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미란

효율과 속도, 경쟁과 생산성이 미덕으로 여겨지는 시대에 연극은 여전히 ‘가난한 예술’로 남아 있다. 연극은 자본의 언어가 침투하지 못한 틈새를 찾아 그 주변부에 머무는 존재들의 삶을 비춘다. 오늘날의 무대에서도 노동과 소외를 다룬 작품들이 꾸준히 등장하고 있으며, 극단 드림플레이 테제21의 <자본> 시리즈나 우주마인드프로젝트의 ‘서민경제 3부작’처럼 『자본론』을 직접 소환하는 연극들도 눈에 띈다.1

이들 작품이 주로 자본의 동력과 노동의 조건, 제도의 문제를 탐구해왔다면, 〈변두리 소녀 마리의 자본론〉원인진 작·연출, 창작집단 상상두목, 연희예술극장, 2025.10.10.~10.19.은 ‘삶의 척도’라는 보다 근원적인 관점에서 자본의 논리에 접근한다. 와타나베 이타루의 『시골 빵집에서 자본론을 굽다』의 문제의식을 이어받은 이 작품은 변두리에서 빵을 굽는 연극이라는 느리고 비효율적인 행위를 통해, 잉여의 생산과 축적, 효율의 극대화라는 자본주의 사회의 명령을 정면으로 마주하며, 그 바깥의 질서와 공동체의 가능성을 상상한다.

자본의 바깥, 보이지 않는 것의 가치

이야기는 10년 전 스스로 생을 마감한 ‘마리’의 흔적을 좇는 동생 ‘마음’의 여정으로 시작된다. 마음은 누나가 머물렀던 산속의 연극 공동체를 찾아간다. 그곳의 사람들은 폐교를 극장으로 삼아 연극을 만들고, 무대에서 사용할 빵을 직접 굽는다. 삼나무가 가득한 숲과 극장은 마을에 비닐 공장이 들어서면서 훼손될 위기에 처해 있고, 총장—총을 들고 다녀 ‘총장’이라 불린다—은 먹을 것을 찾아 마을로 내려온 멧돼지를 쫓는다.

연극은 명확한 대비 구도와 은유적 장치를 통해 메시지를 선명히 드러낸다. 비닐 공장이 들어서며 파괴되는 자연, 총에 위협받는 멧돼지의 생명, 도시의 화려한 극장이 아닌 변두리의 소박한 무대, 대량 생산된 인공 이스트 대신 살아 있는 천연 효모를 사용한 빵. 이 모든 대비는 자본주의의 질서 속에서 밀려난 존재들의 가치를 역설한다. 연극은 이러한 ‘작고 느린 것들’, ‘쓸모없어 보이는 것들’의 가치를 빵의 발효 과정에 빗대어 보여주며, 효모로 대표되는 ‘보이지 않는 것’의 생명력을 회복하고자 한다. 효율보다 지속을, 생산보다 돌봄을, 수익보다 나눔을 강조하는 이 작품은 자본의 논리가 놓친 감각을 되살린다.

다만 이러한 명확한 대립 구도는 관객의 이해를 돕는 동시에 문제의 복잡성을 단순화하는 위험도 안고 있다.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인용하고 내세우지만 노동과 소외, 물화物化의 문제가 충분히 탐구되지 않았고, 현실과 접속하는 구체화된 문제나 구조적 문제 역시 상대적으로 비가시화되고 있다. 등장인물들이 ‘마음’의 성장과 이해를 돕기 위한―공연에 나온 표현대로―‘발신자’ 역할에 머물러 입체감이 약한 것도 아쉬운 지점이다. 자본 바깥의 삶을 상상하는 일이 단순히 소박한 공동체적 이상이나 따뜻한 관계의 향수로 환원되지 않기 위해서는 보다 예리한 질문이 추가될 필요가 있어 보인다. 그럼에도 이 작품의 명료함은 관객에게 작품의 핵심적인 메시지를 명쾌하게 각인시키며, 자본의 논리와 구조를 묘파하려는 대신 그 바깥에서 살아가는 방식을 제안하고 있다.

