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조

기후위기라는 연극

2012년 즈음 슬라보예 지젝이 ‘일하는 사람들의 공동선을 위한 소명’이라는 제목의 내한 강연을 온 적이 있다. 강연의 서두에서 지젝은 전지구적 의제로 부상하고 있는 생태학적 위기와 인류세의 문제를 우리가 진정으로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상황에 대해 이렇게 논평했다.

1차 대전이 한창이던 때, 독일과 오스트리아 군 사령부간 오갔던 전보에 대한 일화가 있습니다출처는 물론 불분명한 이야기입니다만. 독일군이 이렇게 메시지를 보냈다고 합니다. “여기 아군 전선 상황은 심각하나 파국적이지는 않음.” 이에 대해 오스트리아에서는 이렇게 답했다고 합니다. “여기 상황은 파국적이지만 심각하진 않음.” 이것이 바로 우리 중 다수가, 적어도 산업화 국가에 거주하는 이들이, 점점 더 전 세계적 문제에 대처해가는 자세가 아닙니까? 누구나 생태적으로든 사회적으로든 임박한 파국에 대해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를 왠지 심각하게 받아들이지는 않지요. 정신분석학에서는 이러한 태도를 물신적 분열fetishist split이라고 부릅니다. “저는 잘 알고 있어요, 하지만… 정말 그걸 믿지는 않습니다.” 이러한 분열은 우리가 보고 아는 바를 거부하도록 만드는 이데올로기의 실체적 힘을 분연히 증명하고 있습니다.1

당시 채식을 하며 대학원에서 연극을 공부하고 있던 나는 그가 ‘물신적 분열’이라 부른 이 심리적 기제가 기묘하게도 연극학 개념을 연상시킨다는 점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다. 다른 저서에서 지젝은 이 문제를 부인Verleugnung이라는 제스처와 연결시키고 있다. 부인이란 ‘자신이 목격한 장면을 망각하고 그것이 가지는 상징적 효력을 유예시키는 행동’2으로, 주체가 아는 것과 믿는 것 사이에서 분열된 상태를 유지하게끔 만드는 내적 원리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연극기호학자 안 위베르스펠드에 따르면, 부인 작용은 관객이 바로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을 비현실적인 환상으로 체험하게 만드는 기초적인 원리이자 규약이기도 하다. “내가 보는 것은 꿈이건 공연이건 현실적이지만, 이건 사실이 아니다. 이는 나에게 강요되지만, 현실에 대해,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과 그 안에서 내가 처신해야 할 방식에 대해서 나에게 정보를 주지 않는다.”3

요컨대 부인 작용이라는 유서 깊은 개념은 기후위기와 연극을 관통하는 하나의 키워드가 될 수 있다. 우리는 여전히 지구라는 극장에 앉아 기후위기라는 연극을 관람하고 있는 중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기후연극은 바로 자기 자신이 존재하는 형식에 대한 질문으로부터 시작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보고 아는 바를 거부하도록 만드는” 연극의 실체적 힘을, 현실과 환상 사이에서 분열된 극장을 어떻게 가로지를 것인가.

이것은 코미디입니다

콜렉티브 뒹굴의 <꿈의 방주: Demo>김정은 작, 성지수 연출, 콜렉티브 뒹굴, 서강대 메리홀 소극장, 2025.10.2.~10.4.는 기후정의 활동가의 우울증과 번아웃에 대한 연극이지만, 한 인물이 기후우울에 이르게 된 경위를 서사화하는 일에 주력하는 작품은 아니다. 오히려 이 작품에 가로놓여 있는 근본적인 문제의식은 ‘기후우울에 대해 말할 수 없다’는 것에 가깝다. 김엘리야라는 이름의 주인공은 타인과의 관계를 끊고 철저하게 혼자가 되기로 한 인물이며, 네 명의 코러스가 그의 내면에서 뒤엉켜 싸우는 수많은 목소리를 대변하는 역할을 한다. 아무리 노력해도 기후위기를 돌이킬 수 없다는 무력감, 기후정의에 공감을 느끼지 못하는 주변인들에 대한 환멸, 그러면서도 전기밥솥과 냉장고라는 인류세의 총아에 의지해 목숨을 연명하고 있는 스스로에 대한 자괴감 등등.

