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기웅
바냐 (소냐에게,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얘야, 나는 정말 괴롭구나! 내가 얼마나 괴로운지 너는 모를 거다!
소냐 어떡하겠어요. 그래도 살아야지요!
사이.
소냐 바냐 아저씨. 사는 거예요. 길고 긴 낮과 오랜 밤들을 살아 나가요. 운명이 우리에게 주는 시련들을 참아 내요. 지금도, 늙은 후에도, 쉬지 말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 일해요. 그리고 우리의 시간이 찾아와, 조용히 죽어 무덤에 가면 얘기해요. 얼마나 힘들었는지, 얼마나 울었는지, 얼마나 괴로웠는지. 하느님이 가엾게 여기시겠죠. 우리는, 아저씨, 사랑하는 아저씨, 밝고 아름답고 우아한 삶을 보게 될 거예요. 우리는 기뻐하며, 지금 이 불행을, 감격에 젖어 미소를 띠며 돌아보겠죠. 그리고 쉬는 거예요. 나는 믿어요, 아저씨, 나는 뜨겁게. 간절히 믿어요……. (바냐 앞에 무릎을 꿇고, 그의 팔에 머리를 기댄다. 지친 목소리로) 우리는 쉬게 될 거예요!
쩰레긴. 나지막이 기타를 친다.
소냐 우리는 쉬게 될 거예요! 천사들의 소리를 듣게 될 거고, 보석이 깔린 하늘을 보게 될 거고. 지상의 모든 악과 우리의 모든 고통이 세계에 가득한 연민 속에 묻혀 가는 것을 보게 될 거예요. 우리의 삶은 조용하고, 평온하고, 달콤하게 어루만져질 거예요. 나는 믿어요, 믿어요……. (손수건으로 그의 눈물을 닦는다) 불쌍한, 불쌍한 바냐 아저씨, 울고 있군요……. (눈물을 머금고) 아저씨는 즐거움을 모르고 살아왔지요. 하지만 기다려요, 바냐 아저씨, 기다려요……. (그를 안는다) 우리는 쉬게 될 거예요!
― 체호프 <바냐 아저씨> 중에서
내 나이 마흔넷에서 마흔일곱 살까지― 4년 동안 어느 대학 연극과 전임교수로 일했어.
서울에서 100Km쯤 떨어진 곳, 경기도와 충청북도의 경계에 있는 면소재지에 그 대학 캠퍼스가 있었어.
시골이었지.
적어도 스타벅스 같은 건 없는 동네― 시외버스 정류장에서 내려서 복숭아밭을 지나 산 중턱에 학교가 있었어.
연극과 한 해 입학생은 쉰 명 정도.
학생들은 열정과 투지가 넘쳤어.
매 학기마다 연극제작 수업으로 공연을 올리고, 재학생 절반쯤은 방학 때도 워크숍 공연에 참여했지.
거의 모든 학생들이 근처에서 자취 생활을 했어.
학교 기숙사에서 살 수는 없었어. 기숙사 문이 닫혀버리는 자정까지도 공연 연습이며 연기 수업의 실기발표 연습이 끝나지 않았으니까.
나는 극작 수업도 하고 연출론 수업도 맡았지만, 중요한 건 연극제작 수업.
1학기에는 3~4학년 연극제작 수업을 합반해서 서울에서 열리는 젊은연극제 참가 공연 제작을 지도했고, 2학기에는 졸업 공연―
졸업 공연은 레퍼토리가 정해져 있었는데, 무슨 얘기냐 하면 안톤 체호프의 4대 장막극을 번갈아 가며 올리는 게 전통이었어.
교수 부임 첫해의 졸업 공연은 <갈매기> 차례.
다행히 내게 친숙한 희곡이었어. <갈매기>를 번안해서 <가모메>란 제목으로 대본을 쓴 적 있었으니까.
아, 그 연극과에서 연극제작 담당 교수는 그저 지도하고 감독하는 정도가 아니라 실질적으로 거의 연출을 다 해. 학생 연출자는 교수의 연출 작업을 보조하는 역할을 하고.
이른바 도제식 연극제작 수업이랄까― 그게 교육적으로 가장 바람직한 방식이라곤 생각하지 않았지만, 여러 여건상 대안을 찾기가 어려웠어.
