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재
오이디푸스 얘들아, 따라오너라! 이리로! 전에 너희가 이 아비의
길라잡이였듯이, 이번에는 기이하게도 내가 너희의
길라잡이가 되었으니 말이다. 자, 오너라. 내게
손대지 말고, 내가 이 나라에서 묻히게 되어 있는
그 신성한 무덤을 나 혼자 찾아내게 해다오.
이 길로, 이쪽으로, 이 길로 오너라! 인도자 헤르메스와
지하의 여신께서 나를 이 길로 인도하시니까.
내게는 햇빛이 아닌 햇빛이여, 전에는 네가 내 것이기도
했지만, 이제 마지막으로 내 육신이 너를 느끼는구나!
나는 지금 내 인생의 마지막을 하데스에게 숨기러 가는
길이니까. (테세우스에게) 하지만 가장 사랑하는 친구여,
그대와 이 나라와 그대의 백성들은 부디 행복하시오!
그리고 번영을 누리면서도 죽은 나를 생각하시오.
그대들의 영원한 행복을 위하여!
– 소포클레스,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 1542-1555행
최근에 지독한 여름감기를 앓았다. 처음에는 냉방병인 줄 알고 며칠 잘 먹고 잘 쉬었는데, 아무리 쉬어도 똑 떨어지지가 않았다. 대단한 증세가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일상으로 복귀하자니 책상 앞에 앉기가 괴로웠다. 2년 전 겪었던 코로나 후유증과 증상이 비슷했다. 하지만 검사를 할 때마다 번번이 음성이었다. 친구들은 저마다 나를 진단했다. 누구는 더위를 먹은 것이라고, 누구는 스트레스 때문이라고, 여자들이 이유 없이 앓는 ‘여자병’이라고 일러준 이도 있었다. 이비인후과의 고무 냄새 나는 침상에 누워 뻐근한 팔오금을 보면서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내가 걸린 병은 ‘후유증’이로구나. 무엇의 후유증이 아닌 후유증 그 자체로구나. 헌데 병을 치르지 않고 병의 이후만을 앓을 수가 있나? 후유증이 질병의 잔여가 아닌, 질병과 동연적인 시공간을 점하는 하나의 세계가 될 수 있을까?
삶이 끝나면 죽음은 찾아올 것이다. 우리는 말한다. “그곳에서는 평안하길. 영면하소서.” 하지만 그곳은 정말 평안하며 영면이란 가능한가? 삶과 죽음은 순차적으로 구획되는가?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에는 나르키소스의 죽음 이후가 짤막하게 그려진다. 나르키소스는 연못을 들여다보다 결코 접촉할 수 없는 이미지에 매혹되어 죽게 되는데 그는 망자가 되어서도 저승의 강에 얼굴을 비춰보고는 생전과 꼭 같은 절망을 느낀다. 카프카의 단편 <사냥꾼 그라쿠스>에도 비슷한 존재가 등장한다. 그라쿠스는 죽었지만 여전히 살아서 이승을 떠돈다. 삶과 죽음이 중첩되어 있다는 이야기들은 우리를 아연실색하게 한다. 이 둘이 서로를 종결시키는 대립항이 아니라면 대체 어디를 앞이라고 부를 것인가.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는 삶과 죽음의 중첩에 관한, 내가 아는 가장 신비로운 희곡이다. 이 작품을 쓴 소포클레스는 기원전 497년에 태어나 406년까지 구십하고도 두 해를 더 살았다. 당시로서는 이례적으로 장수한 사람이었다. 죽음을 앞둔 소포클레스는 노구를 이끌고 오이디푸스의 죽음에 관한 마지막 비극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를 집필한다. 비극의 주인공에게 죽음은 곧 숭고한 파멸이리라. 그러나 비극 작가 소포클레스에게는 아니었을 것이다. 늙고 병든 그에게 죽음은 아직 오지 않았지만 이미 너무 많이 와 있는 무엇이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이 작품은 파멸과 수수께끼가 전부 지나간 이후, 비극의 잔해 위에서 시작된다.
늙은 오이디푸스는 방랑 끝에 자비로운 여신들의 성역에 도착한다. 그리고 구원을 청한다. 그러나 콜로노스의 주민들은 금지된 장소에서 어서 나오라 경고한다. 도시의 성탑들은 멀리 있고 사람은 거의 다니지 않는다. 언뜻 보면 이곳은 도시와 동떨어진 장소인 것 같다. 그러나 성역은 혼돈으로 가득 찬 야전(eremos)도 질서가 지배하는 도시(polis)도 아니다. 두 공간의 사이이면서 동시에 이 둘을 연결하는 신성한 경계다. 이 이중적 공간 위에서 이야기는 펼쳐진다.
