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영

이 책에서 여러분은 ‘우리는 만성 질환이 있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상상할 수 없다’와 같은 문장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 문장은 끔찍하다. 이런 문장은 저자와 독자가 건강하다는 것을 명시적으로 말하고 있지는 않지만, 여전히 그 점을 암시하고 있다.1

네덜란드 출신의 철학자, 인류학자, 과학기술학 연구자인 아네마리 몰Annemarie Mol은 “표식되지 않은 정상성을 가정하는” 문장의 끔찍함을 위와 같이 말했다. 그는 “불멸이 아니며 질병에 대한 면역도 없”다는 ‘나’를 드러낸 후, 독자를 2인칭으로 호출한다. “독자 여러분, 당신의 정상도 여기에서는 전제되지 않는다”2고. 건강한 서술자과 독자을 ‘암시하는’ 문장들을 지적하는 이러한 태도는 서술과 독서에서 간과되기 쉬운 삶의 육체성과 연약함을 일깨운다. 이 글에서 다루려는 공연 또한, 상연 혹은 관람 도중 간과할 수 있는 삶의 육체성과 연약함을 도통 잊을 수 없게 만든다. 공연자와 관객뿐 아니라 옆 관객의 그것까지도 간과할 수 없도록 말이다. 무엇보다 공연을 보고 있는 혹은 하고 있는 ‘나’들의 육체성과 그에 따르는 연약함이, 잊을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상기시킨다.

꾸불꾸불하게, 꾸깃꾸깃하게

‘미친존재감 프로젝트’이하 미친존재감는 광기학Mad Studies에의 실천을 표방하는 예술창작 집단이다. 이들은 2022년 <미친집으로 초대합니다>에서 ‘탈시설/탈원화’에 초점을 맞추며 매드3 정체성을 드러내며 자신들의 삶의 터전을 바라봤고, 2023년 <미친식당 가오픈>에서는 ‘미친존재’4들과 그렇지 않은 존재들이 함께할 수 있는 ‘노동’의 개념과 실천을 고민했다. 지난 10월 17일부터 23일까지 서울 문래예술공장 갤러리M30에서 열린 <매드 어사일럼: 폐쇄병동에 대항하는 공간>이하 <매드 어사일럼>은 폐쇄병동에 입원했던 이들의 경험을 드러내는 공연, 그리고 그에 대항하는 곳을 상상해보는 전시가 어우러지는 ‘공간’이다. 미친존재감은 특히 공간에 대한 관심이 높은 그룹인데, 규약을 생성시키는, 그리하여 정상성을 강화시키는 공간 정치에 관심이 많기 때문이다. 거주 공간, 노동 공간을 상상하던 이들은 이제는 매드 정체성을 파생시킨ー작용적이고도 반작용적으로ー‘어사일럼asylum, 수용소·정신병원·보호시설·망명지’을 뒤흔든다.

<매드 어사일럼>은 미친존재감 구성원들이 만든 조형물과 관객 참여형 및 체험형 작품으로 이뤄진 ‘꾸불꾸불 전시회’, 그리고 그 전시 공간에서 진행되는 공연인 ‘꾸깃꾸깃 퍼포먼스’, ‘미쳐 날뛰는 토크쇼’ 등으로 구성되었다. 이중 공연들은 거의 공연자가 제 경험에의 당사자로서 말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는데, 이 장이 혼란스럽고도 즐거웠던 이유는 말의 맥이 당사자-화자의 것으로만 집약되지 않고, 자꾸 옆길로 새어나가는 듯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말하기의 실패로 환원되기보다는 도리어 실패를 끝없이 말하는 모종의 환류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전술했다시피 <매드 어사일럼>은 전시와 공연이 결합된 ‘공간’으로 보아야 한다. 정상성을 토대로 하는 각진 공간 규율들을 ‘꾸불꾸불’하고도 ‘꾸깃꾸깃’하게 주물럭거려 돌봄의 공간으로 바꾸어 놓는 것이 이들의 목표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 공연이 얼마나 잘 성사되었는지, 이 전시가 얼마나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는지는 이들에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전시는 생성 중의 것이고, 공연은 매일 움직이고 있다.

