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진모
아스트로프 뭐 새로운 소식이라도 없나?
바냐 없어. 모든 게 그대로야. 나는 옛날 그대로야. 아니, 어쩌면 오히려 더 나빠졌을지도 몰라.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늙은 갈가마귀처럼 깍깍거리며 불평이나 하고 있지. 늙은 까치 같은 우리 어머니는 여전히 여성 해방론만 떠들고 계셔. 한쪽 눈으로는 무덤을 보고 있으면서, 다른 눈으로는 그 알량한 책 속에서 새로운 인생의 여명을 찾고 계시거든.
– 체호프, <바냐 아저씨> 중에서
희곡을 읽는다는 건, 때로 말을 따라 시간을 듣는 일이기도 하다. 공기처럼 가볍게 흩어지던 말들이, 시간 속에서 조금씩 무게를 얻어간다. 희곡의 말들은, 사건의 기록이라기보다 사건을 둘러싼 시간의 흔적들이다. 말이 시간을 더듬어내고, 또 시간이 말에 스민다. 느린 순환. 간혹은 그 느린 순환의 감각을 놓쳤구나, 잃었구나, 선뜩해진다.
시간은 더 이상 머무르지 않고, 쉼 없이 다음으로 밀려간다. ‘의미’들은 사건과 결과에 휘말려 들어가 자취를 감추기 일쑤고, ‘감정’에도 효율과 효과가 요청된다. 한 사람의 표정, 한 문장의 여운, 한 장면의 공기 같은 것들이 너무 쉽게 흘러가 버린다. 그래서일까. 요사이 희곡을 읽을 때면 ‘무엇이 일어나는가’보다 ‘무엇이 남아있는가’를 더 오래 바라보게 된다. 서로를 더듬어가는 말과 시간에 머물고 싶은 마음으로.
체호프의 희곡에는 늘 세 개의 시간이 겹쳐있다. 인물들이 지금 맞닥뜨린 현재의 시간, 돌이킬 수 없지만, 등 뒤에서 계속 압력을 가하고 있는 과거의 시간, 그리고 의심을 풀지 못한 채 입 밖으로 흘려내는 미래의 시간. 이 시간들은 따로 흐르지 않는다. 서로를 밀어내고, 교차하고, 겹치며 인물의 말과 침묵을 미세하게 흔들어 놓는다. 그래서 체호프의 희곡을 읽을 때면, 시간이 직선으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잠시 한 자리에 고여 서로 다른 결을 드러내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 겹침이 대사의 온도를, 방향을, 무게를 바꿔내고, 정적의 밀도를 바꾼다.
종종은(여전히) <바냐 아저씨>를 떠올린다. 체호프의 다른 희곡들에서도 시간은 늘 인물의 삶을 감싸안은 채 흐르고 있지만, <바냐 아저씨>의 시간은 유독 멎어있는 것만 같다. 사건은 이미 지나간 삶의 잔해 속에서 일어났고, 인물들은 어떤 변화도 믿지 않으면서 그저 계속 떠들어댈 뿐이다. 그들의 말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채 같은 오후, 같은 대화, 같은 후회를 반복하며 제자리를 맴돈다. 그럼에도 자꾸만 거대한 시간의 감각이 인다. 희곡 속 사건이 멎어있을수록 말이다.
이 희곡의 시간은 인물 바깥에서 흘러가기보다, 인물의 내부에서 증식한다. 바냐의 피로, 아스트로프의 무력한 이념, 소냐의 체념은 각자의 말 속에서 서서히 자라며, 그 감정의 느린 순환이 곧 시간의 결이 된다. 체호프는 그렇게 시간과 말을 엮는다. 말은 시간을 견디며 그제야 모양새를 갖춘다. 단단해지거나 흐드러진다. 표정을 만들고, 손짓을 만든다. 그 불안정한 변화가 말의 무게를 바꾼다. 그리고 다시 시간. 흘러가고, 어긋나고, 반복되며, 응축되는 시간. 그 사이에서 말들은 저마다의 무게를 얻어간다. 침묵. 정적조차도.
___
흐린, 무더운, 기다림. 그 사이로 어쩌면 대수롭지 않은 말들이 놓인다.
“왜 이렇게 늦지.”
“아무도 오지 않네.”
“그냥… 그런 거지.”
가벼운 말이 천천히 다른 무게로 가라앉는다. 불편함이 되고, 지루함이 되고, 먼 과거를 떠올리거나 먼 미래를 스치려다 결국 지금에 눌러앉는다. 말보다 오래 남는 잔여들. 침묵. 정적. 그 자리에 사람이 드러난다.
___
희곡 안에서, 나는 그저 사람이 시간을 견디는 방식을 따라가고 있는 중일지도 모르겠다.
사람이 시간을 통과하는 소리,
말과 침묵이 서로를 밀어내고 다시 받아들이는 그 느린 숨결을
읽고 또 들으며.
사건은 잊히지만, 그 사건을 통과한 시간,
그 시간 안에 남은 말의 잔여 :
그 잔여가 드러내는 사람의 깊이는 오래 남는다.
희곡을 읽는다는 건, 내게
그 느린 자리에서 사람을 다시 보는 일이다.
나는 그 느린 순환을 놓치지 않으려 한다.
____________
* 작품 출처 : 체호프, 「바냐 아저씨」, 『 (세계문학전집031) 갈매기/세 자매/바냐아저씨/벚꽃동산』(동완 옮김, 동서문화사, 2016)
전진모
연출가. 신촌극장 극장장. 가끔 쓰고 연출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