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아

가장 나쁜 일에서조차 무엇인가를 ‘배운다’라고 말하는 것은 얼마나 위선적이고 또 위험한가. 게다가 그것이 친족 성폭력과 소아성애라면. 폴라 보글의 <운전 배우기(How I Learned To Drive)>는 목에 걸린 가시 같은 작품이다. 헛기침을 해 보아도, 밥 덩이를 삼켜도, 심지어 가시를 빼내어도 이물감이 남는다. 여러 번 이 작품에 관해 말하고 싶었고 무엇이 나를 계속 잡아끄는지 설명하고 싶었지만, 매번 언어를 찾지 못했고 매번 말을 삼켰다. 그렇기에 <운전 배우기>폴라 보글 작, 조최효정 연출, 극단 여행자, 여행자 극장, 2025.11.22.~11.30.가 공연된다는 것을 알았을 때 한달음에 극장으로 달려갔다. 창작자들은 이 작품을 어떻게 읽었을까, 그들은 관객에게 작품을 전달할 언어를 찾은 것일까.

롤리타가 말하는 롤리타 이야기

“누구도 이것을 연극으로 만들지 않을 것이고, 이 작품을 읽는다면 나는 돌에 맞아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번 공연의 리플렛에 ‘굳이’ 인용된 폴라 보글의 말이다. 연출가 조최효정의 고민과 결기가 느껴진다. 보글이 이 작품을 썼던 1997년보다 어쩌면 지금이 더 돌을 맞기 좋을 때가 아닌가.

보글은 이 작품을 나보코프의 <롤리타>로부터 영감을 받아 썼다고 말한다. 그러나 험버트가 아닌 롤리타의 관점에서, 남성중심적 낭만성을 벗어나는 동시에 롤리타를 그저 무력한 희생자로 보지 않는 이야기를 쓰고자 했다. 그런 이유로 작가는 작품의 두 주인공 릴빗 ‘자그마하다’ ‘조그많다’는 의미의 릴빗(Li’l Bit)은 주인공의 본명이 아니다. 펙이 갓 태어난 조카를 한 손에 안아 들고 붙여준 애칭이다.과 펙을 피해자와 가해자로 나누지 않는다. 이분법적으로 규정하는 것으로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관계의 복잡성을, 작가는 들여다보고자 한다. 거기에는 사랑과 집착, 그루밍 폭력과 조언, 정서적 착취와 위안, 미묘한 권력의 이동, 도발, 죄책감, 비밀스러운 쾌감 등이 모호한 덩어리가 된 채 얽혀있다. 상처 많은 소녀와 상처 많은 중년 남성이 서로를 ‘불법적’으로 ‘위험하게’ 보듬어 주었던 시간, 그래서 한쪽 다리는 위로에 한쪽 다리는 파멸에 담근 채 함께 지나온 시간에 관한 이야기다.

연대기적이고 선형적인 이야기 구조를 부러 해체하고 있는 것도 그런 이유다. 약 스무 개의 장면으로 구성된 이 작품의 시작은, 삼십 대 중반의 성인 여성인 ‘차분하고 부드러운 인상’의 릴빗이 비밀을 털어놓는 일의 어려움에 대하여 관객에게 직접 말하는 것으로부터다. 그는 ‘세상에 대해 냉소적이었고, 인생을 다 알았’다고 생각했던 열일곱 무렵의 자신을 소개한다. 1969년, 매릴랜드 시골 마을, 초여름 밤, 어두운 주차장, 릴빗은 이모부인 펙과 자동차에 함께 앉아 적절치 않아 보이는 성적 농담을 주고받으며 펙이 자신을 만지는 것을 허락한다. 릴빗은 펙에게 관계의 규칙을 제시하는 등, 어느 정도 주도성을 지닌 것처럼 보인다. 곧 대학에 진학하여 지긋지긋한 가족을 떠날 일을 말하는 동안, 펙은 그녀의 몸을 탐닉한다. 연극은 이 장면에 이어서 16세의 릴빗, 14세의 릴빗, 13세의 릴빗, 그리고 릴빗의 절연 선언으로 둘의 관계가 영원히 끝나게 되는 18세의 릴빗의 에피소드로 이어진다. 릴빗과 결별한 후 펙은 술에 절어 살다가 7년째 되는 해 집안 계단에서 굴러떨어져 쓸쓸히 죽는다. 뒤이어, 이 연극에서 가장 어두운 이야기, 11세의 릴빗의 이야기가 전개된다. 펙이 조카인 릴빗을 처음으로 성추행한 1962년 여름의 이야기다. 그런 후 극은 다시 현재의 릴빗으로 돌아온다.

펙을 이해한다는 것의 의미

극의 마지막 장면에서 릴빗은 펙을 ‘방황하는 더치맨’이라고 말한다. 바다를 헤매는 저주받은 운명의 인간, 7년에 한 번 뭍에 올라 자신을 구해 줄 소녀를 찾아야 하는 사내, 바로 그가 펙이라고. 이제 그때의 이모부만큼 나이 먹은 릴빗은 고통과 슬픔과 죄책감이 뒤엉킨 과거의 시간을 천천히 이해한다. 그럼으로써 펙도, 또 저 자신도 이해하고 용서한다.

작가는 펙을 “<앵무새 죽이기>의 주인공 애티커스 역에 맞을 만한 배우”<운전 배우기>, 폴라 보글 작, 이지훈 역, 지만지 드라마, 2019, 3쪽가 연기하여야 한다고 말한다. 정의롭고 사려 깊은 변호사이자 두 아이의 아버지인 애티커스 핀치의 이미지를 작가는 펙에게 부여하고자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펙을 단순한 아동성범죄자로 그리지 않으려 한다. 관객이 펙에게 정서적으로 다가가고, 나아가 이해하기를 원한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머리에서 알람이 울린다. 내가, 여기서, 이 이야기에 동의한다는 것은, 결국 여성 혐오와 화해하는 것 아닌가. 펙에게 연민을 느낀다는 것이, 도덕적으로, 또 사회적으로, 대체 무엇을 의미한단 말인가. 개인적으로는 펙을 동정할 수 있다고 하여도 결국 이는 성폭력 생존자들에 대한 모욕인 것 아닌가?!

