름으로 창간되었을까요?
박지선
창간 준비호가 2025년 1월에 발간되었어요. 저는 오래전부터 ‘왜 한국의 연극 잡지들은 온라인화하지 않을까?’라는 의문을 가져왔어요. <한국연극>은 최근이 되어서야 온라인화되었고, <연극평론>은 여전히 종이책 형태로만 발간되고 있죠. 몇몇 독자만 읽는 글을 굳이 책으로 출간해 판매하는 현실이 이해하기 힘들었어요.
평론 글도 그래요. 모든 관객이 전문적 연극 지식을 가지고 작품을 감상하는 것은 아닌데, 평론가들은 자신이 알고 있는 이론과 개념을 나열하는 방식으로 글을 쓰는 경우가 많거든요. 그래서 작품에 대한 호감이나 흥미가 잘 생기지 않습니다. 물론 좋은 평을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좀 더 쉬운 언어로 대중이 접근할 수 있는 평론도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예전에는 조선일보나 동아일보 같은 주요 일간지에도 연극 리뷰가 실렸지만, 지금은 그런 지면이 거의 사라졌지요. 공연과 관련된 글이라고 해봐야 대부분은 기획자들이 쓴 홍보성 글뿐이고, 평론가들의 글은 잡지 형태로만 존재하다 보니 일반 독자에게 닿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작품이 만들어졌을 때, 긍정적이든 비판적이든 활발한 평론 활동이 이루어졌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현장 곳곳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평론가들은 ‘쓸 곳이 없다. 매체가 없다’고 말하곤 했죠. 그럴 때마다 저는 ‘없으면 직접 만들면 되지 않느냐’고 제안하곤 했습니다. 이제 그런 목소리가 예술 생태계 안에서 실제로 움직이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비단 리뷰뿐만 아니라, 정책 관련해서도 그래요. 현장에서 일하고 있으면 정책에 대해서도 발언하거나 의견을 개진하고 싶을 때가 많은데, 정작 이것을 수용할 매체가 없잖아요. 목소리를 낼 방법이란 게, 무슨 포럼의 발제자가 되거나, 아니면 매번 신문고에다가 넣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요. 매체는 없고 동시에 이슈는 많았던 지난 몇 년을 보내면서 새로운 매체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 것이 아닌가 싶어요.
홍은지
제목이 ACTiO잖아요. ACTiO의 이름에 대해서도 한번 이야기해 볼까요.
박지선
[<악티오>를 호명하다 : 창간에 부치는 글](창간호, [이슈, 이슈])에 보면 이런 내용이 나와요. ‘비평의 시대가 저물었다. 연극계 안에서 더 이상 힘을 갖지 못한다. 비평계도 협회라는 틀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그 안에서 집단 욕망으로 포섭돼 버렸다. 더 이상 비평이 어떤 힘을 갖는 시대가 끝났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협회도 거부한다, 협회화되지 않겠다, 개개인이 독립적으로 꾸려 나가며 어떤 지원금도 받지 않겠다’고 선언했죠. 어떤 지원금도 받지 않고 독립적으로 존재하면서 우리가 낼 수 있는 목소리를 내겠다는 것입니다. 사실 예술 생태계 안에서 연극 매체는 대부분 기관지이거나 협회지이기 때문에, 그 이해관계 안에서 존재할 수밖에 없었잖아요. ACTiO는 그 모든 맥락을 끊어버리고 독립적 매체로서 제 역할을 하겠다고 취지를 밝혀두었어요. 저는 ACTiO의 이러한 시작이 비단 ACTiO뿐만이 아니라, 지금 시대를 반영한 것이었다고 생각해요.
홍은지
지금까지 우리가 한 얘기들이 다 그 발간 방향 안에서 일 년 동안 이루어졌다고 생각하면 일관성을 가지고 운영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시기적으로 연극평론이 가진 폐쇄성, 지면화되는 것의 한계가 오랜 기간 누적되어 오지 않았을까, 필진도 어떤 하나의 그룹으로 특정되고, 그것이 기관이 되었든 협회가 되었든, 결국은 ‘펜스 안에서의 글쓰기’였던 건 아닐까, 그리고 이 한 방향으로의 글쓰기가 지금처럼 점점 더 다변화되고 있는 연극계 현장을 이제는 더 이상 수용할 수 없게 된 한계 상황까지 온 건 아닐까 그런 짐작을 해보는 거죠.