먼저 ‘꾸불꾸불 전시회’부터 얘기하자면, 동준이 자신이 살아왔던 도시의 이야기를 조형물, 음성녹음 등으로 들려주는 ‘동준씨티’가 전시장 전반을 관통하고 있고, 전시장 곳곳에는 관객이 자신의 문장으로 채워나갈 수 있는 전시물들이 함께 배치되었다. 특히 이곳의 중앙 부근 가장 거대하게 위치하고 있는 투명 기둥인 ‘보이지 않는 장벽’은, 자신이 겪었지만 언어화하기 어려웠던 어려움을 하얀 펜으로 함께 적어내는 기둥이다. 그 외에도 ‘회복의 지도’, ‘걱정숲’, ‘고생구름’ 등은 의료화된 광기에 대한 경험이나 사유를 써도 되지만, 스스로 생각하는 회복, “우리의 촉수가 어떤 존재들에게 예민하게 닿아 있는지”를 말해주는 나만의 ‘걱정함과 신경씀’, “치료나 해결을 꾀하기 위한 것이 아닌”5 제각각의 ‘고생’을 쓸 수 있는 장으로 마련되었다.

‘꾸깃꾸깃 퍼포먼스’는 이러한 전시 공간 사이 사이에서 진행되었다. 먼저 ‘영신대학교 제8회 미친 포럼’은 전영신이 세계적으로 유명한 시각예술 작가처럼 등장하고, 그의 작품 세계를 흠모하는 팬들‘덕후’ ‘평론가’ 등과 함께 자신의 작품들을 소개하는 식으로 진행되었다. 이 포럼은 영신의 예술 세계가 해설되는 자리였고, 이는 곧 영신의 ‘미친’ 경험이 해설되는 자리이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사유강제상태’라는 작품을 소개할 때 관객은 영신의 “사고회로가 24시간 작동하는 기간”6에 대해 알게 된다. 의료화된 용어로는 ‘급성기’ 즉 “환각, 망상 등의 정신증적 증상이 나타내는 때”(3쪽)이다. 그러나 영신은 이 시기를 “활성기”(4쪽)라고 재정의하며, 마치 “공장의 컨베이어 벨트가 쉼 없이 돌아가는 것”7 같다고 표현한다. “모든 것에 의미가 부여되고 모든 것과 연결되는” 즉 “끝없이 새로운 개념과 서사가 창조되”8는 기간이다.

‘신비의 집: 투명불투명 함께 있기’는 두 세계투명인간의 세계, 불투명인간의 세계를 살아가는 고유선의 미래의 공간을 함께 꿈꾸고 감각하는 시간이다. 유선은 자신이 이미 느끼고 있는, 혹은 지어가고픈 공간에 대해 소개한다. 그리고는 관객들에게 함께 원을 그리며 춤추기를 제안한다. 유선과 그의 가까운 친구들지우, 왈왈이 먼저 관객들의 사이사이를 원의 모양을 그리며 누빈다. 또한 이 춤에 권유받은 관객들이 일어나 함께 원을 그려 나가며 함께 원이 되어간다. 춤이 잦아든 후 관객들은 이 원의 대형을 크게 벗어나지 않은 채 앉아 유선이 ‘투명인간’ 은희에게 보내는 편지를 들었다. 유선의 경험과 그에 대한 술회는 투명인간 은희를 향해 쓰였다. 이 편지의 수신인은 투명인간 은희로만 한정되지 않는다. 환각 혹은 환촉을 넘어서는 그의 구체적인 “느낌”들. 관객들은 유선이 느꼈던, 그가 경험했던 것들을 전해 듣는다. ‘신비의 집’ 곧 “투명인간 세계와 불투명인간 세계가 함께 있으면서 서로를 끝없이 알아가는”(13쪽) 그곳은 유선의 고유한 감각이 현실/비현실로 판별 혹은 구분될 수 없는 곳이다.