기후우울에 대해 말하기 어려운 이유는 그것을 앓는 주체가 적합한 발화의 형식을 찾기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청자의 연민을 구해야 하는가. 기후 문제와 관련해 타인을 연민할 자격이 있는 인간이 있다면 그럴 수 있을 것이다. 기후변화가 우울증을 낳는 이유를 설명해야 하는가. 나의 육신과 날씨가 맺는 관계를 보여줄 수 있다면 그럴 수 있을 것이다. 정 안된다면 기후정의의 당위성을 설파해야 하는가. 내가 매일같이 전기를 사용하고 쓰레기를 내놓으며 에너지 자본주의와 공모하는 인간이 아니라면, 그럴 수 있을 것이다. 기후위기가 초래하는 멜랑꼴리아는 바로 이러한 언표 불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기후정의 창작집단을 표방한 이래로 콜렉티브 뒹굴은 기후위기를 연극으로, 더군다나 극장에서 말한다는 것이 가당한지에 대한 문제의식에 천착해왔다. 철저하게 자연을 몰아낸 공간에서 기후정의를 논하는 연극이 어떻게 갈라진 혓바닥으로 말하지 않을 수 있을까. <꿈의 방주: Hunger Stone>2022이 “이것은 절대 기후 연극이 아닙니다”를 표방했던 것처럼, <꿈의 방주: Demo>는 공연 안내의 형식을 빌려 “이것은 코미디입니다”라고 선언한다. 흥미로운 것은 이 선언이 르네 마그리뜨의 <이미지의 배반>1929처럼 자기 모순을 지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코미디란 관객에게 ‘진지하게 믿지 말라’고 주문하는 형식이기에, “이것은 코미디입니다”라는 선언은 스스로를 부정하는 효과를 함께 거느린다. <꿈의 방주: Demo>는 그렇게 관객이 보는 것과 믿는 것 사이의 연극적 분열을 가시화한 상태로 시작된다.

공연 안내를 하기 위해 등장한 김정은은 관객석을 정면으로 지향하는 대신 사선으로 약간 비껴선 지점을 바라보며 말한다. 그 모습은 마치 관객이 없는 연습실에서 리허설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제목이 암시하는 것처럼 <꿈의 방주: Demo>는 “임시 시연”이라는 형식 아닌 형식을 모방하고 있으며, 아직 완성되지 않은 연극을 시연한다는 모드 안에서 기후우울을 말하기 위한 갖가지 형식이 시도된다. 매트리스 위에 엎드려 스마트폰만 만지작거리는 김엘리야의 내면을 대변하는 코러스들은 과장된 연극조를 구사하며 기후우울을 겪는 주체의 고통을 표현한다. 그리스 비극, 셰익스피어 연극, 연극영화과 입시 연기를 연상시키는 상투적인 장면이 반복적으로 시연되는 초반부는 “이것은 코미디입니다”라는 선언에 부합하게 자기 풍자의 의도를 드러내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풍자의 목적에 그친다고 말하기에는 이 장면들이 지나치게 길고 발화의 내용이 진솔하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 기후우울은 코미디라고 할 수도 없고 코미디가 아니라고 할 수도 없는 형식 속에서 보여지는 것이다. 그래서 ‘웃으라고 하는 소리인데 왜 웃지 못하는가’라는 불편한 질문은 관객의 몫으로 돌아간다.

이처럼 <꿈의 방주: Demo>는 비극과 코미디 사이를 기민하게 진동하는 연극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의 힘으로 바꾸거나 돌이킬 수 없는 예정된 운명 안에서의 행동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기후위기 연극과 그리스 비극의 세계관은 서로 닮은 점이 있다. 연극은 시연, 풍자, 패러디의 형식을 통해 기후위기라는 비극과 기후우울이라는 코미디를 재빠르게 교환하는 일을 반복적으로 수행한다. 그래서 <꿈의 방주: Demo>는 극장에서 기후정의 연극을 하는 일의 불가능성을 드러내면서도, 그 안에서 모순과 분열의 형식으로 발화하는 가능성을 찾아가는 혼돈의 여정처럼 보인다.