순교자와 투사의 경계에서

이 작품에서 가장 복합적인 인물은 무대에 직접 등장하지 않는 ‘마리’다. 그녀는 시위를 하고 『자본론』을 읽으며 투쟁했던 인물로 회상되지만, 동시에 고통받고 지친 존재로 그려지기도 한다. 마리는 끝내 투쟁을 지속하기보다 죽음을 선택하지만, 연극은 그녀를 패배자로 그리지 않는다. 병든 것과 함께하며 스러진 마리의 형상은 순교자적 이미지와 투사의 이미지 사이를 오간다.

꿈 장면에서 마음은 총장과 멧돼지의 대치를 지켜보다가 앙상한 뼈만 남은 멧돼지를 쏜다. 그것은 파괴적 행위이지만 안식으로의 귀결이라고도 할 수 있다. 마음은 이 행위를 통해 누나의 죽음을 이해하게 된다. 병들고 약한 것, 주변적인 것에 공감하며 함께 하는 것으로서의 마리의 죽음은 죽음을 패배가 아닌 삶의 지속으로 읽을 수 있게 한다. 연극 공동체에 남은 사람들은 마리를 기억하며 마리의 희곡을 낭독하고 투쟁을 지속하고자 한다. 남은 씨앗과 빵을 심는 행동이 단적으로 보여주듯이 한 존재가 죽어도 생은 존재하고 지속될 수 있는 것이다.

마음이 변두리 연극 공동체를 찾아와 누나가 남긴 텍스트를 읽고, 빵을 만들며, 함께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시간은 일종의 애도 과정이자, 자본의 속도에 저항하고자 한 마리의 삶과 사유를 되짚어 보는 과정이기도 하다. 마리는 생산과 성취의 서사 밖으로 걸어 나가는 죽음을 택함으로써, 그리고 남겨진 사람들은 그의 부재를 애도하면서 자본의 논리로 환원되지 않는 삶의 무게를 마주한다. 순교자와 투사의 경계를 오가는 마리의 죽음은 비극의 종착점이 아니라 다른 종류의 시간을 여는 문이다.

순환하고 연결되는 시간, 함께의 공동체

마리가 약하고 주변적인 것들과 ‘함께 하기’를 선택했듯, 공연 또한 관객을 참여시키는 이머시브 연극의 형식을 통해 ‘함께’의 방식을 강조한다. 공연이 시작되면 관객들은 삼삼오오 모여 재료를 계량하고 반죽을 만든다. 이야기가 시작되면 배우들은 반죽을 오븐에 넣고 굽기 시작하며, 공연의 막바지에 관객들은 완성된 빵을 나누어 먹는다. 흥미로운 점은 공연 초반에 관객들이 만든 반죽은 그날의 공연에서 사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반죽은 발효와 숙성의 시간을 거쳐야 하기 때문에 오늘 만든 반죽은 내일 공연에서 빵으로 구워지고, 오늘 공연을 보는 관객은 어제의 관객이 만든 빵을 먹는다. 어제의 노동이 오늘의 연극을 완성하고, 오늘의 행위가 내일의 무대로 이어진다.

이러한 연결과 순환의 구조는 즉각적인 결과와 보상, 효율을 중시하는 자본의 시간에 대한 반격이다. 기다림의 시간은 이렇게 발효된다. 과거와 현재, 배우와 관객, 생산과 소비, 예술과 노동이 교차하며 관계의 연극을 형성한다. 관객은 반죽의 노동을 함께 나누고, 그 결과물을 함께 먹으며 하나의 공동체로 묶인다.

<변두리 소녀 마리의 자본론>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예술과 삶이 어떤 속도로, 어떤 시간 감각으로, 어떤 몸짓으로 존재할 수 있을지를 묻는다. 효율과 성과를 강요하는 시대에,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연극과 느린 빵 만들기의 시간이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 묻는 것이다. 무엇이 우리를 살게 하는가. 우리는 어떤 시간을 살고, 어떤 속도로 누구와 함께 살아갈 것인가. 관객은 함께 나누어 먹은 빵의 따뜻한 온기를 기억하며 이 질문을 천천히 발효시키는 시간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박미란

한국 연극과 연극 비평을 공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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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자본론』을 경유하며 신자유쥬의적 질서를 성찰하는 연극에 대해서는 남지수, 「신자유주의 시대를 성찰하는 다큐멘터리 연극과 연극인―『자본론』을 호명하는 연극작업을 중심으로」, 『드라마 연구』 64, 한국드라마학회, 2021 참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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