이곳에서실패 말하기, ‘이곳의실패 말하기

이어 ‘미쳐 날뛰는 토크쇼’가 이어졌다. 그중 ‘폐쇄병동 격파하기’ 코너는 “세상에서 제일 약한 주먹으로 폐쇄병동을 격파”9해가는 시간이었다. 젠가 형태로 쌓인 박스들을 하나하나 꺼내며, 해당 박스에 적힌 키워드에 얽힌 미친존재들의 폐쇄병동 경험이 이야기되었다. 이렇듯 이야기가 하나씩 끌러지며 폐쇄병동 젠가는 구멍이 숭숭 뚫리기 시작했고, 이내 퍼포머들의 싱거운 가격에도 무너졌다. 그러나 퍼포머는 “폐쇄병동을 격파하는 것만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매드 정체성을 치료의 대상 나아가 격리/보호의 대상으로 보는 그곳으로부터 우리가 나온 것이 과연 맞는가, 그곳에의 경험을 몇 번이고 입말로 내뱉으면서 재구성하는 것이 진정 나를 자유롭게 만드는가, 의문이 지워지지 않기 때문이다. 폐쇄병동 경험을 과거형의 것으로 지칭할 수도, 즉 폐쇄병동을 지금의 나와는 무관한 지시대상으로 지시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은 ‘그곳’과 ‘이곳’을 관통하고 있는 ‘실패’에의 감각을 뒤집는다. 실패라고 불릴 만한 것들을 자랑하듯이 얘기해보는 것이다. ‘전국 실패 자랑’은 실패들을 자랑하는 5×5 빙고판을 활용하여 자신이 겪은 실패들을 이야기해나간다. 이미 키워드가 적힌 칸은 그 키워드에 얽힌 이야기를 다시 풀어내도록, 비워진 칸에는 새로운 키워드와 함께 이야기를 넣도록 하는 시간이었다.

그러나 이때 한 관객은 우리가 지금 자리하고 있는 ‘이곳의 실패’를 이야기했다. 그러자 여러 관객들이 오늘 공연에 참여하며 겪은 ‘보이지 않는 장벽’을 말하였다. 가령, 음식물 반입이 금지되어 시간이 지남에 따라 강렬해지는 허기를 채울 수 없다는 점,10 수어통역사와 농인인 자신 사이에 여타 관객들이 지나다니면서 수어통역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는 점 등이다. 그리고 ‘내가 이곳에 어떻게 존재하는지’ ‘다른 이들에게 어떻게 보일지’를 신경 쓰게 되니, 아무리 돌봄이 실천되는 영역이라 할지라도 자기 돌봄을 위한 행위들을 삼갈 수밖에 없게 된다고 토로하는 관객도 있었다. ‘돌봄’을 지향하는 공간임을 끊임없이 표방했던 이곳에서 도리어 돌봄의 실패가 두드러졌다.

그러나 나는 이곳에 도리어 ‘돌봄의 논리’가 작동되고 있음을 느꼈다. 아네마리 몰은 돌봄 실천에의 패턴을 밝히기 위하여 ‘선택의 논리’에 비추어 ‘돌봄의 논리’가 무엇인지를 밝혀나갔다. 돌봄을 윤리적, 정치적 의제로 삼아온 몇몇 이론가들처럼 그는 ‘서구’에서 ‘우리’는 정말 자율적인 개인인가, 라는 물음에 단호하게 ‘아니요’라고 단호히 말한다. 개인의 선택권은 훌륭한 이상이긴 하지만 이는 “사람들이 정말로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상황에서만 가능하다”는 점, 더구나 “병에 걸렸든 건강하든 거의 모든 사람이 선택에 능숙하지 않다는 점” 즉 “하나의 불확실한 미래와 또 다른 미래의 장단점을 저울질하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어렵다”11는 점을 지적하기도 했다.

여기서 돌봄의 논리를 떠올린 이유는 특히 이 관객의 이야기 때문이었다. 그는 공연에서 ‘안내’되는 자세신발 벗고 들어와 눕거나 편하게 앉기가 불가한 현재 몸 상태발목 골절를 이야기하며 그 자세에 동참하지 못한 느낌을 말했다. 게다가 그때 그는 자신의 취약한 가족을 함께 떠올렸다. 내 몸뿐 아니라 이곳에 존재할 수도 있었던 내 가장 가까운 타인의 몸까지도 떠올리는 것이다.

