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근애

장애연극은 비장애연극과 동일한 문법으로 말해질 수 없다. 이는 단지 무대 위에 서는 몸이 다르기 때문이 아니라, 연극을 구성하는 언어와 감각, 리듬과 기표 체계 자체가 달라질 수 있음을 의미한다. 장애의 경험은 기존 연극 언어가 전제하는 ‘정상적인’ 신체, 뚜렷한 발성, 일관된 동작, 직선적 시간 구조 등에 균열을 가한다. 따라서 장애연극은 기존 기호 체계의 안에 머무르거나 그것을 복제하지 않고, 그 기호의 구조를 다시 쓰는 실천이다. 장애연극은 단지 새로운 등장인물이나 주제를 제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연극을 구성하는 말하기의 방식 자체를 전복하며 ‘말’이라는 기호의 작동 방식에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말은 경험을 담아내는 방식이자, 그것을 표현하는 기호다. 인간은 경험을 통해 물리적으로 구성된 세계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재구성하고, 언어는 이를 구조화된 기호를 통해 체계화한다. 그러나 기호는 본질적으로 자의적인 연합이며 불완전하고 유동적이다. 잘 알려져 있듯, 라캉은 기표signifiant가 기의signifié에 닿지 못하고 계속 미끄러진다고 보았다. 즉 의미는 기표들 사이의 차이 속에서만 잠정적으로 성립될 뿐 현존하지 않으며, 언어는 실재를 직접적으로 재현하지 못한다. 따라서 말은 끊임없이 미끄러지고 흔들리는 의미의 운동 속에서 나타나는, 경험을 표현하는 한 형식이다.

기호의 틈에서 말하기

장애와 관련된 언어는 일상에서 종종 무심히 사용되지만, 많은 경우 혐오의 기표로 작동한다. ‘눈이 멀었다’나 ‘대사를 전다’ 같은 표현은 더 이상 단순한 비유로 기능하지 않는다. 이 말들은 장애인의 실제 경험과 맞물리며, 상징적 표현을 넘어 현실적인 무게를 가진다. 이러한 표현들이 장애인의 삶과 감각을 일차원적인 은유로 소비하거나 대상화할 때, 장애 언어의 고유한 가능성은 오히려 억압될 수 있다.

‘장애 고유성’이라는 표현이 별다른 맥락 없이 반복 사용되는 현실도 문제다. 이 표현은 장애인의 경험과 감각을 고유한 것으로 인정하려는 시도처럼 보이지만, 때로는 장애를 신비화하거나 분리된 타자성으로 고착시키는 효과를 낳는다. 장애 고유성이라는 기표가 고정된 기의로 작동할 때, 이는 다시금 장애를 하나의 본질화된 범주로 만들 위험을 안고 있다. 따라서 장애 고유성이라는 말 역시 그 의미의 맥락과 기표-기의 관계를 끊임없이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장애’라는 단어는 인용 부호를 벗어날 수 있을까? 장애인은 더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말들로 구성된 세계에 살지 않는다. 이들에게 언어는 언제나 해석과 설명을 요구받으며, ‘그냥 그런 것’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이는 언어가 단순한 묘사가 아니라, 언제나 권력과 위계의 작동 속에서 의미를 구성한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장애는 단순히 한 상태를 지칭하는 명사가 아니라, 사회가 정상이라고 여기는 기준을 드러내고 되짚는 역할을 한다. 이러한 점에서 장애는 규범과 질서를 비추는 반사면이자, ‘보편’이라는 개념을 상대화하는 렌즈가 된다. 그렇게 낯설어진 장애라는 기표는 인용 부호 안에서 새로운 의미를 획득하며, 기존 언어 체계에 대한 비판적 개입으로 기능한다.

이와 같이 인용 부호 안에서 새롭게 구성된 장애라는 기표는, 때로는 기존의 혐오 표현조차 전복할 수 있는 언어적 실천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기표들을 장애예술가들이 전유하거나 전복하는 방식은 낙인의 언어를 비트는 실천이 될 수 있다. 예컨대 ‘대사를 전다’는 그 자체로 혐오의 표현일 수 있지만, 장애인이 무대에서 자기만의 속도와 방식으로 발화함으로써 새로운 감각과 리듬을 만들어낼 때, 말하기의 규범은 흔들린다. ‘정상적인 발성’이라는 기준 자체에 균열이 가는 것이다. 이처럼 장애라는 기표를 비판적으로 되읽고 재구성하려는 언어 실천은 낙인의 언어를 흔들며 새로운 감각과 관계를 구성할 수 있다.