나도 정해진 수업 시간뿐만 아니라 평일 저녁 연습, 주말 연습을 함께 하며 학생들과 동고동락해야 했지.
그 졸업 공연 마지막 공연팀 마지막 커튼콜 후 그 자리에서 열린 졸업 축하 이벤트에서 나는 펑펑 울고 말았어.
어떻게 이렇게 아름답고 멋진 공연이 세상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이 구석의 작고 검은 방에서 이렇게 올라갈 수가 있는 걸까?
무대제작소도 없어서 주차장 아스팔트 위에서 무대세트를 만드느라 톱질하고 망치질하고 색칠하고…, 저녁밥 먹을 곳도 제대로 없어 학교 복도에서 컵라면을 먹고 연습장에 모여드는…… 그런 고행과도 같은 생활을 4년 동안 이어온 끝에, 마치 진창에서 피워올린 연꽃처럼……
실은 말야, 내가 울어버린 까닭엔 내 몹쓸 자의식도 불순하게 끼어들어 있었어.
그러니까 이런 거―
부임한 이래 난 꽤 당황하고 있었어. 서울에서 늘 번듯한 자리에서 남의 주목을 받으며 엘리트 예술가로 살아왔던 내가 시골 구석에 있는 이름 모를 학교, 열악한 환경 속에서 세상에 빛나지 않는 노동의 낮과 밤을 이어가자니…… 젊은 시절 군대에서 느꼈던 것 같은 전락감.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에 나오는 도쿄 토박이 ‘봇짱’이 시코쿠 시골 중학교 교사로 일하며 느꼈을 낭패감…
이듬해 봄부턴 학교 근처 동네에 거처를 얻었어.
1주일 중 절반은 서울 집이 아니라 그 작은 아파트에 묵기 시작했지.
학기 중에 서울에서 연극 작업을 해야 할 적이면 먼 길을 오가느라 힘에 부쳤어.
아무래도 그렇게 하는 연극 작업은 밀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었고, 동료들에게는 폐를― 그렇게 부끄러운 공연의 이력이 한 줄 한 줄……
사연 많은 2년을 보내고 났더니 재임용 계약이란 걸 해야 한다고 했어.
실은 난 근무 조건과 처우가 좋지 않은 계약직의 전임교수로 부임했던 터였거든.
2년 동안만 그렇게 근무하면 정규직으로 전환이 될 줄 알고 있었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았어.
연극과의 선배 교수들은 2년 더 계약직으로 일해주면 다음번엔 꼭 정규직으로 승급할 수 있도록 애쓰겠다고 나를 달랬어.
그런데 그 사이 대학 본부에서는 나 같은 계약직 전임교수가 정규직으로 전환되는 데 필요한 근무실적 점수를 턱없이 올려놓고 있었단 말야. 하지만 선배 교수들은 그런 제도며 규정 따윈 중요하지 않다고 했어― 중요한 건 대학 소유주의 마음에 드는 일이라고.
소유주란 누구냐 하면 학교 설립자의 아들― 대학 운영 비리로 표면상으론 일선에서 물러나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수렴청정을 하고 있던 이.
결국 난 지난 2년과 똑같이 1주일에 열다섯 시간이나 수업을 맡아야 하고 월급은 형편없이 적은 조건으로 2년짜리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어.
코로나바이러스가 덮쳐왔던 건 마지막 4년째의 봄.
실기 중심의 대학 연극과에서 코로나바이러스는 극복할 도리 없는 시련이었어.
학생들은 실기 수업을 대면으로 이어가기 위해, 또 학기 말 연극 공연을 취소 당하지 않기 위해 코로나에 안 걸리려 극력 애를 썼고, 그러느라 주말이 돼도 본가로 돌아가지 않았어. 다행히 그 시골 동네엔 코로나가 많이 퍼지지 않고 있었거든.
나도 여간해선 서울 집에 가지 않았지.
어차피 서울에 볼 일도 거의 없었어.
그 해엔 잡혀 있는 연출 작업이 없던 참이었거든. 더 이상 극작가로, 연출가로 날 찾는 전화는 오지 않고 있던 터라…
그렇다고 뭐, 덕분에 좀 쉬고 그랬던 건 아냐.
학교에 일거리는 더 늘어나 있었어.
