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희
군부독재의 역사를 갖고 있는 한국에서 ‘개인의 기억’은 강압적인 정부와 저항하는 개인 사이의 불협화음을 읽어내기 위한 좋은 키워드가 될 수 있다. 한국전쟁을 연구한 다수의 연구들이 개인의 기억이 만들어내는 대항 서사에 주목하고 있음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들은 오랫동안 반공이데올로기에 가려졌던 개인의 기억을 수집해, 국가가 묵인해 온 학살의 역사를 밝혀내거나 애도 되지 못한 이들의 죽음을 추모하는 데에 성과를 거두었다. 덕분에 우리는 한국전쟁을 ‘동족상잔의 비극’, ‘공산 세력의 불법 남침’으로 보는 단선적인 시각에서 벗어나 국가의 폭력에서부터 민간인 희생에 이르는 다양한 시각으로 한국전쟁을 기억하게 되었다.
비공식적인 개인의 기억들이, 국가가 주도하는 공식적인 역사를 비집고 그 모습을 드러내는 장소 중 하나가 연극 무대가 아닐까 싶다. 그러나 단일한 공식 역사를 목표로 했던 정부의 입장에서 역동적인 개인의 기억이 그리 반갑지만은 않았을 터, 비공식적인 기억을 무대화하는 일은 언제나 어려움이 따랐다. 신명순의 <증인>은 이러한 정부와 개인의 기억 투쟁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텍스트 중 하나다.
한강교 폭파 사건과 <증인>의 창작 배경
신명순의 <증인>은 1950년 6.25 전쟁 당시의 한강교 폭파 사건(1950.06.28.)을 배경으로 한다. 한강교는 일제에 의해 건설되어 1917년 개통한 다리로, 사람이 한강을 건널 수 있는 최초의 다리였다. 이 다리가 폭파된 것은 6.25 전쟁이 발발하고 불과 삼일 만에 벌어진 일로 한국전쟁 초기 남한의 불리한 전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였다. 이미 발표된 자료들에 따르면, 6월 27일 이승만 정부와 주요 인사들은 이미 서울을 빠져나간 뒤였고 전황은 급격히 나빠지고 있었다. 6월 28일 자정 무렵에는 북한군이 이미 서울 외곽까지 진출했고 서울 진입은 시간문제였다. 결국 국군은 북한군의 도하를 막기 위해 한강교 폭파를 결정했고 6월 28일 새벽 2시를 전후로 인도교 1개와 철교 2개가 폭파되었다.
수도인 서울까지 북한군이 진출한 상황에서 국군이 내릴 수 있는 결정은 많지 않았을 것이나, 한강교 폭파로 인해 너무 많은 희생이 빚어진 사실은 비판을 피해 갈 수 없었다. 국군이 미처 후퇴하기 전에 북한군이 서울에 진입한 것으로 오인, 다리를 조기 폭파하는 바람에 무기나 자원을 북한군에 고스란히 넘겨준 것도 문제였지만, 가장 큰 피해는 인명피해였다. 다리가 폭파될 당시 교량 위에는 많은 피난민들이 몰려 있었고 증언에 따라 다르지만 대부분 수백 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증언한다. 게다가 다리 폭파로 서울에 발이 묶이게 된 많은 시민들은 서울을 장악한 북한군과 몇 개월 후 서울을 탈환한 국군에게 자신의 사상을 증명해야 했고 이 과정에서 많은 고초를 겪었다.1
정부에 대한 비판 여론이 거세지자, 이승만을 비롯한 정부 각료들은 한강교 폭파에 대한 책임 소재를 분명히 하고 성난 민심을 달래줄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당시 공병감이었던 최창식 대령에게 폭파 명령을 내린 채병덕 육군총참모장은 이미 전사한 뒤였고 마땅한 책임자를 찾지 못하던 정부는 한강교 폭파 3개월 뒤인 9월 21일 최창식 대령에게 모든 책임을 지워 총살형에 처했다.2
책임자에 대한 처벌이 이루어졌다고 해서 한강교 폭파 사건의 진상이 국민들에게 낱낱이 밝혀진 것은 아니었다. 심지어 군 당국은 유가족들에게도 최창식 대령의 처형 통지를 해주지 않았고, 유가족들은 처형에 관한 소문을 듣고 그의 죽음을 알게 되었을 정도였다.3 다행히 4.19로 구정권의 잘못을 청산하자는 사회적 움직임이 시작되었고 한강교 폭파 사건은 여러모로 이에 부합하는 소재였다. 최창식 대령의 부인은 1961년 9월 남편의 죽음에 대해 재심을 청구했고 1964년 11월 무죄를 확정받았다.4
재심이 시작되자 언론에서도 한강 인도교 폭파 사건의 진상에 대해 대대적인 관심을 나타냈다. 특히 1964년 재심 재판 후반부로 가면, 원심의 재판 기록이 기사에 인용이 될 만큼 정보가 공개되지만, 정부나 군의 공식적인 입장 표명이나 국가적 차원의 사과는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논의의 초점으로 오로지 최창식 대령의 무죄 판정 여부에 맞춰져 있었다. 결국 <증인>의 탄생 직전 한강교 폭파 사건은 대중들에게 실체의 일부가 드러났을 뿐이며 여전히 이것이 공적 기억의 영역에서 다루어지고 있지는 않았던 것이다.
