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조
연극은 흔히 농사에 비유되곤 한다. 비단 프로 연극계에 한정된 이야기는 아니다. 대학 연극반도 주로 봄학기에 신입 단원을 모집해 여름방학에 땀 흘려 연습하고,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가을이 되면 연습실에서 무르익은 ‘결실’을 내놓곤 한다. 나는 연습을 시작하기 전에 단원들끼리 모여 제문을 읊고 고사를 지내는 문화 속에서 연극을 배웠다. 고사 문화는 인력人力이나 시스템으로는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예측 불허의 변수로 가득한 연극이라는 업에 대한 두려움을 내포한 것이었다. 연극인들은 그저 보이지 않는 밭에 씨를 뿌리고 스스로를 키우며 기다린다. 어떤 결실이 다가오는지 모르는 채.
농사에 대항하는 식물
그런데 연극을 농사에 비유하는 것은 ‘지원사업 시대’의 감각이기도 하다. 1년 주기로 공모를 올리는 각종 예술지원기관과 지자체 문화재단에 지원서를 넣고 사업 일정에 맞춰 공연을 준비하는 일은 한국 연극계에 지극히 당연한 풍경으로 정착되어 버렸다. 추석을 전후한 시즌이 되면 연이어 개막하는 선정작들로 인해 극장가가 붐비기 시작한다. 반면 모두가 지원사업 발표를 기다리는 겨울에 극장은 일종의 휴한지가 되고, 연극인들은 아르바이트를 하며 보릿고개를 넘기곤 한다. 이처럼 지원사업은 파종, 경작, 수확, (강제적인) 휴식 단계로 구성된 인위적인 사이클을 부여하는 제도로서 연극 생태계에 깊숙이 개입하고 있다. 그래서 지원사업 탈락은 ‘농사가 망했다’는 씁쓸한 워딩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예술가의 몸이 지원사업이라는 제도의 사이클에 속박되는 일에 대한 문제의식은 연극계에 늘 상존해왔다. 가령 2018년에 창단한 ‘프로젝트 공공연희’라는 팀은 도시농업을 매개로 하여 지원사업의 루틴에 대항하는 <감각스트레칭 틔우자 씨:발아>2018라는 이름의 예술 행동을 벌인 적이 있었다. 24절기에 맞춰 처서미식회, 한로상영회 등을 진행하며 무뎌진 오감을 일깨우는 작업은 지원사업을 기다리는 대신 “그냥 시작해버리는” 예술가다운 감각을 되찾는 일이기도 했다.1 연극이라는 ‘농사’에 대항하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사업과 제도에 의해 획분된 일정에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자신의 시간 속에서 발아하고 성장하는 ‘식물’의 형상이었던 것이다.
<식물은 일하지 않는다>김동국 작/연출, 의정부 아트캠프, 2025.10.17.~10.18.는 프로젝트 공공연희의 작업처럼 예술과 농업의 관련성을 메타적으로 탐색하는 공연은 아니다. 이 작품은 친환경 농업을 시도하는 ‘사회적 농장’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을 보여주는 드라마 연극일 뿐이다. 그럼에도 나는 작물과 농부의 관계에 개입하는 인심과 제도의 문제를 연극이라는 예술이 놓여 있는 현실과 겹쳐보지 않을 수 없었다. 잡초 한 포기조차 용납하지 않는 극장이 동시대 농촌의 일면을 비춰내고 있는 것처럼, 공연에 담긴 농부들의 삶이 ‘예술’과 ‘산업’ 사이에 가로놓인 연극의 모습을 비추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사회적 농장’의 그림자
<식물은 일하지 않는다>는 사회적 농장으로 선정되기 위해 다른 농부들에게 친환경 농업을 권유하는 젊은 농부 ‘두현’강성화 분, 그리고 대를 이어 토종 씨앗을 지켜온 할머니 농부 ‘시내’지연애 분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연극이다. 사회적 농업을 장려하는 지원 제도가 농촌의 실상과 어긋나며 발생하는 문제를 다룬다는 점에서 김동국의 전작 <영농일지>2024/2025의 후속작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전작이 사회적 농장을 이끄는 영농 지도자의 고뇌를 중심으로 전개된 것과 달리 이번 작품은 지원 제도와 무관하게 친환경 농업을 지켜온 고지식한 농부의 삶에 보다 초점을 맞추고 있다.
사회적 농장이란 ‘사회적 기업’의 농촌화된 모델로, 농장이 노인과 장애인을 비롯한 사회적 약자들을 포용하는 공익적 역할을 담당하도록 지원하는 농촌 진흥책의 일환이다. 30대 농부 두현은 성실하게 농사만 지어서는 돈을 벌 수 없는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다른 농부들과 함께 사회적 농장에 도전하여 지원금 수혜를 받고자 한다. 그리고 경쟁률이 치열한 지원사업에 선정되기 위한 전략으로 친환경 농업을 시도하게 되는 것이다. 다만 연극은 두현을 평면적인 기회주의자로 그리지 않는다. 그는 시내가 지켜온 친환경 농업의 의의에 공감하고 있으며,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다른 관행농2들을 성심성의껏 설득하여 친환경 농법을 부분적으로나마 도입하게 만든다. 농약을 쓰지 않은 작물로 친환경 꾸러미 사업을 벌이고, 도시에서 찾아오는 방문객들을 위한 농사 체험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일에 매진하면서 지속가능한 친환경 농업을 모색하는 인물로 그려지는 것이다.