코로나바이러스에 대처하자니 신경 쓸 일이 자꾸자꾸 생겨났어.
또, 마침 학과 커리큘럼 개편을 해야 하는 시기였는데, 어떤 사정 때문에 나하고 마찬가지 처지인 계약직 동료 교수하고 둘이서 학과장 선배 교수 대신 그 일을 거의 다 해야 했지.
새로 바뀐 근무실적 평가 기준을 충족시키자면 학술논문이란 것도 써야 했어.
1학기 말, 약식의 낭독공연 형식으로 치르게 된 <화염> 첫 공연을 앞둔 날엔 새벽 5시가 돼서야 퇴근을―
아, 그날을 기억하는 건, 그때 이불을 펴고 잠이 든 순간 전화벨이― 공연팀 학생이었는데, 떨리는 목소리로 코로나에 걸린 것 같다는 거야. 두 시간 후 난 그 학생을 내 자동차 뒷자리에 태우고 멀리 이천에 있는 병원으로 달리고 있었지.
<갈매기>, <세 자매>, 그리고 <벚꽃 동산>을 거쳐서 그해의 졸업 공연 레퍼토리는 <바냐 아저씨>― <바냐 아저씨>만큼은 내가 잘 모르는 희곡이었어.
코로나바이러스는 2학기 초가 되어도 가실 줄을 모르고 있었고, 제대로 공연을 치를 수 있을지 누구도 장담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는데도 적지 않은 4학년 학생들이 졸업 논문 대신 졸업 공연 참여를 선택했어.
그래서 쿼드 캐스트― 공연팀이 무려 넷.
학생들은 내게 호소해 왔지― 무관중 공연이라도 좋으니 졸업 공연 무대에는 꼭 서게 해달라고.
<바냐 아저씨>는 내 마지막 졸업 공연 지도가 될지도 몰랐어.
아무래도 학교를 떠나야겠다고 마음먹고 있었거든.
2년의 재계약 기간이 끝나가고 있었고, 정규직으로의 전환은 가망 없어 보였어.
내 노동 시간을 얼추 계산해 보면 최저임금에 가까운 월급을 받고 있는 지경인 것 같았어.
그곳에서 보낸 4년 세월은 무척 보람 있었고 더없이 소중했지만…… 하지만 난 지쳐있었고, 울분에 차있었어.
그 대학에 취직해서 그 고생을 하는 통에 연극 창작자로서의 황금기를 놓쳐버렸다고 깊이 탄식하고 있었어.
하지만 말야, 직장인이 사표를 던진다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더라구.
아무리 봐도 고용주는 나라는 계약직 노동자의 가치를 인정해주지 않는 것 같았고……
그 즈음, 나의 고용주― 아까 말한 그 대학 소유주란 이는 수렴청정을 끝내고 총장 자리로 복귀를 했는데, 선배 교수는 글쎄, 내 정규직 전환을 호소하는 이런 편지를 그이한테 보내겠다는 거야― 이 사람은 결혼도 하지 않아 처자식도 없고, 그래서 오로지 학교와 학생들을 위해 헌신하고 있노라고.
바냐 25년 동안 영지를 관리하고 일하면서, 아주 양심적인 관리인으로서 당신에게 돈을 보냈어. 하지만 그동안 당신은 한번도 나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지 않았지. 언제나, 젊었을 때나 지금이나, 당신에게 1년에 고작 5백 루블을 급료로 받았을 뿐이야. 동냥을 받듯이. 그런데도 당신은 단 1루블을 올려줄 생각도 하지 않았어!
<바냐 아저씨>의 주인공 바냐도 그때의 나와 같은 마흔일곱 살―
대학을 졸업한 젊은 지식인이었던 그는 가족의 유산인 시골 영지 관리인 노릇을 맡아 반평생을 부지런히, 고지식하게 일하며 살아왔어.
결혼도 안 하고― 혹은 못 하고, 자식도 없이 마흔일곱 중년이 돼버린 바냐는 희곡 <바냐 아저씨>의 시간 속에서 영지의 소유권자인 매부 세례브랴꼬프 교수에게 큰 배신감을 느끼고 자신의 온 인생을 후회하며 광분하지.