선택의 논리는 우리가 자유로운 개인이라고 가정한다. 돌봄의 논리는 무엇보다도 관계 속에 있는 존재로서의 사람에게 초점을 맞춘다. ―중략― 선택의 논리는 [홀로] 자유로워지고 싶어 하는 개인과 관련이 있지만, 돌봄의 논리에 속하는 개인은 홀로 남겨지면 죽을 것이다. 그들은 행동할 수 있는 바로 그 능력을 다른 사람들에게 빚지고 있다.12

몰은 한 당뇨병 환자가 “요즘 텔레비전에서 전쟁이나 난민을 볼 때면 저곳에서 당뇨병 환자들을 위한 인슐린은 어떻게 되고 있을까? 의구심이 들어요. 그들은 어디서 그걸 구할 수 있고, 어떻게 차갑게 보관하고 있을까요?”13라고 말했음을 떠올리며 위의 말을 덧붙였다. 우리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관계 속에 있는 존재”이자 “홀로 남겨지면 죽을”14 몸들임을 알고 있다. 만약 이 자리가 ‘완벽한 자리’로서 스스로 그 결괏값을 멈췄다면, 그곳에서 실제로 일어난 미스매치들 혹은 상상 가능한 미스매치들을 끄집어낼 수 없다가령 ‘여기서 불편함을 느낄 수 있는 몸인 줄 ‘알고도’ 온 것이지 않나’ ‘이러한 자리를 불편해할 또 다른 몸을 왜 ‘굳이’ 상상하는가’. 여기서 이 공연의 실패혹은 예상되는 실패는 끝없이 말해질 수 있다. 이곳에는 돌봄의 논리가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말하기들은 사실상 미친존재감의 ‘알은체’ 덕분에 가능한 것이기도 했다. 앞서 말했다시피 이곳은 계속해서 돌봄을 의식적으로 이야기하는 공간이었다. 돌봄을 말하는 공간 곧 돌봄이 실천되는 공간임을 추구하려면 결국 개개의 취약성, 그로 인하여 이 공간에서 느낄 개개의 불편함이 말해져야 한다. 즉 미스핏misfits15에의 호소들을 ‘모른 체’하거나 ‘모른 채’로 지나쳐버리지 않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자신의 취약성’을 현재 진행형으로 말하는 일이란 여간 쉬운 법이 아니다. 현존하는 내 취약성에 곧바로 영향을 줄 ‘낙인’이 무정하게 혹은 친절하게교묘하게 작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우려하고 있는 이에게 정상성의 규범과 어긋난 모든 표식은 은폐해야 하는 것, 즉 드러내지 않는 것이 더 수월하고도 합리적인 선택처럼 느껴지기 쉽다. 그래서 지금 여기서 이렇게 다들 자신이 겪고 있는 불편함을 말하는 순간, 나는 이 시공간에 작동하는 매커니즘의 정체를 고민했다. 취약성이 후일담이 아니라 지금의 발언으로 위치 지어질 수 있게 하는, 이 공간에 작동하는 ‘논리’16 말이다.

실제로 이날 어느 관객은 ‘신비의 집’ 시간에 촘촘히 앉아 있는 것이 불편했지만 한 공연자가 자신에게 눈짓으로 신경 써주며 자신의 불편함을 ‘알은체’해주어서 자신이 이곳에서 겪은 접근성이 이전과는 다른 것이었다는 소회를 말하기도 했다. 몰은 페이션티즘환자주의, patientism이 ‘정상성’에 복종하지 않는 삶을 위해 필요하다고 제시한 바 있다. 좋은 삶을 형성하는 방법을 탐구하기 위해서는 우리 삶을 인과적인 것으로 보며 ‘해결 가능한’ 것처럼 여기는 것보다 복수의 실천들이 비선형적이고도 ‘만성적’으로 전개되고 있는 것으로 보는 일이 필요하다고 봤기 때문이다.17

정말 ‘보이지 않는 장벽’들이 끝없이 말해질 수 있을 것 같았다. 실은 ‘어디까지 얼마나 말해질 수 있는 것일까’ 하고 잠시 불안하게 생각하기도 했다. ‘실패를 말하는’ 것이 곧 능력의 부재나 결여를 가리키는 결론으로 환원되지 않으려면, 또한 그것을 타자화하지 않으려면18 다시 한번 돌봄의 논리에 기대야 한다. “사실관계가 결정과 행동에 선행하는 것이 아니라, 기대하는 바가 무엇이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따라 달라진다”19는 사실을 상기하면, 기대되는 것들이 실현되지 않았다는 것실패은 끝으로 자리 잡지결과 않고 끝없는 진행실천이 된다. “‘보이지 않는 장벽’에 각자 생각하는 장벽을 가득 써서 이 투명한 기둥이 하얀불투명한 기둥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한 공연자의 말대로 우리는 결국 이 현장에서 각자가 느끼고 있던 불편에 대해 불투명하게 가시화함으로써 ‘알게’ 되었다. 여기서 수집한 지식들은 “현실에 대한 더 나은 지도를 제공하는 문제”20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어디에서나 적용 가능한 지식을 수집했다기보다는 “현실과 함께, 또는 현실 속에서 더 잘 견딜 만한 생활 방식을 만드는 문제”21를 고민하게 했다는 것이 더 적절해 보인다.

