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은지
1.
디스토피아 미래 사회를 다룬 작품 중 곧잘 비교되는 조지 오웰의 <1984>와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를 다시 떠올린다. 인간을 억압하는 체계를 일생에 거쳐 탐구한 오웰의 통찰이 놀라운 한편, 쾌락과 탐닉의 안온함을 통해 으스스한 낙원을 그려낸 헉슬리의 간파가 현대적 감각에 더 잘 맞아떨어지는 것도 같고…. 책을 금지하는 것과 아무도 책을 읽지 않는 것, 증오와 두려움에 압도되는 것과 욕망과 쾌락으로 망각해 가는 것, 무엇이 더 현재의 상황을 잘 설명해 줄 수 있을까.
둘 중 하나를 꼽을 수 없을 정도로 지금의 우리는 위아래, 안팎으로부터 압박받는 중첩된 현재를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내 경우만 보아도 부조리하고 기이한 사회 시스템에 대한 분노와 무력을 오가는 동시에 각종 서사와 세계관을 안락하게 덕질할 수 있는 달콤한 콘텐츠의 세계에 중독되어 갔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콘텐츠의 세계로부터 이야기를 꺼내보자면, 최근에는 작품이라는 말보다 콘텐츠라는 용어가 창작 활동을 통칭하며 광범위하게 사용되는 것으로 보인다. 예술씬(계)보다 예술시장, 경험보다 유통, 관계보다 대면이라는 표현이 등장해 부지불식간에 자연스럽게 통용되는 것도 유사한 맥락일까. 개인적 호불호와 무관하게 현재의 창작 구조와 조건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짐작해 본다.
2.
그래서 얼마 전부터 주변 동료들에게 물어보았다. 작품과 콘텐츠의 차이는 무엇인가요, 경계는 어디인가요?
작품은 미학적·사회적 관점이 반영된 창작물이고 콘텐츠는 (디지털로 가공된 각종 내용물에 한정된 표현이었지만) 창작물·저작물 그 자체 가리키는 지식정보라는 답변을 들었다. 아울러 전자는 예술 생태계를, 후자는 문화산업을 전제로 삼고 있는 듯하다. 창작물을 대하는 (관람, 감상, 소비) 방식과도 관련이 있을 것 같다.
십여 년 전 즈음에는 콘텐츠 비즈니스, 콘텐츠 시장을 통해 유료콘텐츠를 기반으로 신문, 음악, 출판, 영화, 방송 등이 그 자체로 돈을 벌어들일 줄 알았다. 하지만 이제는 각종 플랫폼을 통해 가입, 구독, 접속, 스트리밍, 소비로 양상이 바뀌었다. 게다가 초국적·초대형·초연결 플랫폼 덕분에 전 세계 대상 케이 특수를 누리는 진풍경을 보게 될 줄이야. 딴 데로 이야기가 더 새기 전에 다시 질문, 아니 그런데 왜 자꾸 모든 창작물을 콘텐츠로 부르(만드)려 하시나요?
3.
이 지점에서 관극/관람이라는 행위를 짚어보자. 대면이라는 표현을 넘어 모든 존재 감각을 동원하는 수고를 거쳐야 비로소 실체를 만날 수 있는 행위, 지금 여기 순간 나타났다 사라져 휘발되는 허약하고 취약한 예술의 자리, 시장의 교환가치로 치환되기 어려운 특수 경험, 아무리 유통구조로 재생산해 내려 해도 일회적이고 찰나적인 체험 외 다시 반복재생 불가한, 그 순간 함께 일시적 공동체의 일원이 되었다는 기억경험. 재생, 멈춤, 구간이동, 빨리감기 불가.
비영리, 비상업성이라는 취약함을 가졌기 때문에 예술의 기초와 기반을 위해, 바로 그 이유로 공공이 지원해야 한다, 이를 위해 공공이 있는 것이다, 라는 당위적 주장을 하고 싶지만, 그 전에 잠시 짚어보고 환기하고 싶은 것이 있다.
4.
글의 처음에서 언급한 두 작품이 그려낸 디스토피아 사회에는 누락된 영역이 있다. 거대권력과 파편화된 개인 사이, 사회의 폐쇄 시스템으로부터 고립된 무력한 개개인의 선택권 없음이 불러오는 긴장과 대척점의 간극, 사적 층위와 정치적 층위 사이의 완충지대로서의 ‘공적 공간’1이 바로 그것이다.