이중성은 오이디푸스의 정체성이기도 하다. 그는 스핑크스라는 괴물로부터 문명을 지켜낸 인간인 동시에 부친살해와 근친상간으로 문명의 질서를 파괴한 야만적 존재다. 도시를 수호하는 영웅인 동시에 도시를 파괴할 만큼 위험한 터부다. 오이디푸스의 무덤이 테베를 지켜줄 것이라는 신탁이 있었음에도 크레온이 그를 완전히 추방하지도 국경 안으로 초대하지도 못하는 것은 이러한 까닭이다. 체제를 분열시키면서 동시에 체제를 완성시키는 내재적 모순으로서 오이디푸스는 거기에 있다. 그리고 체제 속의 틈이라는 운명은 이 작품을 통해 오이디푸스로부터 안티고네에게로 상속된다.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에서 가장 이중적이고도 기이한 사건은 오이디푸스의 죽음이다. 안티고네를 길잡이 삼아 방랑했던 오이디푸스는 죽음의 목전에서 그 역할을 뒤집는다. 그는 안티고네와 이스메네, 아테나이의 왕 테세우스의 인도자가 되어 신성한 무덤을 찾아간다. 천둥 번개가 치는 하늘 아래서 딸들과 마지막 인사를 나눈다. 그리고 앞서 인용한 대사를 마지막으로 ‘사라진다’. 시간이 지나 그의 죽음을 전하는 이는 사자다.1
사자 “얘들아, 너희는 마음씨가 착해야 하며, 괴롭더라도
여기 이 장소를 떠나고, 보아서는 안 될 것을 보거나,
들어서는 안 될 말을 들으려 해서는 안 된다.
그러니 너희는 되도록 빨리 떠나거라!”
(…) 그곳을 떠나고 잠시 후
우리가 뒤돌아보니, 오이디푸스 그분은
온데간데없고 왕께서 홀로, 마치 어느 누구도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무엇인가 끔찍한 것이
나타나기라도 한 양, 눈을 가리려고
얼굴에 손을 갖다대고 계신 것이 보였어요. (1640-1652행)
이스메네 아버지께서는 무덤 없이, 사람들과 떨어진 곳에서 돌아가셨어요. (1733행)
안티고네 우리는 우리 아버지의 무덤을 우리 눈으로 보고 싶어요.
테세우스 그건 안 될 일이오.
안티고네 왜 안 된다는 거죠, 왕이시여, 아테나이의 통치자시여?
테세우스 소녀들이여, 그분이 내게 금지했소. (1756-1762행)
오이디푸스의 죽음은 죽음이라기보다 오히려 신비로운 실종, 일종의 차원 이동처럼 보인다. 오이디푸스는 어째서 자신의 죽음을 목도하거나 죽어가는 자신을 만지는 일을 금지했을까? 그는 왜 그토록 사랑하는 두 딸에게 자신의 묫자리도 알려주지 않은 것일까?
나는 꽤 오랫동안 오이디푸스의 죽음에 대해 생각했다. 운명을 거슬러 죽음을 향해 뛰어드는 용기보다 주어진 운명을 받아들이며 “저승의 들판으로 낚아채어”지는 겸허함을 나는 어째서 더 숭고하다고 느끼는가. 승리나 파멸로부터 유리된 죽음은 왜 이토록 지리멸렬한 동시에 아름다운가.
어슐러 르귄의 소설 <테하누>에는 이런 장면이 나온다. 한때 위대한 마법사였으나 지금은 늙어버린 테나와 게드는 마법의 능력을 거의 상실한 채 염소를 치며 살아간다. 어느날 게드는 고아 아이에게 오래 전의 모험담을 들려준다. 아이는 말한다.
“언젠가 임금님이 사는 곳으로 날아서 갈래요.”
테루가 게드에게 말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꼭 갈 거예요. 새매도 임금님을 알아요?”
“그래. 알지. 그와 함께 긴 여행을 갔단다.”
“어디로요?”
“해가 뜨지 않고 별이지지 않는 곳으로. 그리고 그곳에서 돌아왔지.”
“날아서요?”
그는 고개를 저었다.
“난 오직 걸을 줄만 안단다.”
– 어슐러 르귄, 『테하누』(최준영·이지연 옮김, 황금가지, 2006) 322쪽
오이디푸스는 오래 걸은 사람이다. 테베에서 코린토스로, 코린토스에서 다시 테베로, 그리고 아테나이로. 그는 날지 않고 배나 마차를 타지 않는다. 도보 여행자의 신분으로 마차를 탄 아버지를 죽이기도 한다. 방랑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는 조건이다. 극의 초반, 오이디푸스는 묻는다. “내가 아무것도 아닐 때 비로소 영웅이 된다는 말이냐?” (393행)
영웅과 신들은 타자의 육신을 희생시킴으로써 자기 자신을 상징화한다. 그리고 삶의 세계에서 상징을 전승시킨다. 네메아의 사자 가죽을 두른 헤라클레스와 왕뱀 퓌톤을 살해한 뒤 퓌톤 제전을 제정한 아폴론을 생각해 보라. 오이디푸스 역시 스핑크스를 살해하여 영웅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얻은 상징을 기이한 죽음을 통해 연기처럼 흩어버린다. 무덤은 상징화된 죽음이자 종결된 삶의 기호다. 하지만 오이디푸스는 어떤 봉분도, 애도와 기념을 가능하게 하는 어떤 지표도, 임종에의 기억도 남기지 않는다. 장례를 박탈함으로써 애도를 끝없이 늘이고 죽음을 암호화함으로써 삶의 종결을 무한히 연기하며 끝내 상징이 되기를 부정한다.