이라는 방주

그러나 <꿈의 방주: Demo>가 ‘기후 분열증’에 대한 연극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임시 시연이라는 형식이 극장이라는 불편한 공간에 도킹하기 위한 장치에 가깝다면, 그 안에서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창세기」에 나오는 노아의 방주 설화를 기후위기 버전으로 각색한 김엘리야의 서사이다. 김엘리야는 죽음 충동으로 향하는 멜랑꼴리아 안에서 자기만의 방주를 지으려 하는 시도를 보여준다. 그러나 김엘리야의 시도는 필연적으로 실패를 노정하고 있다. 기후위기라는 전지구적 재앙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방법이란 애초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꿈의 방주: Demo>는 출구가 아니라 출구 없음에 대한 연극이라 할 수 있다. 무대의 한구석에 놓여 있는 근조 화환과 오른편에 서 있는 거대한 관은 이 공연 자체가 인류를 위한 장례식에 해당한다는 점을 암시한다. 인류가 탑승할 수 있는 유일한 방주가 관짝으로 제시된다는 것은 블랙 코미디처럼 느껴지지만, 문제는 그것이 엄연한 현실이라는 점이다. 김엘리야의 서사는 입관을 향한 여정이라 할 수 있으며, 구원의 신탁이 소거된 자리에 들어서는 것은 기후우울을 겪으며 일상을 견디고 있는 한 인간의 ‘지금’이다.

김엘리야가 서 있는 여로는 관과 냉장고의 구도적인 대비로 표현된다. 관을 비스듬히 마주 보는 자리에는 자취방에서 쓰일 법한 소형 냉장고가 놓여 있으며, 그 안에는 음료가 담긴 패트병이나 테이크아웃 용기가 가득 차 있다. 관으로 향하는 쪽이 기후우울과 종말의 감각을 향해 걸어가는 길이라면, 냉장고로 향하는 쪽은 그 운명으로부터 눈을 돌리고 에너지 자본주의가 보장하는 편리한 삶에 안주하는 길이라 할 수 있다. <꿈의 방주: Demo>에서 가장 인상 깊은 장면 중 하나는 김엘리야가 마치 한 인물의 신체에 두 사람의 충동이 들어서 있는 것처럼 자꾸만 냉장고 쪽을 향해 돌아서는 자신의 고개를 돌리고, 움직이지 않으려 하는 팔다리를 들어서 옮기며 간신히 관 쪽을 향해 걸어가는 움직임 시퀀스이다. 구음口音과 창으로 표현되는 비인간 동물의 소리, 그리고 자연과 일상의 앰비언스를 활용하여 구성된 사운드는 극장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와 김엘리야를 죽음의 방주 쪽으로 부르는 타자들의 손짓과도 같다. 기후우울은 그렇게 인간종의 네트워크 밖에서 출몰하는 비체들의 신호를 감지하는 하나의 (무)능력이자, 생존에 대한 환상을 건너가는 작은 나룻배가 되는 것이다.

기후연극은 가능한가. <꿈의 방주: Demo>는 기후위기에 적합한 연극적 형식을 찾는 일에 반복적으로 실패하는 과정을 통해 극장이 결코 기후연극을 완수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질문은 이제 관객에게 되돌아가게 될 것이다. 하나의 거대한 관처럼 밀폐된 블랙박스 극장에 앉아 기후연극을 흥미롭게 관람하고 돌아간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우리가 보고 아는 바를 거부하도록 만드는” 연극적 환상의 힘을 관객은 가로질러 갈 수 있을까. 공연은 막을 내렸지만 우리는 여전히 기후위기라는 연극이 상연되고 있는 극장에 앉아 있다.


김민조

연극비평과 드라마터지를 휴업 중인 사람.

—————————————–

  1. 2012년 6월 28일 건국대 새천년관에서 열린 슬라보예 지젝의 강연록에서 발췌. ↩︎
  2. 슬라보예 지젝, 『폭력이란 무엇인가』, 이현우·김희진·정일권 역, 난장이, 2011, 89쪽 참조. ↩︎
  3. 안 위베르스펠트, 『관객의 학교』, 신현숙·유효숙 역, 아카넷, 2012, 440~448쪽. ↩︎


ACTiO에서 더 알아보기

구독을 신청하면 최신 게시물을 이메일로 받아볼 수 있습니다.

인기 검색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