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아

프롬프터 내 극장의 예술감독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예술감독 죽지 않기. 무엇보다 죽지 않기. 살아가기. 비극의 도입부에 예언자 테이레시아스처럼 신중하고 상냥하게 진단을 내리는 의사 앞에서 흐트러지지 않기. 삶의 근간이 되는 것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라고 주장하는 우리가 옳았다는 것을 알기. 우리는 우리가 한 말을 의심했을 때조차도 옳았다.

(중략)

죽음의 팔꿈치가 우리의 팔꿈치를 스치는 것을 느끼면서도 살아 있기. 살아 있는 자만이 죽음의 배회를 상상하고 그것을 우리의 삶에 도움이 되는 이야기로 옮길 수 있으니까. 그렇다. 우리의 적에 대해 쓰고 읽는 일, 우리를 사로잡는 죽음의 형태를 다루는 연극을 만들고 보는 일이 그것이다. 그러나 절대로 치명적인 순응주의의 대열을 늘려서는 안 된다. 이 모든 게 양심을 달래거나 사기를 북돋아 주기 위한 막연히 시적이고 위대한 생각들의 나열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살아남기를 선택한 사람들은 이런 것들이 어느 여름날 매미가 우는 소리만큼이나 구체적이라는 것을 안다. 무엇보다 죽지 않기. 늘 그래왔듯이 힘든 시간 속에서 살아남는 일의 달콤한 괴로움을 음미하기.

-티아구 호드리게스, <소프루 Sopro> 중에서

작품의 주인공 프롬프터는 다섯 살 때 처음으로 연극을 보게 된다. 그것은 어른들을 위한 연극이었다. 예술감독만 허락한다면 우리는 연극을 볼 수 있을 거라고, 당시 매표소에서 일하던 고모가 말해주었다. 초록색 드레스를 입은, 후에 ‘나의 예술감독’이 될, 극장의 예술감독이자 배우가 무대 위를 오가고 있었다. 고모와 함께 있는 주인공을 보자 예술감독은 말을 걸었다.

예술감독 연극을 좋아하니?

프롬프터 나는 작게 말했습니다. “네, 무척 좋아해요.” 예술감독이 물었습니다.

예술감독 연극을 몇 편이나 봤니?

프롬프터 나는 작게 말했습니다. “본 적 없어요.” 예술감독이 말했습니다.

예술감독 연극을 한 번도 본 적 없는데 네가 연극을 좋아한다는 걸 어떻게 알지?

프롬프터 나는 작게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것을 좋아하니까요.”

“저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것을 좋아하니까요.” 이 문장이 내 마음속 깊은 곳을 찌르며 오래오래 찌르르한 통증 같은 것을 만들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것”, 그 한 번도 본 적 없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 아니, ‘좋아하게 되어 버렸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나는 9살 무렵 연극을 처음 보았다. 어린이 연극이었고, 내 또래 어린이들도 출연했다. 작품이 무엇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무대 위의 알록달록한 조명이며 그 아이들이 쓰고 있던 초록색 모자며 하는 막연한 이미지가 꿈처럼 남아있다. 그때 나를 사로잡은 것은 그 아이들이 퇴장한 곳이었다. 저 뒤에는 무엇이 있을까, 거기에선 무슨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 그곳에 무엇이 있길래 저 사람들이며 물건들이며 고운 빛이며 하는 것이 한없이 쏟아져 나오는 걸까.

“삶의 근간이 되는 것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라고 주장하는 우리가 옳았다는 것을 알기. 우리는 우리가 한 말을 의심했을 때조차도 옳았다.”

<소프루>의 주인공은 프롬프터다. 관객이 볼 수 없는 사람, 보아서는 안 되는 사람,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관객이 모른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끼는 사람, 프롬프터. 그는 스스로를 “극장에서 관객들에게 박수를 받으면 실패하는 유일한 사람”이라고 정의한다. 그런 그에게 ‘나의 극장’의 예술감독이 “당신이 무대에 올라가 주인공을 맡아주면 좋겠어요.”라는 제안을 한다. 프롬프터를 연기하는 배우가 등장하는 연극이 아닌, 진짜 프롬프터인 주인공이 무대 위에 서는 연극을 그는 제안한다.

작가이자 연출가이며 리스본 국립극장의 예술감독인 티아구 호드리게스에 의해서 결국 무대 위에 서게 된 주인공은 크리스티나 비달, 실제 리스본 국립극장의 마지막 프롬프터다. 극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나는 1978년 2월 24일부터 줄곧 극장에서 일했지만 무대 위에 오른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나는 언제나 어둠 속에서 일했습니다.”

어린 주인공에게 말을 걸어주고, 젊은 주인공에게 극장에서의 일을 제안했던, 초록색 드레스를 입은 아름다웠던 ‘나의’ 예술감독은 이미 오래전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젊은 시절 극장에서의 삶을 함께 했던 많은 사람들이 이런저런 사연으로 지금 이곳에 없다. 크리스티나 비달은 주인공으로서 무대 위에 서 달라는 ‘나의 극장’의 예술감독의 제안을 받고 과거의 기억을 하나둘 떠올린다. 크리스티나의 상념을 따라, 또 그가 다시 읽어주는 고전 희곡들의 문장을 따라, 우리는 삶이 무엇인지 또 연극이 무엇인지를 천천히 생각하게 된다. 무엇보다 오래 잊고 지냈던 사랑을, 자부심을, 신념을.

아름다움은 사라지고 여기 없으므로 아름다운 것인지 모른다. 변하고, 마모되고, 사라지더라도, “죽음의 팔꿈치가 우리의 팔꿈치를 스치는 것을 느끼면서도” 살 수 있는 한 힘차게 살아야 한다. 달콤하게 우리를 유혹하는 휴식과 멈춤과 죽음의 초대장을 단호히 거절하고, 사는 일의 달콤한 괴로움을 음미하며 계속 살아야 한다. “살아 있는 자만이 죽음의 배회를 상상하고 그것을 우리의 삶에 도움이 되는 이야기로 옮길 수 있으니까.” 크리스티나 비달과 함께 예술감독이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바로 그것이다. 연극의 위기, 극장의 위기 앞에서 예술감독이 극장의 마지막 프롬프터 크리스티나 비달과 함께 연극을 만들고 싶었던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프롬프터는 배우에게 숨(소프루 Sopro)을 불어 넣고 극장을 구조하는 그런 존재이니까.

연극을 계속해야 하는 이유를 이보다 더 힘 있게 말할 수 있을까.

시가 지니는 힘을 이보다 더 강하게 증명할 수 있을까.

다시 조용히 되뇌어본다.

“삶의 근간이 되는 것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라고 주장하는 우리가 옳았다는 것을 알기. 우리는 우리가 한 말을 의심했을 때조차도 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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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 출처 : 티아구 호드리게스, 『소프루(Sopro)』 (신유진 역, ㈜알마, 2023)

이진아

비평을 필요로 하지 않는 시대에 비평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고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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