우연
그렇다면, ACTiO는 창간 목표에 충실했던 거네요. 비평의 주체가 반드시 평론가만이 아니다, 비평의 형태도 꼭 리뷰만이 아니다, 라고 전제한다면요.
홍은지
그렇죠. 그리고 방금 말씀하셨던, 생태계의 한계를 스스로 드러냈다는 지점이요. 최근 몇 년을 보면 민간에서의 자발적이고 독립적인 창작활동들이 굉장히 위축되었잖아요. 물론 그 이면에는 공적 자금이 예전에 비하면 어떤 방식으로든 계속 늘어왔구요. 비평뿐만 아니라 창작 전반에 걸쳐 공적 자금 의존도가 점점 높아지는 상황에 대해서도 우리 스스로 어떻게 바라봐야 할 것인지 혼란스러웠고, 그렇다고 하여 그걸 또 멈출 수 없기도 했죠. 특히 비평의 경우에 조금 더 예리하고 뾰족하게 이런 생태계를 들여다보아야 하는 역할과 의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특정 역할만을 수행하며 스스로를 한계 지어 온 것에 대해 성찰하고 비판적으로 자평한 건 아닐까, 추측과 짐작을 해보게 됩니다.
도대체 ACTiO의 주 독자는 누구이며, 필자는 누구인가요? 이 커뮤니티의 한계와 잠재력이란 대체 무엇일까요?
홍은지
저는 과연 ACTiO의 독자는 누구일까? 쓰는 사람들은 신난 것 같은데 이것을 누가 읽을까? 라는 이런 의문도 있습니다.
우 연
보내준 메일에 의하면, 정기구독자는 376명이라고 하는데 일단 이 웹진은 댓글을 다는 법이 복잡하잖아요. 저도 아직 그 절차를 모르는데, 매체 형식이 인터렉티브한 소통은 어렵고 개방성이 적은 편이다 보니 독자층에 대해 가늠하기 어렵고 상호 피드백도 어려운 것도 사실이지요.
홍은지
매체 개방성을 얘기하기엔 아직 1년밖에 안 됐으니까, 많은 걸 요구하기가 어렵지요. 그런데 취향의 집약성만큼 이런 내용을 누가 과연 같이 호응하고 같이 즐길 수 있을까? 글 쓰는 사람들과 우리들의 동료 외에 누가 또 즐길까, 이건 좀 의문으로 남는 부분이죠.
우 연
지금까지 매체에 글 쓰는 사람과 읽는 사람들이 거의 동일하고, 그 주변 동료들 사이에서 공유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됩니다.
박지선
ACTiO를 누가 읽느냐, 관계자들이거나 조금 넓게 봐도 연극 전공하는 학생 정도겠지요. ACTiO는 연극 커뮤니티로부터 시작되었는데, 그 커뮤니티 안에 관객은 아직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생각이 일단 들고요.
홍은지
과연 이런 일종의 연극을 둘러싼 지적 생산물들이 특정 그룹 외에 같이 즐길 수 있는 성격인가, 같이 즐길 가능성이 있나? 궁금하긴 합니다. 특정 커뮤니티 안에 있으니까 글을 읽으면서 웃긴다, 즉 우리가 알기 때문에 즐거운 부분도 있잖아요. 그런데 이 내용이 그 커뮤니티를 넘어서까지 재미있고 흡인력이 있을까, 같이 즐거워할 수 있을까, 이런 것들을 지금으로서는 확인을 할 수가 없으니까요. 게다가 댓글이나 매체상의 개방성이 없으니까 확인할 수도 없고요.
우연
단순히 SNS의 좋아요나 구독수 같은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매체와 매체에 실린 글에 대한 피드백을 보는 것도 하나의 즐거움이긴 하잖아요. 그런 면에서 독자가 누구인가? 독자의 반응과 생각을 읽기 어렵다는 것은 중요한 문제이지요. 그런데 지난 일 년 간은 연극 커뮤니티로 제한된 독자층이었다고 한다면, 그렇다면 더욱더, 공론장이 없었다는 것이 아쉬운 점이기도 해요. 물론 외부적으로는 있을 수 있었겠지요. ‘그 글 봤어?’ 웅성웅성 이 정도. 충분히 공론화되어 이야기될 만한 가치가 있는 글인데도 웹진 안에서 공론화되지 못하고, 웹진 안에서 확인되거나 확장되지 못한 한계가 있었다고 생각해요. 즉 “논쟁을 환영하며 반론을 수용한다”라고 했지만, 정작 환영하고 수용한 것을 확인할 길이 없었다.