이 앎들은 끝없이 변할, 끝없이 실패할, 그래서 끝없이 성취할 수 있다고 믿을 만한 것들이지 않을까. 매일 부서질 결과를 마주하는 일은 퍽 피곤한때로는 절망스러운 일이지만, 타인과 부대끼며 살아갈 수밖에 없고 매일 같이 변하는 자기‘들’과 함께 산다는 것은 지극한 현실이다. 이 현실을 더 이상 괴롭지 않게 여기려면 자기완결적·자기폐쇄적 신화에서 벗어나야 하지 않을까. 공연의 끝에 다다랐음에도 박수를 주고-받는 커튼콜은 없었다. 대신 다 함께 단체 사진을 찍으며 외쳤다, “우리는 미쳤다!”고.

장기영

비평이 더욱 ‘알 수 없어’지길 원한다. 연극에 대한 말하기와 글쓰기가 더 터져 나오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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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아네마리 몰, 『돌봄의 논리』, 김로라 옮김, 갈무리, 2025, 48쪽. ↩︎
  2. 아네마리 몰, 위의 책, 48쪽. ↩︎
  3. 최근의 정신장애운동은 ‘정신병’ ‘질병’ ‘질환’이라는 언어를 거부하고 ‘매드Mad’라는 용어를 정체성의 일환으로 재정의하는 경향을 띠며 전개되고 있다(매드 프라이드 운동Mad Pride activism, 매드 포지티브 운동mad-positive activism 등). 라셰드는 정신장애인 당사자운동에서 당사자들이 자신을 재정의하는 정체성이 외부에서 부착된 ‘환자’라는 꼬리표에서 벗어나 어떠한 표현들로써 전개되어 왔는지 소개한다(‘소비자consumer’ ‘생존자survivor’ ‘환자경험자ex-patient’ ‘이용자user’ 등). ‘매드’는 ‘퀴어Queer’라는 용어가 성소수자 운동의 맥락에서 재탄생한 것과 유사하게, 기존의 사전적 정의로는 부정적·비하적 의미를 전복적인 방식으로 재전유하는, 즉 당사자운동의 언어정치적 표현이다. 정신장애운동의 역사 및 용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모하메드 아부엘레일 라셰드, 『미쳤다는 것은 정체성이 될 수 있을까?』, 송승연·유기훈 옮김, 오월의봄, 2023, 37~92쪽 참조. ↩︎
  4. 미친존재감은 매드 정체성을 자기 정체성의 일부로 밝히며 창작자로 참여하는 이들을 명사형 표현으로써 지칭할 때 ‘미친존재(들)’이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해왔다. 그 외에도 미친존재감은 무언가를 지시할 때 ‘미친’이라는 수식어를 붙여 그 지시 대상의 매드 정체성 및 그와 관련된 경험, 혹은 거기서 파생될 수 있는 사유를 유도한다미친 공간, 미친 포럼 등. 공연 제목인 <매드 어사일럼> 또한 기존의 폐쇄적이고도 의료화 및 규율화된 어사일럼asylum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그 경험을 ‘거쳐온’ 이들이 상상하거나 재현할 수 있는 어사일럼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
  5. <매드 어사일럼> 리플렛 중에서. ↩︎
  6. <매드 어사일럼> 관객용 대본, 미친존재감, 2025, 5쪽(이후 본 공연의 대본을 인용할 때는 쪽수만 기재). ↩︎
  7. <매드 어사일럼> 전시작품 중 ‘사유강제상태’의 캡션 내용 중에서. ↩︎
  8. <매드 어사일럼> 전시작품 중 ‘사유강제상태’의 캡션 내용 중에서. ↩︎
  9. <매드 어사일럼> 리플렛 중에서. ↩︎
  10. 미친존재감의 공연들은 대개 간식이 준비되어 있다. 이번 공연에서 음식물 반입이 금지된 이유는 해당 공연이 이뤄진 장소의 자체 운영 규칙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
