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미도

올해는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건이 점화된 지 10년째 되는 해였다. 아니다. 연출가 남인우가 빨간줄이 그어진 대본을 받았던 때로부터는 12년이 지났다. 남인우는 2022년에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고, 2025년 7월에 항소심에서 승소하며 기나긴 싸움에서 겨우 벗어났다.

남인우는 2013년에 국립극단에서 공연된 <구름>(2013.9.24.~10.5, 백성희장민호극장)의 연습과정에서 당시 국립극단 사무국장이었던 최OO으로부터 곳곳에 빨간줄이 그어진 대본을 전달 받았다. 최OO은 블랙리스트 진상조사위원회에서 그 대본을 당시 예술감독이었던 손진책으로부터 받았다고 진술했으나 빨간줄이 그어진 대본을 남인우과 같이 확인했던 장면은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었다.

국립극단의 블랙리스트 사례집 발간과 최OO의 사과

2020년 11월에 김광보 예술감독 취임한 이후, 국립극단에서는 자체적으로 블랙리스트 사례집 발간이 추진되었다. 그 과정에서 2021년 8월 19일에 <구름> 공연팀의 스태프와 배우들이 한자리에 모였고, 최OO 전 사무국장이 빨간줄 사태에 대해 공식적으로 사과했다. 그 후 남인우가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의 피고는 ‘대한민국’과 ‘재단법인 국립극단’이었다. 2024년 10월 16일에 나온 1심 판결에서 서울중앙지법(판사 최미영)은 원고 승소 판결했다. 판결문1 중 ‘손해배상 책임의 발생’ 부분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이 사건 보고서의 완성 및 보고일자는 2013. 9. 12.로, 원고가 최OO으로부터 붉은 줄이 그어진 대본을 전달받은 2013. 9. 10.경에 가까운 점 등에 비추어 보면, 피고 대한민국 소속 성명 불상의 공무원은 이 사건 연극의 대본을 검열하여 그 일부 내용에 관하여 삭제 또는 수정 등의 조치가 필요하다고 판단하였고, 손진책을 통하여 원고에게 일부 내용에 붉은 줄을 그은 대본을 전달하였던 것이라고 인정할 수 있다. 피고 대한민국 소속 성명 불상의 공무원과 피고 국립극단 소속 손진책의 위와 같은 행위는 헌법에 위배된 행위로서 불법행위에 해당한다고 봄이 타당하다. 따라서 피고들은 공동하여 원고가 입은 손해를 배상할 책임이 있다.

이 판결문에 의하면 “피고 대한민국 소속 성명 불상의 공무원은 이 사건 연극의 대본을 검열하여 그 일부 내용에 관하여 삭제 또는 수정 등의 조치가 필요하다고 판단하였고, 손진책을 통하여 원고에게 일부 내용에 붉은 줄을 그은 대본을 전달하였던 것이라고 인정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이 판결에서 빨간줄을 그은 주체가 누구인지는 여전히 분명치 않다. ‘성명 불상의 공무원’은 수정 조치가 필요하다는 판단만 하고 손진책에게 이를 어떤 식으로든 조치하도록 하였는지, 아니면 공무원의 의견을 들은 손진책이 빨간줄을 직접 그은 후 최OO 사무국장을 통해 남인우에게 전달했는지 불분명하다. 그러나 빨간줄을 그은 진짜 주체가 누구이든 간에 손진책은 빨간줄 사건의 ‘공범’임이 분명하다. 성명 불상의 공무원이 빨간줄을 그은 주체라 하더라도 손진책은 그 공무원의 ‘지시’를 ‘이행’함으로써 ‘순차 공모’한 공범인 것이다. 위 판결문은 대본에 빨간줄을 그은 행위가 명백히 ‘헌법에 위배된 행위로서 불법행위’임을 분명히 밝혔다.

국립극단은 항소했어야만 했나

국가배상소송에서 국가를 대리하는 법무부와 국립극단은 1심 판결에 불복하며 항소했다. 국립극단측은 국립극단 이사회에 문체부 국장이 당연직 이사로 포함되어 있기에 항소하지 않으면 배임이 될 수 있다는 이유를 내세웠다. 항소심에서 쟁점이 된 부분은 손해배상 소멸시효에 대한 것이었다. 국가배상소송의 경우 사건이 있었던 날로부터 5년, 국민이 손해나 가해자를 안 날로부터 3년 내에 소송을 제기해야만 한다는 점에서 법무부와 국립극단 이사회는 블랙리스트 진상조사위 조사를 기준으로 이미 소멸시효가 완료됐다고 봤다. 하지만 항소심 재판부인 서울중앙지법 제 11-2민사부(재판장 환순교)는 최OO 사무국장이 빨간 줄이 그어진 대본을 시인한 2020년 4월에서야 남인우 연출가가 문체부 공무원과 손진책 예술감독의 검열 행위를 확실히 인지한 만큼 이때를 기준으로 소멸시효를 정해야 한다고 보았다.