따라서 오이디푸스는 종결되지 않는다. 떠남이 아닌 떠나감, 죽음이 아닌 죽어감 속에 기거한다. 멀어짐으로써 감각되고 사라짐으로써 만져지는 것으로, 아무것도 아님으로써 무엇이 되는 방식으로,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공백으로, 산 자도 죽은 자도 아닌 존재로, 부재함으로써 현전한다. 죽음 앞에서 오이디푸스는 이렇게 말한다. “자, 오너라. 내게 손대지 말고” 다가감은 접촉일진대 어떻게 손대지 않고 다가갈 수 있는가. 프랑스의 철학자 장-뤽 낭시는 말한다. “사랑과 진리는 만지면서 밀어내는 것이다. 그것들이 우리 쪽으로 가까워지는 행위, 그것은 그것들의 멀어짐이다. 그것들은 우리에게 그 멀어짐을 느끼게 해준다. 그리고 이 멀어지면서 만져지는 감각이 사랑과 진리의 의미 자체이다. (…) 너는 누구도 잡거나 붙잡을 수 없다. 바로 그게 사랑하고 아는 것이다. 너에게서 빠져 달아나는 이를 사랑하라. 가버리는 이를 사랑하라. 떠나고자 하는 이를 사랑하라.” 장-뤽 낭시, 『나를 만지지 마라』 정과리 옮김, 문학과 지성사, 2015, 64쪽
다시 돌아가 이야기해 볼까. 나는 그날 이비인후과에 누워서 생각했다. 죽어도 삶이 끝나지 않고 살아도 죽은 것과 다름없고 그렇다고 출생을 철회할 수도 없다면 완전한 해방은 어디에 있단 말인가. 죽을 수도 살 수도 없다면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종결 없이 아득한 생의 감각을 느낄 때, 무엇이 되고 싶은 마음 때문에 괴로울 때 나는 이 작품을 떠올린다. 그러면 언제나 이런 결론에 다다른다. 죽음은 삶 속에서 계속해서 출몰하며 어떤 삶은 죽음을 통해야지만 살 수 있게 된다고. 말할 수 없는 것들에 깊이 찔리기 위해 나는 살고 귀결을 허용하지 않는 것들에 나는 복무하며 아무것도 아닐 때 나는 비로소 주체가 된다고. 요란한 매미 소리를 들으며 병원 앞 횡단보도를 건넜다. 잔혹한 생의 광휘가 온 세상에 내리꽂히고 있었다. 어렴풋한 앎 속에서 사람들은 하루하루를 미끄러뜨리리라. 그러니 우리는 아주 오래 걸어야 한다.
___________
작품 출처 : 소포클레스,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소포클레스 비극 전집』(천병희 옮김, 숲, 2008)
김연재
극작가. 무대와 희곡 사이, 문자와 말과 몸의 사이를 탐구하며 연극의 가장자리에서 희곡의 틀을 다시 짜는 데 관심이 있다.
@publish_serially
____________
- 사자는 오이디푸스의 마지막 말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얘들아, 오늘로
너희에게 아버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이제 내 모든 것이 소멸하여, 너희는 더 이상
나를 부양하는 수고를 하지 않게 된다.
힘든 수고였지. 알고 있다, 얘들아. 하지만 단 한 마디 말이
나를 위한 그 모든 수고를 보상해줄 것이다.
말하자면 나는 너희를 사랑했고, 어느 누구도
나보다 더 너희를 사랑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제 너희는 나 없이 남은 생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1611-1619행)
나는 “힘든 수고였지. 알고 있다.” 이 부분을 읽을 때마다 언제나 울게 된다. 오이디푸스는 끔찍한 운명의 산물이자 죄의 증거들에게 누구보다 너희를 사랑했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자신과 마찬가지로 가혹한 그들의 운명을 위로한다. 인간은 사랑의 반대급부로 치달으면서도 이토록 사랑할 수 있다. 사랑과 고통은 한쪽의 강도가 커진다고 하여 다른 한쪽을 수그러뜨리는 법이 없다. 우리가 가보지 않은, 그러나 우리 앞에 예비된 생의 가능성이 저기 어둠 속에서 천 길이나 자라나고 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