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미도

262년 만에 가장 더웠다는 2018년 여름, 당시 15살이었던 스웨덴의 그레타 툰베리가 ‘기후를 위한 학교 파업’ 피켓을 들고 매주 금요일 학교에 가는 대신 국회의사당 앞에서 1인 시위를 시작했다. 이 시위는 ‘미래를 위한 금요일(Fridays for Future)’이라는 기후정의운동을 세계적으로 확산시켰고 전 세계 수백만 청소년과 청년들이 기후파업에 동참했다. 그러나 생태전환의 속도에 비해 기후변화의 속도는 여전히 너무 빠르다. 어른들을 더이상 믿을 수 없으며 이런 지구환경에서는 아이를 낳는 것이 죄악이라고 생각하는 청년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2024년에 지구의 연간 평균온도는 이미 산업화 이전 대비 1.5℃를 넘겼다고 한다. 즉 지구 생태계를 환원할 수 있는 티핑포인트를 지났다는 말이다. SNS에서는 매일 세계 각지의 유례 없는 폭풍과 산불, 홍수와 산사태 소식들이 쏟아진다. 한편에선 해수면 상승으로 인해, 다른 한편에선 사막화로 인해 기후 이재민들이 폭증할 것이고 이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난민 문제와 영토 분쟁을 일으킬 것이다. 이제 전 세계적으로 기후변화에 의한 이재민이 1초에 한 명씩 발생하고 있다고 한다.

이스라엘과 미국뿐 아니라 유럽에서도 난민을 차단하려는 장벽들을 계속해서 높이 쌓고 있다. 어쩌면 파국으로 치닫고 있는 기후위기는 3차 세계대전을 일으켜 핵전쟁으로 파멸을 더 앞당기는 결과를 낳게 될지도 모른다. 미국 국방부가 기후위기를 분석한 보고서(2021)는 기후변화를 환경 이슈가 아니라 안보 질서를 재편하는 구조적 위협으로 규정하고 있다. 북극의 해빙은 새로운 항로와 자원 경쟁을 부추길 것이다. 미국이 그린란드를 넘보고 베네수엘라를 침공한 것은 국제사회의 비난을 감수하고라도 부족해질 자원을 선제적으로 확보하려는 극강의 자국중심주의 전략이다.

대혼란의 시대에 변화하는 행성, 지구를 위한 문학

아미타브 고시는 [대혼란의 시대](김홍옥 역, 에코리브르, 2021)에서 “우리 시대가 대다수 예술 및 문학 형식의 은폐 양식에 의존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스스로가 처한 곤경의 실상을 인식하지 못하도록 막는다”(22쪽)고 경고한 바 있다. 어느 곳에서나 문학적 창작은 종말론적 인식으로부터 영향을 받아왔지만 인류의 6차 대멸종이 과학적으로 예고되는 현시점에서 작가들은 애써 당면한 현실을 외면하고 있다고 본다. 과거의 문학이나 연극에서 기후 재난은 배경으로만 소비되거나 SF같은 장르문학으로 주변화되었는데 기후위기가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 된 오늘날, 작가들은 이 불편한 현실을 회피하며 너무 침묵하고 있지 않은가.

마틴 푸크너의 [변화하는 행성, 지구를 위한 문학](김지혜 역, 문학과 지성사, 2025)은 아미타브 고시와 비슷한 관점을 유지하면서 ‘기후 위기의 시대에 문학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진지하게 묻는다. 푸크너 역시 기후위기에 대한 과학적 데이터는 이미 차고 넘치지만 인류는 여전히 행동하지 않는다고 꼬집는다. 그 이유에 대해 푸크너는 우리가 지구를 이해하는 이야기의 틀이 낡았기 때문이라고 본다. 근대문학이 인간을 세계의 중심에 놓고 자연을 배경이나 자원으로만 활용했기 때문에 비인간적 관점에서 사고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하지만 푸크너는 문학과 예술이 언제나 ‘행성적’이었다며 소위 ‘세계문학’을 다시 들여다 보라고 권유한다.

문학 선집들은 문학 정전들에서 나타나는 변화를 연구하는 데에도 유용하다. 우리가 기후변화를 판단하기 위해 문학의 역사를 활용한다는 것은 환경문학의 새로운 정전을 만들어내는 것이기도 하거니와 과거와 현재의 정전들을 다르게 읽는 것이기도 하다. 이는 정전을 그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서는 안된다는 뜻이다. 사실 정전은 늘 바뀌고 그것은 기후변화 시대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특히 환경문학 정전의 부상이 새롭게 목격되었는데 주로 지난 2세기 동안에 집중된 현상이었다. 세계문학 선집들은 이처럼 정전이 형성되는 과정을 살펴보기에 용이하다.(106~107)

인간과 자연이 분리되지 않았던 고대의 서사시, 창세와 홍수와 종말의 이야기 속에 생태적 상상력을 담고 있었던 성서와 수많은 신화들, 대항해 시대의 여행기와 소설들, 이에 비해 자연을 배경으로만 등장시킨 근대 소설들, 포스트 휴먼을 다루면서도 주변부 문학으로 간주되었던 SF들… 즉 푸크너는 ‘행성적 독해’를 통해 세계문학 속에 내포되어 있는 기후, 생태계, 비인간 존재, 지질학적 시간들을 재발견, 재해석하며 우리의 문학적, 예술적 감각을 전환하라고 촉구한다.