공연 중지 처분과 공적 기억의 균열
신명순이 한강교 폭파 사건을 극화하게 된 것은 1966년 무렵의 일로, 실험극장은 이 작품으로 제3회 동아연극상에 참가할 예정이었다. 작품은 최창식 대령을 모델로 한 남 대령이 억울하게 총살을 당하는 짧은 장면으로 시작해서 그의 부인인 양 여사가 변호사 윤일경에게 재심을 부탁, 윤일경을 중심으로 사건의 진상을 추적하는 것으로 구성되었다. 특히 후반부는 재심 재판이 벌어지는 법정을 배경으로, 결정적 증인인 정 신부가 등장해 정부의 잘못을 폭로하고 남 대령의 무죄를 증명하는 것으로 결말을 맺고 있다.
극 중 남 대령의 무죄 선고는, 단순히 13년 만에 억울한 누명을 벗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정부에 의해 주도된 공적 역사에 반하는 대항 기억을 호출하고 개인의 권리를 위한 투쟁의 요구로 확장되고 있었다. 윤일경이 재판 직후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우리의 권리를 찾기 위해서 투쟁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겁니다.”라고 남긴 후기는, 곧 이 작품을 관통하는 주제이기도 했다.5
그러나 <증인>의 공연은 원활하게 진행되지 못했다. 1966년 4월 26일에 실험극장이 <증인>으로 동아연극상에 참가한다는 보도가 나가고 이틀 만에 다른 작품으로 대체가 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진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일반에는 “불과 몇 해 전의 사건을 무대에 재현시키는 곤란성을 고려, 이같이 결정했”6고 아울러 극장 측의 사정으로 중단된 것으로 알려졌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그게 신문에 나니까 위에서 “저거 어떻게 해라.” 이렇게 된 거예요. 그래서 처음에는 공연과장이 나보고 오라고 그러더니 “그거 안 할 수 없어?” 그래. “아니 며칠 있으면 막 오르는데 무슨 소리예요?” 그랬더니 “그거 안 하는 게 좋을 텐데.” 그래 (의자 등받이에 기대며) 나 첫날은 그냥 헤어져 왔어요. “우리 합니다.” “잽혀 가도 좋아?” “아니 뭐 잽혀 가도 좋아요.” 그러고 나왔는데 이튿날에 또 부르고. 그 담엔 시공관 그 지금 명동극장, 그 극장이 있으면 (왼쪽을 가리키며) 그 극장 이쪽으로 연습실이 하나 어두컴컴한 연습실이 있어요. 그 연습장으로 모르는 사람이 두세 명씩 와서 아무 소리 안 하고 연습 구경하고 가고 이러는 거야. 그래서 아무래도 안 되겠다. 그리고 특히 중요한 거는 그거 때문에 전혀 엉뚱한 사람들이 피해를 입는 거에요. 예를 들면은 그 당시는 공보분가, 문화공보분가 그런데 그거 공연을 못 막으면은 공보부 직원은 책임을 져야 돼.7
공연 중단에 대한 관련자들의 기억은 세부적인 대목에서 약간씩 차이가 있다. 가령 유용환은 <증인> 공연 10여 일 전, 작가와 기획진이 공연 소식을 전하고 관련 정보를 얻을 겸 최 대령의 미망인 옥 여사가 운영 중이던 다방을 찾아간 것이 발단이 되었다고 기억한다.8 반면 당시 실험극장의 대표였던 김의경은 언론에서 이 작품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면서 상황이 악화되었다는 입장이다. 어찌 되었건 이미 이루어진 대본 검열에서 미처 걸러지지 못했던 문제가, 뒤늦게 관계자들의 심기를 거슬리게 했고 그 결과 공연 중지의 압력으로 들어온 것은 분명했다.
다음날 국립극장 무대에서 연습을 하고 있는데 객석 문이 열리면서 수십 개의 별이 들어서고 있는 것 같았다. 사실은 4, 5명의 육군 장성이 찾아온 것인데 단원들 눈에는 무수한 별로 보였던 것이다. 그들은 불문곡직하고 공연을 중단해야 한다고 요구하며 나섰다.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그것은 말할 수 없고 공연이 강행되면 그들 쪽도 몇 사람 다치고 당신들 극단 측도 무시하지 못할 것이라며 사뭇 협박조였다.9
실험극장은 공연을 강행하려 했지만, 육군 장성들이 연습실로 찾아와 공연 중단을 요구하며 단원들을 협박했다. 심지어 검열 담당관과 국립극장 홍보부는 비용 전액 변상과 극장 재대관까지 제시하면서 회유했고 결국 공연은 중지되고 말았다.10
늘 그렇듯 검열자들은 명확한 이유를 설명해 주지 않고 결과만을 통보하기 때문에, 공연 중지의 원인은 늘 사후적으로 추측해 보는 것만이 가능하다. <증인>의 공연 중지 사태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결과적으로 최창식 대령에게 무죄를 선고했으나 불과 2년 전의 일이었기 때문에 군 관계자들 입장에서는 <증인>의 공연 소식은 달갑지 않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특히 4.19 혁명으로 이전 정부의 상징적 존재였던 이승만이 물러났지만, 군부의 경우 별다른 책임을 지지 않았다. 군부를 바탕으로 성립된 당시의 정권 입장에서 한강교 폭파 사건이 재조명되는 것이 달갑지 않은 이유는 여기에 있었다.
