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새
2024년 12.3 내란 사태 이후, ‘계엄’이라는 단어가 내 삶에 불쑥 끼어들었다. 사전적으로는 비상사태에 군대를 치안에 동원하는 제도라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그것이 이렇게 갑작스레 현실이 될 줄은 몰랐다. 벌어진 상황을 ‘인지’하고 나의 삶과 연결 짓는 데는 시간이 꽤 걸렸다.
민주주의를 감각하다
2016년 촛불시위와 2017년 대통령 탄핵은 ‘작동하는 헌법’을 체감하게 한 특별한 경험이었다. 특히 연극계는 2015년 ‘블랙리스트-팝업씨어터’ 사건 이후 “권리장전2016_검열각하”라는 정치극 페스티벌로 응수했으며, 예술가이자 시민으로서의 감각이 동시에 깨어나는 전환점을 맞았다.
그 감수성은 자연스레 나 자신, 내가 속한 팀, 연극계를 돌아보게 했다. 외부의 민주주의 붕괴뿐 아니라 내부의 반민주적 관행들, 민주주의로 포장된 위선까지. 문제는 정권만이 아니라 ‘우리’ 안에도 있었다.
이러한 자각은 2018년 ‘미투’ 운동으로 이어졌다. 예술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신체적 자유와 정신적 안전은, 내부 민주주의가 작동할 때에만 보장될 수 있다는 각성이 행동으로 이어진 것이다. 민주주의는 곧, 주권자인 ‘나’들이 서로의 다름을 말하고 듣고 토론하는 과정이다. 그런 점에서 문화예술계의 ‘거버넌스’는 선택이 아닌 필수 과목인 셈이다.
물론, 코로나19라는 긴급상황은 ‘표현의 자유’와 ‘안전’ 사이에서 충돌을 일으켰다. 예술가적 자유와 공공적 책임이 맞부딪혔고, 그 과정에서 익혔던 민주주의 감각은 점점 희미해지기도 했다. 생존 논리에 의해 거버넌스는 ‘기회의 보장’보다는 ‘활동비 창구’로 전락하기도 했고, 일부 예술가 운영위원들은 공공을 대신한 ‘안전 관리자’의 역할에 머무르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시행착오는 후불제 민주주의가 겪어야 할 성장통일 수 있다. 이 혼란스러운 경험이 문화예술계 내부의 민주주의를 비관하거나 포기하게 해서는 안 된다.
계엄 이후, 다시 묻는 감수성
계엄 사태는 내 안에 잠재되어 있던 민주주의 감각을 다시 일깨웠다. 국회로 달려가 몸으로 막아낸 시민들, 광장과 고갯길에서 응원봉을 든 사람들 덕분에, 우리는 폭력적 정치권력을 막을 수 있었다. 시민으로서의 존엄, 국민으로서의 주권이 거기에 모여 있었다. 민주주의는 선언이나 제도가 아니라, 어떻게 감각하고 실천하는가의 문제임을 새삼 느꼈다.
그렇다면, 내가 속한 예술계의 민주주의는 어떤가. 나는 광장의 시민들처럼 용감하게 나의 존엄과 권리를 말할 수 있는가? 혹시 나는 계엄에 침묵하고 내란을 옹호하는 자리에 서 있지는 않았는가? 부당한 명령에 반기를 들 수 있는가? 공공의 가치를 위해 손해를 감수할 수 있는가?
우리 예술계는 겉보기엔 평등하고 자유로워 보이지만, 실제로는 긴장과 자율성 사이의 불균형이 누적되어 있다. 말하기 어렵고 실현하기 어려운 ‘내부 민주주의’는 여전히 풀리지 않는 과제로 남아 있다. 어쩌면 한국 사회가 민주화되는 속도보다 예술계의 민주화는 더디고 어려운지도 모른다. 문화예술의 제도는 정교해졌지만, 민주주의라는 이념은 오히려 퇴색되고 있음을 실감한다.
소규모 단체에서 민주주의는 가능한가
예술단체 대부분은 규모가 작고, 창작과 행정이 분리되어 있지 않다. 이런 구조에서는 ‘빠른 결정’이 효율의 이름으로 정당화되며, 구성원 간의 논의는 종종 ‘비효율’로 간주된다. 짧은 일정, 단기계약 중심의 고용구조는 구성원의 참여 여지를 더욱 좁힌다.