마틴 푸크너가 [공산당 선언]에 주목한 이유

푸크너는 [공산단 선언]을 가장 성공한 세계문학 텍스트 중 하나로 간주한다. 푸크너는 [공산당 선언]을 이념적으로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기후위기를 서사화하는 데 유용한 ‘글쓰기 방식’에 주목한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먼저 자본가를 탈개인화했고 그 악당을 하나의 구조로 전환했다. 그리고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후자의 착취당하는 희생자 대중을 새롭고 능동적인 행위자, 곧 프롤레타리아로 바꾸어놓았다.”(137쪽) 즉 푸크너는 [공산당 선언]이 프롤레타리아를 산업화에 착취당하는 일단의 희생자들이 아니라 ‘새롭고 능동적인 행위자’로 탄생시킨 위대한 텍스트였다고 본다. “파리 코뮌과 러시아 혁명을 계기로 [공산당 선언]은 전 지구적으로 중요한 텍스트가 되어 마침내 세계사에 새로운 행위자를 등장시키려던 목표를 이루었다”(139쪽)는 것이다. 푸크너가 환경 변화와 관련하여 [공산당 선언]으로부터 특히 배울 것은 ‘나’가 아니라 ‘우리’로서 말하는 문장들, 감정이 아니라 구조를 서사화하는 언어, 개인적 비극이 아니라 역사적 조건을 드러내는 형식 등이다.

푸크너는 [공산당 선언]이 단순한 공산주의 선언문이 아니라 문학이 역사에 개입했던 가장 강력한 실험이었다고 강조한다. 이제 우리는 기후 위기 시대에 어떤 텍스트를 쓸 수 있는가. 어떤 형식과 문장들이 인류 대다수를 ‘행동하는 집단’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가 고민해야 한다.

기후위기는 우리가 함께 행동할 기회다. 인문학은 지구를 구하는 데 힘을 보탬으로써 스스로를 구할 수 있을 것이다.(중략) 자원 추출에 기대어 사는 이 이야기꾼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우리는 냉혹한 교훈과 뼈아픈 결론이 담긴 이야기에 기꺼이 귀 기울일까? 전에는 그랬다. 인간이 문학을 생산하는 이유는 어려운 선택을 피하지 않고 집단적인 행동에 참여하기 위해서이지, 그저 자기만족이나 얻으려는 것이 아니다. 결국 언어를 통해 우리 마음을 다스리는 능력이야말로 문화적 발전을 가속시킨 출발점이었으며, 그런 발전이 우리와 지구상의 다른 생명체들을 구별지었다. 이제 바로 그 의사소통 도구가 우리의 집단적 스토리텔링 활동에 보탬이 되어야 한다. 이제 전 세계의 이야기꾼들이 단결해야 할 때가 아닐까?(150~151쪽)

기후위기 시대에 춤을 추어라

기후정의운동에 앞장서 온 영화감독 이송희일은 [기후위기 시대에 춤을 추어라](삼인, 2024)에서 “바람에 파동을 맡기는 풀잎들, 짝짓기 춤을 추는 동물들, 그리고 태곳적부터 언제나 춤을 춰왔던 인간들에 이르기까지 지구는 애초에 춤의 행성”(474쪽)이라고 규정하며 죽은 것들에 대항하고 새로운 것들을 창조하기 위해 서로를 견고하게 연결하는 춤을 추라고 주장한다.

우리에겐 퇴각할 다른 행성이 없다. 더이상 물러날 벼랑도, 퇴로도 없다. 절망인가? 아니다. 오히려 그렇기에 반격이 가능하다. 희망은 ‘반드시 지켜야 할 것’의 염원에서 배양되기 때문이다. ‘물러설 수 없음’의 용수철에서 튕겨져나온 총알이기 때문이다. 유토피아에 대한 열망이 없는 행성은 죽은 행성이다. 이야기를 나누고, 저항하고, 상상하고, 서로를 조직하는 것, 끊임없이 장소를 찾아 나비처럼 모여들어 춤을 추는 것. 거기에 답이 있다고 믿는다.(477쪽)

아직 우리가 미래의 삶을 포기하지 않았다면 다시 한번 ‘집단적인 행동’을 통해 우리를, 우리가 만나는 관객을 ‘새롭고 능동적인 행위자’로 거듭나게 할 수 있지 않을까!

김미도

한국연극사를 연구하면서 표현의 자유를 수호하는 일에 관심이 많다.


ACTiO에서 더 알아보기

구독을 신청하면 최신 게시물을 이메일로 받아볼 수 있습니다.

인기 검색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