무엇보다 박정희 정부는 한국전쟁을 반공의 영역에서 호출하는 전략을 선택하고 있었다. 정부가 주도하는 공적 기억 안에서 전쟁이 야기한 모든 피해의 책임은 북한이 져야 했다. 힘없는 개인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정부의 무책임한 모습은, 상기되어서는 안 되는 기억이었다.
1988년의 공연과 그 의미
1975년 명지전문학교 연극회는 제2회 정기공연으로 <증인>을 올리기 위해 대본 사전 심의를 신청했으나, 결과는 당연히 반려였다. 최창식 대령은 이미 무죄로 판결났지만 그것을 연극 무대에 소환하고 나아가 대항 기억을 만드는 행위, 투쟁하는 개인들이 마침내 승리를 거두는 작품을 만드는 행위는 받아들여지기 어려웠다.
<증인>이 무대를 통해 대중을 만나게 된 것은 1988년의 일이었다. 제작극회가 제40회 정기 공연 작품으로 <증인>(정진 연출)을 선정, 동아연극상에 참가한 것이다. 1988년은 한국의 정치가 민주주의의 궤도에 올라선 시기였다. 전 정권과 연루된 비리 조사를 위해 대대적인 청문회가 벌어졌고 10월에는 유신 이후 중단된 국정감사가 다시 이루어지기도 했다. 그동안 공연되지 못했던 정치극들이 대거 빛을 보게 된 것은 이 무렵으로, 신명순의 <증인>도 이 시기 공연될 수 있었다. 공적 기억의 균열이 비로소 새로운 역사로 재탄생하게 된 순간이었다.
김태희
꾸준히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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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논문 「한국 전쟁에 대한 기억과 연극의 재현 양상-신명순의 <증인>을 중심으로」(김태희, 공연문화연구 42, 한국공연문화학회, 2021)를 발췌, 요약한 글입니다. 신명순의 <증인>의 검열과 관련된 대본들은 현재 아르코예술기록원(서초)에 보관 중이며, 신명순의 <증인> 외에도 사전대본심의를 거친 5,970건의 대본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https://www.daarts.or.kr/)
- “한편, 이 한강철교폭파에 따른 웃지 못할 이야기가 있다. 9.28 수복 후 정부가 환도한 뒤의 일이었다. 그때 이른바 ‘도강파’다 ‘비도강파’다하는 어린애 장난 같은 말이 한창 유행했었다. 그 두 사이에 반목과 질시도 대단했다. 도강파는 자칭 애국자, 비도강파는 부역자란 낙인을 도매급으로 찍어버렸다. 도강파들은 한강교를 끊기 직전에 미리 알고 재빨리 가족을 이끌어 越江 피난한 소위 요인 족속들. 그 반면 거지반의 시민들은 도강의 혜택을 못 받은 채 서울서 괴뢰군의 입성을 보게 됐다.(후략)” – 「횡설수설」, 동아일보, 1962.07.10.
↩︎ - 「건국 10년 사건일지」, 경향신문, 1958.08.04.
↩︎ - 유가족들의 증언에 따르면, 최창식 대령의 처형 소식은 가족들에게도 전달되지 않았다. 그의 부인은 9.28 수복 이후에도 남편의 소식을 알지 못했고 간간이 처형되었다는 소문을 접했다고 한다. 군 당국은 1960년까지도 관련 통지를 해주지 않았고, 유가족은 4.19이후 과도정부에 “군인이 상관의 명령대로 일하다 죽었으니 시체만이라도 군묘지에 묻어주도록 탄원”했으나 소용없었다. 「“한강교의 원죄” 12년 최창식 대령의 유족은 말한다」, 동아일보, 1962.07.09.
↩︎ - 1961년 9월 재심 청구 이후, 1962년 5월 원판결의 부인, 무효가 선언되었고 1964년 11월 재심 군사재판에서 무죄가 확정되었다.
↩︎ - 신명순, 『신명순 희곡 선집1–우보시의 어느 해 겨울』, 예니, 1988, 89쪽.
↩︎ - 「실험극장의 <증인> 다른 작품으로 대체」, 동아일보, 1966.04.28.
↩︎ - 문경연, 「김의경 구술채록: 제2차 실험극장과 1960년대 한국연극(2011)」, 한국예술디지털아카이브. 2011, 26쪽. <https://www.daarts.or.kr/handle/11080/16214>
↩︎ - 유용환, 무대 뒤에 남은 이야기들, 지성의 샘, 2005, 48쪽.
↩︎ - 위의 책, 49쪽.
↩︎ - 문경연, 앞의 구술, 27~28쪽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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