어느 사회나 사적 삶과 정치적 삶이 있지만 어디에나 공적 삶이 가능한 것은 아니다. 너무 당연하게 여겨지는 일상의 공적 삶의 장소들은 낯선 사람들을 타자화하며 적대시하지 않고 차이와 다양성을 활력으로 경험할 수 있는 장소들이다. 낯선 사람이 사적 공간에 들어오는 것은 범죄가 될 수 있지만, 공적 공간에서 우리는 다른 이들과 단순히 공존하는 것을 넘어서 대화, 주장, 타협, 거래를 통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예술은 이 공적 공간, 완충지로서의 역할을 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 생각한다. 일상의 광장으로서 예술은 창작 작품을 매개로 관람, 대화, 논의, 담론 생산 등 우리의 감성과 지성, 심리적이고 사회적인 연결을 통해 공적 삶의 다양한 형태를 섬세하게 고안해 왔다.
5.
이러한 예술 창작을 위한 플랫폼2이 존재한다면 어떠한 형태와 방식, 규모가 적절할 수 있을까? 만약 거대화·획일화를 지향하며 단일한 결과지표를 향해 가동된다면? 플랫폼에 탑재되기 위한 적절한 제품/콘텐츠들만 선별되고 이를 위해 생산 납품이 암묵적 합의 또는 묵인으로 진행된다면? 그래서 공적 완충지로서 생태의 미세혈관 같은 다양한 관계망들을 통해 발생되는 과정이 사라진다면? 오로지 생산-소비를 둘러싼 팬덤 문화만이 남는다면?
예술의 공적 층위가 사라진 공급만이 남는 세계는 ‘1984’와 ‘멋진 신세계’가 그려냈던 전체주의적 디스토피아의 계곡 사이에서 진자운동만을 반복하게 될 거라는 두려움은 비약적 상상일까.
6.
기술진화로 가속화되고 있는 플랫폼 시장의 효율성·역동성, 그리고 최대만족을 끌어내기 위해 세분화된 서비스제공의 편의성을 부인하지 않는다. 여기에서 예술지상주의나 순혈주의, 러다이트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더더욱 아니다. 다만 시장의 취약점을 보완해야할 공공정책이 미세 영역 중 하나인 기초예술 플랫폼을 만들고자 할 때 어떤 방식이 유효하게 작동할 수 있는지 짚어볼 필요가 있다.
특히 공공 의존도가 지극히 높은 영역에서 플랫폼은 어디를 가리키고 무엇을 모델로 삼고 있는지, 공적 자금 집행처로서 공공기관이 플랫폼을 자처한다면 창작자는 콘텐츠를 생산하는 플랫폼 노동자 외에 어떤 역할이 가능한지 우리는 질문해보아야 한다. 플랫폼 기업-콘텐츠 공급자라는 산업구조3가 예술현장, 특히 영리추구만이 존재이유나 목적이 아닌 예술계에 적절하게 작동하게 될지, 심지어 효율을 낼 수 있는 도구인지도 묻고 싶다. 일상의 광장을 무화시키고 타자와의 대화, 교류, 상호반응이 사라진 세계에서 음소거된 통제와 억압의 메카니즘을 떠올리는 것은 단지 문학적 상상이 아닌 도래한 현실이기 때문이다.
홍은지
상상을 현실로 옮기는 것이 즐거워 공연예술 연출, 축제·공간 운영 등의 일을 해왔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 ‘공적인public’과 ‘정치적인political’이라는 단어를 마치 하나인 듯 사용하지만 동의어가 아니다. 공적공간은 정부와 재정 제도가 긴밀하게 맞물린 정치권력 구조와 중앙 권력에 취약한 고립된 개인들의 집합 사이에 위치한 낯선 사람들이 자유롭게 섞일 수 있는 장소라고 볼 수 있다. ↩︎
-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공공기관 및 지자체 문화재단 등에서 ‘플랫폼’을 표방한 지원관리 시스템을 구축해왔고, 최근 정책사업 뿐 아니라 기관미션으로 채택되기도 한다. 하지만 ‘포털’과 ‘플랫폼’을 혼용하며 관리감독, 정보접근, 상호작용 등의 기능적 차이를 흐리기도 한다.
https://www.enews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2305095 ↩︎ - 이번 정부는 지난 9일, 대통령 직속 대중문화교류위원회를 신설하고, 공동위원장에 박진영 제이와이피(JYP)엔터테인먼트 대표 프로듀서와 최휘영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을 내정했다.
https://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1217810.html
https://www.asiatime.co.kr/article/20250715500220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