기표를 다시 쓰기

에이블리즘ableism, 즉 능력주의 역시 언어 속에서 작동한다. 능력주의는 단지 능력을 중시해서가 아니라, 능력에 따른 차별을 승인하고 정당화하기 때문에 비판받아야 한다. 따라서 ‘능력’이라는 용어 자체를 재전유할 필요가 있다. 장애가 ‘할 수 없음’을 지시하는 순간, 그것은 능력주의의 기준에 대한 비판을 포함하는 동시에, 그 기준에 맞서거나 그것을 재구성하려는 실천의 가능성을 열어놓는다. 장애예술가는 때로 기예와 역량을 강화하고 그것을 관객에게 보여주고자 하며 이는 단순한 능력주의의 내면화라기보다는, 표현하고자 하는 욕망, 무대 위에서 존재하고자 하는 의지와 맞닿아 있다. 더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고 싶은 욕망은 누구에게나 있으며, 이는 장애인의 예술 실천에서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긴장과 역설 속에서 장애연극에서 사용되는 용어들, 예컨대 ‘서다’, ‘자립’, ‘돌봄’, ‘정상’ 같은 말들은 비장애 중심의 기의에 기대어 있을 때와, 장애인의 신체와 삶을 경유할 때 서로 다른 의미로 미끄러진다. 이는 장애연극이 단지 비장애언어를 차용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를 구성하는 방식 자체를 재구성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가령 시각장애예술가가 ‘이미지’라는 용어를 사용했을 때, 시각에 붙들려 있던 ‘이미지’라는 개념은 청각과 촉각, 정동과 기억이라는 감각의 층위로 확장된다. 이는 특정 감각에 고정된 기표가 장애인의 실천을 통해 어떻게 다른 기의로 미끄러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또 ‘자립’이라는 말은 흔히 타인의 도움 없이 혼자 생활하는 능력으로 이해되지만, 장애인의 삶에서 자립은 오히려 필연적인 도움과 함께 살아가는 관계망 속에서 자신을 주체로 구성하는 방식일 수 있다. 이는 ‘혼자 하는 것’이라는 비장애 중심의 기의를 벗어나, 지원과 의존, 상호성이 공존하는 다른 의미의 자립으로 기표가 전환되는 사례다. 그리고 ‘서다’라는 말의 기의를 건강한 두 다리로 직립보행이 가능한 신체로 한정하지 않는다면, 이 용어는 단지 물리적인 동작을 넘어, ‘몸을 일으키는’ 행위나 존재의 방식으로 다시 읽힐 수 있다. 이는 장애의 다양성을 고려한 새로운 의미의 생성이 가능함을 시사하며, 고정된 기표-기의 관계에 균열을 내는 해석의 실천이다.

기의의 바깥을 탈전유하기

장애연극은 말해지지 않았던 것, 기표화되지 않았던 몸과 감각, 목소리와 침묵을 드러내는 공간이다. 여기서 말하기는 더 이상 동일한 의미를 반복하거나 정형화된 표현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의미의 지연과 흔들림을 감각하게 하는 수행이다. 장애인의 몸은 그 자체로 기호화된 상징이나 메타포로 환원되지 않으며, 기존의 무대 문법을 벗어난 다른 시간, 다른 리듬, 다른 관계를 구성한다. 이것이 바로 탈전유ex-appropriation의 윤곽이 아닐까.

자크 데리다는 『에코그라피Echographies of Television』에서 ‘탈전유’라는 개념을 통해 전유의 구조 바깥을 사유하는 가능성을 탐색한다. 그는 모든 의미화와 소유가 전유를 기반으로 작동한다고 보면서, 그로부터 벗어나는 윤리적이고 정치적인 사유의 공간을 상상한다. 탈-전유는 더 이상 기존 기표를 되찾거나 바꾸는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언어의 구조 바깥에서 말해지지 않음과 존재함의 새로운 관계를 모색하는 시도다.

재-전유re-appropriation는 기존의 모욕적이거나 억압적인 기표를 되찾아 새로운 의미로 전환하는 전략이며, 이는 언어적 권력에 대한 저항의 일환이다. 반면 탈-전유는 그러한 기표 자체를 벗어나려는 시도다. 즉, 언어 체계 안에서 새로운 의미를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그 언어 체계 바깥의 침묵, 감각, 몸의 존재 방식으로 나아가려는 실천이다. 이 둘은 연속선상에 있으면서도 지향이 다르다. 재-전유가 여전히 언어의 틀 안에서 의미를 다시 쓰는 행위라면, 탈-전유는 말해질 수 없는 것의 공간을 상상하게 한다. ‘퀴어queer’와 ‘크립crip’이라는 단어가 대표적인 사례다. 원래는 모욕적인 낙인의 기표였던 이 단어들은, 당사자들에 의해 정체성과 정치적 실천의 언어로 되찾아졌고, 새로운 기의를 만들어내며 재-전유되었다. 그러나 이 재-전유조차도 고정된 의미로 환원되기보다는, 언제나 흔들리고 미끄러지며, 때로는 말해지지 않음으로써 언어 밖의 공간을 열어젖힌다. 즉 기존의 기표를 되찾거나 바꾸는 데 머무르지 않고, 아예 그 언어의 구조를 벗어나는 시도, 말하지 않음과 존재하기의 공간을 여는 행위가 되는 것이다.

장애연극의 이러한 탈-전유 전략은 기존 언어와 감각의 문법에 균열을 내며 새로운 형식을 탐색하는 실천이다. 그러나 이를 비평적으로 포착하기란 쉽지 않다. 장애연극이 보여주는 감각적 층위, 침묵과 기다림, 불확실성과 균열의 시간, 미래 없음과 실패의 기술은 익숙한 분석의 언어로는 다 담아내기 어렵다. 장애연극은 기존의 비평 언어와 다른 윤리적·감각적·시간적 리듬으로 작동하며, 비평 자체가 낯선 감각을 감지하고 그 언어를 탐색하는 과정이 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장애연극을 어떤 언어로 말할 수 있을까? 장애연극이 열어 보이는 이 새로운 감각과 윤리의 공간은, 그 자체로 장애연극 비평의 가능성과 과제를 함께 묻고 있는지도 모른다. 장애연극은 인용 부호 안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양근애

극장 안팎을 기웃거리며, 흔들리는 언어와 감각의 틈을 붙잡고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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