그러나 두현은 그러한 ‘선의’로서의 신념이 ‘생존’이라는 원칙에 균열을 내지 않는 선에서만 유지될 수 있는 것임을 뚜렷이 보여주는 인물이기도 하다. 두현이 친환경 농업을 포기하고 시내와 갈라서게 되는 과정은 단순하지 않다. 사회적 농장의 취지에 부응하지 않는 동료 농부들, 작황을 망치는 기후변화, 그리고 농약 성분을 검출하고 인증하는 주체로 군림할 뿐 친환경 농업을 제대로 지원하지 않는 국가 기관. 농약과 개량 품종을 사용하는 관행농에 최적화되어 있는 인심과 제도 속에서 두현의 ‘선의’는 오랫동안 지속되지 못한다. 한때 농부들에게 친환경 농업을 권유하고 다니던 두현이 방제복을 입고 시내의 농지 옆에서 농약을 살포하는 장면은 섬뜩하게 느껴질 정도이다. 두현이 뿌린 농약은 공동배수관을 타고 시내의 밭에 흘러 들어가 그가 토종 씨앗을 파종해 기른 작물들까지 오염시킨다. 그러나 신념을 꺾은 두현은 죄책감마저 거부한다. “우리는 우리 할 일을 하는 거예요. 농약이 싫으시면 할머니가 농약이 흐르지 않는 밭을 구해서 농사짓고 씨 받고 하셔야지. 왜 우리한테 멈추라고 그래요?”
<식물은 일하지 않는다>는 ‘사회적인 것’으로 상상되는 공익적 가치로부터 ‘환경적인 것’이 배제되거나 심지어 적대적인 타자로 외부화되는 풍경을 보여준다. 인간의 연대 또는 공동 생존이라는 대의 앞에서 환경주의는 ‘기회’로서 선별되거나 축출되는 것이다. 그러나 두현의 서사가 멈춘 자리에서 사회적 농장의 그림자에 가려져 있던 시내의 서사가 움트기 시작한다. 종묘상에서 판매하는 다수확 품종을 거부하고 손에서 손으로 내려온 토종 씨앗을 고집해온 ‘씨갑시’의 이야기이다.
돌봄이라는 씨앗
전국을 돌아다니며 소실되어 가는 토종 씨앗을 수집하고 육종해온 시내는 표준화와 대량 생산을 목적으로 하는 ‘산업’의 논리와 불화할 수밖에 없는 인물형이다. 시내에게 호랑이콩, 쥐눈이콩, 선비콩, 돈부 같은 다양한 자생 품종을 지키는 일은 먹고 살기 위한 생업이 아니라 생태계를 인식하고 돌보는 방식 안에서 자연스럽게 행해지는 ‘버릇’에 가깝다. 그는 벌레가 먹고 남겨줘야 우리 것도 가져가는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농약을 쓰지 않고, 사람이 일을 하기 전에 식물이 일을 해야 한다고 믿기 때문에 환경에 적응하는 힘을 잃어버린 개량종을 쓰지 않는다.
말하자면 이 작품에서 시내는 농사라는 산업과 사회적 농업이라는 제도가 집요하게 포획하고자 하는, 그러나 영원히 그 바깥에 서 있는 ‘식물’의 존재론을 매개하는 인물이라 할 수 있다. 토종 씨앗이 점차 소실되어 가듯이 씨갑시들도 하나둘씩 조용히 세상을 떠난다. 두현이 농약을 살포하는 것을 막으려다가 다치고만 시내에게 남은 것은 오로지 관 크기의 사각틀에 담긴 흙과 그의 곁을 지키는 ‘서진’장희원 분뿐이다. 간호사로서 환자들을 돌보다가 사회적 농장에 합류하게 된 서진은 시내가 수집해온 토종 씨앗들을 물려받는 역할을 한다. 연극은 관 크기의 흙에 시내가 올라가 눕는 결말부의 장면을 통해 시내라는 인간이 하나의 씨앗으로 회귀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서진은 토종 씨앗을 물려받는 새로운 씨갑시일 뿐만 아니라, 시내라는 인간-식물이 농업의 경계 밖에서 소리 없이 생태계를 돌보아왔던 역사 자체를 물려받게 되는 것이다.
<식물은 일하지 않는다>는 두현의 서사를 시내의 서사로 대체하는 방식을 통해 생존 원칙 너머에서 운행하고 있는 어떤 취약한 생태계로 우리의 감각을 이끌어간다. 시내의 세계는 사회적 농장으로 대표되는 제도적·산업적 논리를 비판적으로 상대화하는 장소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이 작품이 상이한 두 세계 간의 갈등을 전개하는 일에 많은 비중을 할애하고 있는 탓에, 시내가 속한 씨갑시들의 공동체와 씨앗 생태계에 대한 이야기가 보다 풍족한 스케일로 묘사될 수 없었다는 점은 아쉽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데 연극이 ‘식물’이라는 존재와 감각적으로 연결될 수 있는 방식은 무엇일까. 인간이 ‘씨앗’이라는 느린 시간성에 속한 존재와 만날 수 있는 방식은 또 무엇일까.
어쩌면 우리도 두현이 닫고 돌아갔던 그 문 앞에 서 있는지 모르겠다. 식물을 식물로만 볼 수 없도록, 연극을 연극으로만 행할 수 없도록 만드는 논리가 종횡으로 좌표를 이루는 현실 속에 우리는 서 있다. <식물은 일하지 않는다>는 극장 밖의 세계로 돌아가는 사람들의 손에 작은 씨앗을 쥐여주는 연극일 뿐이다. 이것을 어떻게, 어디에서 기를 것인가. 예술이라는 이름의 농사를 짓는 사람들에게 더욱 절실하게 남을 수밖에 없는 질문일 테다.
김민조
연극비평과 드라마터지를 휴업 중인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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