바냐 조용할 수 없어! (세례브랴꼬프의 길을 막으며) 기다려. 아직 끝나지 않았어! 당신은 내 인생을 파괴했어! 나는 살아 있었던 게 아니야. 살았던 게 아니라고! 당신 덕에 내 인생에서 가장 좋은 시간을 망쳤어. 파멸시켰다고!
밤늦은 시간 학교에 남아 졸업 공연용 대본을 윤색하면서 난 그런 바냐의 절절한 절규에 공명했어.
바냐 내 인생은 끝났어! 나는 달란뜨도 있고 똑똑하고 용감한데……. 만일 내가 정상적으로 살았다면 쇼펜하우어도 도스또예프스끼도 되었을 텐데…….
공연을 며칠 앞둔 날, 바냐 역을 맡은 학생 배우가 내게 물었어― 마흔일곱 살 먹은 사람의 감각이란 도대체 어떤 거냐고.
순간 나는 멍해져서 머뭇거렸어.
그러다 내가 되돌려준 말이 그런 고민과 연구는 연습 초반에 했어야지 이제 와서 그런 걸 물어보면 어떡하냐는 거였으니, 그때도 난 선생으로서 한참……
이렇게 답해줬더라면 어땠을까― 마흔일곱 살이란 한창의 시절이 이미 지나가버렸다고 느끼는 나이, 자기 인생이 이제 곧 저물 수도 있다는 걸 느끼는 나이라고.
그러니까 바냐의 조카 소냐는 바냐한테 그런 위로를 건넸던 거 아닐까? 이제 얼마 안 있으면 고단한 삶을 마치고 영원히 쉬게 될 거라고.
졸업 공연은 무사히 막을 올릴 수 있었어.
무관중 공연을 각오하고 있었는데, 다행히 좌석 거리두기를 해서 관객은 공연마다 한 서른 명쯤?
아, 그때 그거도 했었다― 스트리밍. 공연을 실시간으로 온라인 송출하는 거.
서울에서 영상감독 하는 후배가 장비들을 들고 내려와 주었고, 나도 카메라 한 대를 맡아 촬영자 노릇을 ―
그래서 학생 가족들도, 우리 연극과 졸업생들도, 학교를 떠나있는 옛 선생들도 멀리서 모니터로 그 공연을 지켜볼 수 있었지.
코로나 탓에 연습을 많이 못해서 부족한 점이 많았지만, 아름다운 공연이었어.
마지막 네 번째 공연팀의 첫공이자 막공― 마지막 소냐의 모놀로그가 끝나고, 암전이 되고, 커튼콜까지 마치고 나서는 예의 그 졸업 축하 이벤트.
4학년 졸업 예정자 학생들이 마스크를 쓰고 조심조심 무대로 모여들었어.
나는 축하의 인사말 대신 <바냐 아저씨> 무대에 놓인 기타를 집어들고 노래를 불렀어.
김광석의 <일어나>―
“검은 밤의 가운데 서있어 한치 앞도 보이질 않아.
어디로 가야 하나 어디에 있을까 둘러봐도 소용 없었지.
인생이란 강물 위를 끝없이 부초처럼 떠다니다가
어느 고요한 호숫가에 닿으면 물과 함께 썩어가겠지.
일어나 일어나 다시 한번 해보는 거야.
일어나 일어나 봄의 새싹들처럼.”
가사를 잘 들어보면 결코 희망만을 부르짖는 노래가 아냐.
인생이란 언젠가 물과 함께 썩어가는 거라잖아?
그런데 그런 처절한 비관을 내비쳐놓고 나서 후렴구에서 노래는 고조돼.
그래서 일어나라고, 절망을 딛고, 아니 절망을 잊고 다시 한번 해보라고, 봄의 새싹들처럼 기지개를 켜라고 외치지.
마스크를 쓴 학생들이 환호하며 “일어나” 하는 그 후렴구를 따라 부르기 시작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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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출처 : 체호프, 「바냐 아저씨」, 『벚꽃 동산 : 체호프 희곡 선집』(오종우 옮김, 열린책들, 2007)
성기웅
극작가. 연출가. 제12언어연극스튜디오 예술감독.
극작술과 연출술을 전수하는 책을 내겠다고 몇 해 전부터 기염만 토하고 있다.
12thtts@naver.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