원작은 관객이 릴빗과 펙의 관계에 다층적으로 접근할 수 있도록 섬세하게 구축되어 있다. 서른다섯이 된 성인 여성 릴빗의 회상을 따라가면서 관객이 서서히 진실에 다가가도록 한 방식, 릴빗과 펙을 제외한 다른 인물들을 세 명의 코러스, 즉 ‘남자 코러스’, ‘여자 코러스’ ‘십 대 코러스’가 각각 ‘일인 다역’을 맡아 진행하도록 한 일, 파편적으로 흐르는 시간, 회상 사이 사이에 끼어드는, 어쩌면 릴빗은 알 수 없었을 이야기들, 예컨대 펙의 아내이자 릴빗의 이모가 하는 독백, 펙이 낚시를 가르치며 조카인 다른 어린 소년을 유혹했던 일. 그리고 농담들, 유행가들, 판토마임과 막춤과 경쾌한 난장들.

조최효정 연출은 작품의 의도를 매우 성실하게 따라간다. 미드 센추리 모던 풍의 올리브 정사각형이 박힌 체커 보드 느낌의 무대 바닥이 깔린 빈 무대에는 두 개의 철제 의자만이 놓여 있다. 간결한 무대, 간결한 소품. 장면에 따라 테이블 하나와 의자 몇 개가 더 들어올 뿐이다. 때로 배우들은 퇴장하지 않은 채 무대 바깥쪽에 놓인 의자에 앉아 무대에서 벌어지는 일을 바라보기도 한다. 운전과 도로 주행이 이 작품의 중요한 메타포이기에 무대 우측에는 ‘안전제일’, ‘앞지르기 금지’ ‘일방통행’ ‘어린이 보호 구역’ 등과 같은 교통신호 표지가 프로젝션 된다.

정수영이 구현한 릴빗은 소위 ‘이런 이야기에서 사람들이 생각할 법한 소녀의 이미지, 혹은 여성의 이미지’가 아니다. 즉, 아름답고 섹슈얼한 몸을 지닌, 소녀였을 때조차 이미 성인 남성을 유혹할 육체를 지닌 여성이 아니다. 그 대신 그는, 때로는 천진하고 때로는 도발적이며, 대부분의 순간은 겁먹고 상처받았음에도 애써 이를 감추고 당돌하고 주체적이고 독립적이고자 기를 쓰는 어린 여성을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그런 배우의 힘으로, 13살 릴빗이 자신을 성추행한 이모부에게 스스로 먼저 다가가 “작은 악마처럼 짓궂게” 굴며 말을 걸고, 일주일에 한 번 만나 이야기하자고 제안하는 장면을 관객에게 납득시킨다. 권력은 펙에게만 있지 않다. 어른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 그럴 힘이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릴빗은 희미하게 깨닫는다.

연출가는 펙을 원작보다 더 호감이 가는 인물로 그려내고자 애쓴다. 객석이 펙을 동정하고 그의 불행한 죽음에 동요하길 원한다. 이는 매우 위험한 선택이지만 나름의 이유가 있는 선택이다. 폴라 보글이 원했던 논쟁의 한복판으로 관객을 데려가기 위해서 ‘돌 맞기 더 좋은 오늘날’에는 펙에 대한 정서적 장치가 좀 더 필요했을 듯하다.

도덕이 정답이라며 가리키는 방향을 수동적으로 바라보지 않는 일

이 작품에서 ‘운전 배우기’는 생존법에 대한 메타포다. 펙은 말한다.

“네가 차를 통제하고 있을 때 너는 너뿐 아니라 차와 길을 통제하고 있는 거야. 그 누구도 너로부터 떼어 놓을 수 없지. 그것이 힘인 거야. 난 어디에 있을 때보다 내차 안에 있을 때 나 자신을 느끼지. 그리고 그게 바로 내가 너에게 주고 싶은 거야. 세상에는 미친 사람들이 너무 많아. 미친 놈, 거만한 바보들, 술주정뱅이, 분노에 찬 아이들, 눈먼 노인네들 – 너는 그들과 맞설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해. 난 니가 남자처럼 운전하는 것을 가르치고 싶어.”위의 책, 73쪽

펙은 릴빗을 잘 가르쳤다. 그리고 펙의 가르침을 훌륭히 숙지한 릴빗은 그 길에서 결국 생존했다. 릴빗의 생존으로 펙은 파멸에 이르렀다. 이제 릴빗은 그 경험을 어떻게 이해하고 기록해야 하는지 안다. 그 과정에서 릴빗은 펙도, 또 자신도 용서한다. 그렇기에, 이 이야기는 무엇보다 자기 이해의 과정이다. 또한 그 과정을 관객에게 이해 시키려는 시도다.

도덕과 정의와 논리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이야기, 이미 정답이 정해진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리기로 결정한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 슬픔과 혼란과 죄책감이 뒤섞인 지점에 오래 머물며 충분히 시간을 들이기로 결심한 사람들을 위한 이야기, 그리고 이 모든 과정 중에도 계속 머릿속을 울려대는 알람을 끄지 않기로 한 사람들을 위한 이야기다. 그런 사람들이기에 연출가 조최효정과 극단 여행자의 다음 행보를 기다려본다.

이진아

비평을 필요로 하지 않는 시대에 비평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고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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