앞서 든 증거들에 변론 전체의 취지를 더하여 인정되는 다음과 같은 사정, 즉 원고는 최OO이 이 사건 연극 대본에 대한 검열 사실을 인정한 2020. 4. 28.경 2이전까지는 공권력의 불법적인 개입으로 인하여 이 사건 연극 대본에 대한 검열이 이루어졌다는 점을 알기 어려웠을 것으로 보이는 점, 공권력의 개입에 관한 증거 입수의 현실적 곤란을 고려하면 원고가 국가를 상대로 소를 제기하여 손해배상을 받아낼 것을 기대하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던 점, 피고 대한민국 소속 공무원 및 피고 국립극단 소속 예술감독 등이 이 사건 연극 대본에 대한 검열 사실을 묵비함에 따라 진상조사위원회도 이 사건 연극 대본에 대한 검열 경위를 밝혀내지 못했던 점 등을 종합하여 보면, 적어도 위 2020.4.28.까지의 기간 동안에는 피고 대한민국을 상대로 손해배상청구를 할 수 없는 객관적 장애가 있었다고 봄이 타당하다.(중략)

나아가 피고 대한민국 소속 공무원에 의한 이 사건 연극 대본에 대한 검열행위는 건전한 비판을 담은 창작활동을 제약할 수 있어 헌법의 정신에 어긋나고, 법치주의를 수호하고 적법절차를 준수해야 할 공무원의 의무를 심각하게 위반한 것으로서 통상 발생하는 공무원의 불법행위와는 달리 채권자 보호의 필요성이 커 그 채무이행의 거절을 인정함이 현저히 부당하고 불공평하다 할 것이므로, 이 사건에 있어서는 피고 대한민국이 그 소멸시효의 완성을 주장하는 것은 권리남용으로서 허용될 수 없다.

따라서 피고 대한민국의 이 부분 항변은 이유 없다.3

남인우가 2심에서도 승소한 후, 국립극단(예술감독 박정희)은 항소심 판결에 승복했고 법무부는 대법원에 상고했다. 국립극단의 상고 포기는 환영할 만하지만 항소부터 포기했어야 마땅하다. 남인우는 국립극단이 법무부와 함께 항소에 참여하는 것을 보면서 다시 한번 마음의 상처를 크게 받았다.

1심과 2심 모두 남 연출가가 승소한 뒤 국립극단은 항소심 판결에 승복했다. 대법원에 상고해도 승소의 가능성이 없다는 법률 자문을 받은 후 예술감독 직권으로 결정한 것이다. 하지만 법무부는 항소심 판결에 불복해 최근 대법원에 상고했다. 이와 관련해 국립극단 관계자는 “만약 대법원에서 법무부가 승소하더라도, 국립극단은 항소심 판결에 승복한 만큼 남인우 연출가에게 손해배상을 할 예정”이라면서 “남 연출가가 소송 과정에서 많이 힘들어했던 것을 알고 있다”며 재판에 대한 유감을 표했다.

소송을 시작한 이후 남 연출가는 마음고생을 적지 않게 했다. 특히 법원에서 조정을 권유받았을 때 합의하기로 했던 법무부와 국립극단이 얼마 뒤 조정을 거부하고 재판을 받겠다고 나선 것에 충격을 받기도 했다. 남 연출가는 “법무부와 국립극단이 공소 시효가 만료됐으며 배상액이 크다는 이유로 합의를 부인했다. 당시 정권이 교체됐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때 어머니상을 치르면서 받은 조의금을 가지고 변호사를 찾아갔다. 이후 1심에서 이겼지만, 국립극단이 항소하는 것을 보면서 마음의 상처를 많이 받았었다”면서도 “이번 소송을 시작한 취지는 검열이 예술가들에게 얼마나 큰 고통을 주는지 알리는 목적과 함께 국립극단 등 예술기관이 독립성을 가지지 못한 채 정치 권력과 문체부 관료주의에 좌지우지된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피력했다. 그러면서 “검열이 이런 국가 시스템 속에서 작동한다는 것을 판결문으로 남김으로써 국립극단 등 예술단체가 독립성을 지키는 데 도움이 되길 바란다”고 강조했다.4

남인우가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하고 승소한 것은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는 대한민국의 헌법적 가치를 재확인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매우 크다. 또한 항소와 상고 과정에서 국립극단이 여전히 독자적 행보를 하지 못하고 문체부나 법무부라는 거대 권력기관에 휘둘리는 과정을 확인한 것은 향후 국립극단이 독립성을 확보해야 할 큰 숙제를 다시 한번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손진책은 끝까지 침묵할 것인가

그러나 무엇보다도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채 남인우에게 남아 있는 가장 큰 상처는 연극계의 스승과 다름없는 손진책 전 예술감독의 사실 인정과 사과를 받지 못한 점이다.