결국 민주주의는 회의 공간 밖으로 밀려나고, ‘침묵’이 자연스러운 응답이 된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단체가 소규모라서 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소규모일수록 신뢰와 수평성이 중요하다. 문제는 이것이 실현되지 않기 때문에 발생한다. 창작과 행정이 섞인 구조는 ‘역할의 경계 없음’이 아니라 ‘권한의 불균형’으로 작동하게 된다. 이를 견제할 시스템조차 없다면, 공정성과 공공성은 기대하기 어렵다.
협회나 예술인 네트워크는 공적 발언과 사적 헌신이 중첩된 구조를 지닌다. 회장은 명예직인 경우가 많고, 실무는 안정성 없이 이루어진다. 회원들은 정보 접근성이 낮고, 조직은 회원 중심이 아닌 행정 중심으로 운영된다. 이 구조에서 ‘빠른 결정’과 ‘침묵’은 오히려 미덕이 된다.
코로나 시기, 연극계 모 협회에서는 회장 선출에 비대면 선거가 도입되었다. 비밀선거, 직접선거라는 기본 원칙에 대한 숙의 없이 ‘절박한 상황이니 어쩔 수 없다’는 논리로 정당화되었다. 선거인 명부의 불투명성, 정보 비공개 등은 결국 공정성 논란을 야기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민주주의는 단지 절차적 정당성만으로 확보되지 않는다. 정보 공유, 감시 가능성, 자율적 참여 문화가 동반되어야 비로소 의미를 가질 수 있다.
공공기관의 정치와 ‘거버넌스의 외피’
공공문화예술기관은 예술성과 행정성을 동시에 요구받는다. 예술위원회, 지역문화재단 등은 예술적 가치와 정책 기준 사이에서 끊임없이 균형을 조정해야 한다. 문제는 이 균형이 지나치게 외부 정치 환경에 의존한다는 점이다. 기관장은 정무 판단에 따라 임명되며, 그 과정은 투명하지 않다. 이사회는 형식적으로 존재하되, 견제 기능은 약하다.
그 결과, 문화예술기관의 장은 전략가라기보다는 연 단위 사업계획과 예산 수주에 몰두하는 관리자가 되기 쉽다. 미래 의제를 설계하기보다, 현재의 통치 논리에 따른 ‘성과’와 ‘생존’에 집중한다. 기후위기, 예술가 권리, 차별금지, 돌봄과 노동, 인구 문제 등은 논의의 장에서 밀려나고 -AI 인공지능 등의 유행 이슈를 제외한 – 내일을 위한 오늘의 담론은 어느덧 자취를 감추었다.
이 모든 것은 외부 정치와 내부 정치의 연동 구조 속에서 발생한다. 대선, 총선, 지방선거는 기관장의 인선, 예산 배정, 조직 개편에 직접 영향을 미친다. 실상, 그런 과정에서 예술조직은 단체의 이념과 사회적 책무와는 무관하게, ‘우리 공동체’의 생존만을 위해 정치적 수장에게 종속되고야 마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공정성과 투명성’은 자주 후순위로 밀린다. 결국 문화예술계의 민주주의는 형식만 남고, 실질적 작동은 멈춘다. 공공기관은 ESG 평가, 노조 활동 등을 수치화하며 조직의 민주성을 측정하려 한다. 그러나 현장의 실질적 의사소통 문화가 바뀌지 않는 한, 그런 평가는 공허할 뿐이다. 문화예술의 역사와 예술경영의 역사를 겹쳐보면, 점점 고도화되는 것은 ‘문화’에 대한 민감성이나 ‘민주’에 대한 감수성이 아니라, 예술(가)을 관리하는 통치술이 아닐까. 결국 ‘문화민주주의’는 관리 기술의 또 다른 이름이 되어버린 것이다.
예술과 민주주의, 거울을 마주 보다
문화예술은 언제나 시대를 앞서 사유해왔다. 그런 공동체가 내부의 민주주의조차 실현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발언은 어디에서 힘을 얻을 수 있을까. 예술과 삶이 따로 놀고, 말과 행동이 어긋날 때, 예술의 생명력은 사라진다. 그러고도 민주주의가 원래 그런 것이라 스스로를 속인다면, 그것은 실로 염치없는 일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우리는 어떤 조직 문화를 만들고 있는가? 그것은 우리가 말하는 가치와 일치하는가? 자율적 시민성, 예술가의 존엄, 공적인 감각, 지식인으로서의 책무는 내부에서 어떻게 논의되고 있는가? 민주주의는 선언이 아니라, 일상의 실천을 통해 구성되는 질서다. 문화예술계는 그 실천의 현장이 되어야 한다.
정진새
극단문 작가, 연출가. SF연극, 어린이연극, 생태연극에 관심이 많다. 삼일로창고극장 운영위원,연극in웹진 편집장등을 역임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