박지선
그 문제들에 대해서는 저도 충분히 공감해요. 저는 우리가 이 시점에 ACTiO 창간호에서 밝혔던 지향점과 운영 원리를 생각해 봐야 한다고 봐요. ACTiO는 창간 취지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주로 필자로 참여하고 있죠. 일단 원고료 없이 글을 기고하고 있잖아요. 다른 매체에 원고를 쓴다 해도 15만 원, 20만 원 받는 것이지만, 지금 시대에는 보상 없이 어떤 일을 요청하거나 한다는 것은 불편한 일이 되었죠. 그런데 ACTiO에서는 이러한 방식이 동의가 되어 운영되고 있다는 거죠. 저는 이것이 핵심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우리는 이 내용에 동의하기 때문에, 당신들이 이것을 만들고 이러한 취지로 매체를 발간하는 것에 동의하기 때문에 내가 여기 글을 씁니다’라는 것이 이 매체의 동력이잖아요. 그것이 하나의 매체 커뮤니티를 만들고 있다는 점은 대단하죠.
홍은지
예술작업이 예술 노동화되면서 그냥 받은 만큼 한다, 받은 만큼 시간을 쓰고, 받았으니까 한다, 그리고 조금 더 보상이 높은 쪽으로 시간을 들인다, 이런 문화가 요 몇 년 사이에 생긴 거잖아요. 예전에 예술가들은 예술 작품과 생계, 즉 돈에 대한 이야기를 철저하게 분리했잖아요. 그런데 최근 공적 의존도와 맞물리면서 예술 노동이라는 문제, 예술 노동자로서 삶을 꾸려갈 수 있는가가 특히 청년 세대를 중심으로 중요한 화두가 되었는데요…
박지선
그런데 내가 ACTiO에 글을 쓴다는 건, 단순히 ‘일정 금액의 원고료를 받는다’거나 ‘내 목소리를 낸다’는 차원이 아니라, ‘ACTiO라는 매체에 기여한다’는 의미가 되는 거죠. 내가 이 매체의 편집위원에게 도움을 준다는 개념이 아니라, ACTiO가 지향하고 있는 저 철학과 방향성에 동의하고, 나는 그것에 기여하기 위해 이 일을 하고 있다는 의미인 것 같아요.그래서 저는 ACTiO에 20대나 30대도 글을 쓸 수 있다고 생각해요. ACTiO가 지금 이 생태계 안에서 어떤 것들을 만들려고 하는지에 동의하는 사람들은 20대도 있고 30대도 있고 50대, 60대도 있잖아요. 그러니까 그들이 돈의 가치를 넘어서서 동의할 수 있는 커뮤니티가 저는 충분히 있다고 생각해요.
홍은지
그런데 제 질문은 뭐냐면 그렇게 어떤 가치지향적으로, 가치에 동의할 수 있는 사람들이 기여를 하는 이 가치 자체, 이 가치 체계에 지금 세대가 동의할 수 있겠냐는 거예요.
박지선
저는 동의하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요.
홍은지
저도 그렇게 생각하거든요. 정말 확신을 가지고 믿고 싶고. 그렇다면 더 적극적으로 젊은 세대에게 손을 뻗어야 된다고 생각해요.
박지선
ACTiO를 열심히 읽는 20대 친구가 있거든요. 그들한테는 편집위원 선생님들의 정체성 같은 것은 중요하지 않더라고요. 심지어 모르기도 하고요. 그저 콘텐츠에 대한 관심이 많은 거고요.그 세대들이 더 ACTiO에 들어와야 하고, 그래야 ACTiO를 중심으로 하는 이 생태계 안의 커뮤니티가 구성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ACTiO는 ‘저 사람들만 글 쓰는 데야’라는 폐쇄적인 인상을 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그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깊이 있게 그 이야기를 다룰 수 있는 ‘코어 필진’들이 있어야 해요. 그러니까 예를 들어서 핵심 운영진들이 있잖아요. 그럼 이 운영진들을 중심으로 하는 각각의 세션마다 언제라도 글을 쓸 수 있는 코어 필진들이 있고, 이 코어 필진들이 주변에서 이 활동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 새로운 세대나 동료들을 계속해서 찾아야 되는 거죠. 그래서 ‘아, 저기가 굉장히 깊이 있게 이런 문제들을 다루고 이야기하지만, 새로운 사람들의 신선한 관점이나 이야기도 수용하고 있구나’라는 인상도 필요한 거죠.