한편 이러한 제도 개선 외에 박근혜 정부 시기 국립극단 예술감독이었던 손진책의 공식적인 반성도 중요하다. 손진책은 당시 국립극단의 공연들에 가해진 각종 검열 사건들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했다는 점과 국립극단의 최종 의사결정자였다는 점에서 예술현장과 국민들 앞에서 책임감 있는 모습을 보여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진책은 지금까지도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 제가 받고 싶은 오늘의 사과는 사실, 저기 객석에서 저희들의 대사를 실제로 검열하셨던 손진책 감독님의 그 발언에 대한 사과를, 저는 당사자한테 듣고 싶었거든요.”(「블랙리스트 사례집」 90쪽)

“(…) 손진책 감독님이 저희 연습을 보면서 ‘이 대사 바꿔’, ‘이런 거 이상해’한 것도 생각이 나요. 저희 원래 000선배님의 첫 의상이 빨간 내복이었어요. 그런데 빨간 내복을 ‘야! 국립에서 어떻게 그렇게 천박하게, 빨간색이 위협적이잖아’ 하면서 바꾸라고 했어요. 근데 우리가 그냥 딱 생각했을 때 내복은 빨간 내복이 너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데 이게 빨간색이라고 안 되는 건가? (…) 너무 말도 안 되는 이유라고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부랴부랴 첫 잠옷이 바뀌었거든요.”(「블랙리스트 사례집」 91쪽)

<개구리> 이후 손진책은 국립극단에서 예술감독이 아니라 정부가 파견한 검열관이었음을 증언하는 후배 예술인들의 목소리가 이렇게 존재함에도 미학적 차원의 조언이었을 뿐이라는 변명만을 내놓을 뿐이었다. 손진책은 현재 매년 30억 원이 넘는 세금이 투여되는 대한민국 예술원 종신회원이다. 즉, 국민과 예술현장에 씻을 수 없는 상처와 갈등을 남긴 책임이 있는 인물이 반성도 없이 세금으로 매달 180만 원의 수당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손진책은 박근혜 정부 당시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문학 분야 검열에 책임이 있음에도 단 한 번의 사과 없이 한국문학관 추진위원, 2023년 서울국제도서전 홍보대사를 맡았다가 비판 여론에 자진사퇴를 거듭한 오정희 예술원 종신회원과 닮은꼴이 아닐 수 없다.5

손진책은 명백히 블랙리스트 가해자임에도 불구하고 빨간줄 사건 발생 후인 2017년 7월에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으로 선출되어 큰 영예와 지원을 누리고 있다. 손진책이나 오정희 같은 블랙리스트 실행자들을 예술원 회원으로 받아들인 대한민국 예술원은 이제라도 그들의 회원 지위를 박탈해야 마땅하다.
 

김미도

한국연극사를 연구하면서 표현의 자유를 수호하는 일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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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남인우 제공, <사건 2022가단5301930 손해배상(기)>, 판결문, 2024.10.16. ↩︎
  2. 2020년 4월 28일은 최OO 전 사무국장이 남인우 연출가를 개인적으로 만나 진실을 처음 시인한 날이다. ↩︎
  3. 서울중앙지방법원 제 11-2민사부 「사건 2024나72363 손해배상(김)」 판결문, 남인우 제공. ↩︎
  4. 장지영 선임기자, 「〔단독〕 2013년 국립극단 검열 사태는 끝나지 않았다… 국가, 대법원 상고」, 국민일보, 2025.07.08.
    <https://www.kmib.co.kr/article/view.asp?arcid=0028363950&code=61171211&cp=nv>(검색일: 2025.08.25.) ↩︎
  5. 홍태림, 「끝끝내 퇴치해야 할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유령」, 시민언론 민들레, 2024.02.07. <https://www.mindle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7112&fbclid=IwY2xjawMZDKVleHRuA2FlbQIxMABicmlkETFPQUQxS1RGQzE4bE9xd3M1AR5ZWnjLg80K_PJWXoA5r23GJo4stGrkhEzF-1iOKqg5kFTyvzTWF-nje5PEGQ_aem_1jP9Ih1qX_QklmuditiWZQ>(검색일: 2025.08.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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