  11. 아네마리 몰, 앞의 책, 35~36쪽. ↩︎
  12. 아네마리 몰, 위의 책, 174~175쪽. ↩︎
  13. 아네마리 몰, 위의 책, 174쪽. ↩︎
  14. 아네마리 몰, 위의 책, 174~175쪽. ↩︎
  15. 이 글에서 ‘미스핏misfits’과 ‘미스매치’를 구분하여 사용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미스매치’는 어느 환경과 몸혹은 정신의 ‘부조화’를 단순 지시하기 위해 사용한 은유적 표현이다. 그러나 ‘미스핏’은 장애학적 관점에서 사용되는 용어로서 환경과 몸혹은 정신의 부조화가 도리어 그 환경의 비장애중심주의ableism를 드러낸다. 즉 어느 환경과 몸혹은 정신이 부조화될 때, 단순히 그 부조화 자체를 지시하기보다는 몸혹은 정신의 취약성이 ‘부적합한’ 것으로 가시화되는 ‘배치’를 가리키려는 용어이다. ↩︎
  16. 이 글에서 주로 몰의 책을 인용하는 이유가 이 단어 때문이기도 하다. 몰은 사건들 사이 친연성, 질서화의 양식들을 말하기 위하여 ‘담론discourse’보다는 ‘논리logic’를 사용한다. 그의 관심사가 사회 물질적 질서나 그 과정에 관여하는 권력보다는 “실천의 합리성”에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논리’로써 돌봄을 살피는 일은 그것이 “실천되는 현장이나 상황에서 어떤 것이 적절하고 논리적인지, 어떤 것이 그렇지 않은지를 탐구하도록 유도하는”, 그럼에도 “국지적이고 취약하여”서 어디에나 적용 가능한 단수화된 양식을 환상하는 일에서는 벗어날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아네마리 몰, 위의 책, 39~47쪽 참조. ↩︎
  17. 아네마리 몰, 위의 책 48~53쪽, 119~121쪽 참조. 참고로, 몰은 ‘환자주의’가 질병에 걸린 몸은 통제가 불가하다는 사실, 즉 “돌볼 수는 있지만 예측 불가능하고 불규칙한 것으로 남는”(50쪽)다는 사실을 간과하지 않는다는 점에 의하여, 건강한 부분만 해방의 기회를 갖게 하는 ‘시민주의’의 불완전성을 지적한다. 환자주의는 ‘정상성’에 복종하지 않기 위한 좋은 대안이 된다. “연약하면서도 즐거움을 경험할 수 있는 몸으로 어떻게 살 수 있을까?”(121쪽) 즉 “반드시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신체를 조율하고, 존중하고, 영양을 공급하고, 심지어 즐기기까지 하는 문제”(50쪽)를 다루기 위해선 질병에 걸린 신체에 세심히 주의를 기울이는 ‘돌봄’의 논리가 우리에게 더 필요한 논리일 테다. ↩︎
  18. 자신의 어떤 경험을 실패한 무엇 곧 그 지나간 일의 의밋값을 실패로 상정하여 이야기할 때 서술 대상으로서의 나과거의 나 또한 타자화된다. “과거의 실패에 대해 이야기하면, 다 같이 과거로 돌아가 그 실패를 하지 않게끔 필요한 돌봄을 찾아주는 거예요. 그런데 연습을 하다가 영신이 해준 말이 가슴에 박혔어요. ‘이게 정말 실패라고는 생각 안 해요.’ 과거의 경험을 실패로 규정시킨다는 게 문제였어요. 과거로 돌아가 그 실패를 하지 않게끔 해주겠다는 것도 문제였죠.” <매드 어사일럼> 리플렛 중에서. ↩︎
  19. 아네마리 몰, 위의 책, 51쪽. ↩︎
  20. 아네마리 몰, 위의 책, 135쪽. ↩︎
  21. 아네마리 몰, 위의 책, 135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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