홍은지
지금 필진은 연령대든 성별이든 다양성의 관점에서 본다면 그렇게 다양하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저는 이것을 완전히 바꾼다기보다 필진 한 사람 한 사람이 가진 색깔을 안전하고 심도 있게 충분히 보여줄 수 있는 지면으로 활용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매력은 계속 가져갈 수 있을 것 같거든요.
우연
저는 그런 면에서 기존 매체보다 ACTiO가 개별 필자들에 대한 조망도가 탁월하게 높은 것 같아요. 필자 하나하나를 스포트라이팅한다고 할까요. ACTiO는 글이 한 편씩 전송되고 업데이트되잖아요. 기존 매체는 쭉 나열된 목차를 보고 읽을거리를 고르게 되는데 이런 방식과는 다르잖아요. 마치 하나하나의 개별적인 행성처럼 글이 소개되니까 더욱 필자 한 사람 한 사람, 그 사람의 글이 지향하는 바에 대해 주목하게 되는 거죠. 그런데 이것이 이 시대에, 이 생태계 안에서 매우 중요한 개념 같아요. 창작자로서 혹은 활동가로서 혹은 이 업계에서 일하는 사람들로서 그것이 일종의 보상이 될 수 있는 거잖아요. 예를 들면 돈과 또 다른 그런 측면에서요. 존중받는다는 느낌이요! 그리고 또 중요한 것은 이 시스템을 사용하려면 ‘내가 이 취지에 동의해!’라고 하는 일종의 연대 절차가 필요한데, ‘나도 여기 참여하고 있어!’, ‘나도 여기 기여하고 있어!’라는 나름의 프라이드 같은 것도요.
박지선
제일 중요한 것 같아요. 어떤 매체에 글을 써도 그런 태도로 쓰지는 않아요. 그러니까 그럴 때는 프라이드가 생길 수 있죠. 제가 예를 들어서 생태 전문 잡지 같은 데에 글을 쓴다면, 내가 그 매체의 취지에 동의하니까, 내가 그 잡지의 지향에 동의하기 때문에 쓰지만, 어느 공공 극장 기관지에 글 쓸 때는 그런 것 같지는 않거든요. 그런데 이제 ACTiO는 그런 프라이드를 형성할 수 있는 기본 방향이라는 게 있어서 가치 지향성이 있는 거죠.
우연
가치 지향 때문이기도 하고 스포트라이트 방식 때문이기도 할 것 같은데요. 이미 잘 아는 동료들임에도 불구하고 필진들의 글을 서로서로 더욱 집중해서 보더라고요. 또 역으로 글 쓰는 필진들도 익명의 독자보다 바로 내 곁의 뻔한 동료들이 사실 더 무섭기 때문에 더욱 긴장감 있고 정성스럽게 글을 쓰게 된다는 이야기도 하고요. 예를 들어 ‘이 사람이 지금 극장만 운영하는 줄 알았는데 이런 심미안을 내면에 감추고 있었네!’라며 감탄한다든가, (실명을 밝혀보자면) 김연재 작가의 글을 읽고 오세혁 작가가 ‘그리스 비극에 대해 이런 관점을 갖고 있다니!’라며 감탄한다든가, 동료들에 대해서도 이전에 발견하지 못했던 깊은 이해를 하게 되는 효과도 있었다고 봐요. 다른 매체보다 훨씬 높은, 필자 하나하나에 대한 스포트라이트식 집중도 굉장히 중요한 장점이라 생각합니다.
[계속 : 2월 첫 주에 ‘2부’가 이어집니다]
대화 나눈 이들
박지선
혼자, 때로는 동료들과 산책하며 낯선 길을 열어가는 것을 좋아합니다.
우연
무대 곁에서 일복이 많았습니다. 여전히 창작의 황홀함을 좋아하고, 그 힘을 믿습니다.
홍은지
상상을 현실로 옮기는 것이 즐거워 공연예술 연출, 축제·공간 운영 등의 일을 해왔습니다.
진행 및 정리 : 우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