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연주

장미 내가 살려줄게. 조금만 기다려.

(중략)

장미는 탁자 위에 올려놓은 화분의 시들시들한 이파리를 만져보고 손가락으로 흙을 파내려다 말기를 반복하면서 손목시계도 흘깃흘깃 본다.

장미 두 시 오십 분. (사이) 두 시 오십일 분. (사이) 두 시 오십이 분.

자전거 세우는 소리가 난다.

장미 왔다!

– 김지수, <복작복작 수선리> 중에서

누군가가 누군가를 살려주겠다고 약속 혹은 다짐하는 말로 시작하는 희곡은 극단 애인의 대표이자 작가, 연출가로 활동 중인 김지수의 <복작복작 수선리>다.

무대 배경은 넓은 직사각형으로 트인 아카시아의 집이다. 그곳에 장미가 들어온다. 화초에 비해 화분이 작은 스파티필름을 안고. 매일 마을을 한 바퀴 돌고 점검하는 일은 장미의 루틴이다. 오늘도 장미는 마을을 돌다가 잎이 시들어가는 스파티필름 화분을 발견하고는 아카시아의 집으로 데려온다. 화분이 너무 작아서 전부터 분갈이가 필요했는데, 집주인 할아버지의 반대로 화초는 작은 화분에서 시들어가고 있다. 스파티필름이 시들어가던 집에 거주하던 노부부는 현재 부재한 상태다. 거동이 불편해진 할머니를 돌보던 할아버지는 살림과 간병을 도맡아 하다가 동반자살을 시도했고, 할아버지는 사망했지만 할머니의 죽음은 미수에 그쳤다.

등장인물 소개에 의하면, 장미는 30대 중반의 발달장애 여성이며 규칙적인 생활, 약속, 원칙을 중요하게 여기고 화초 돌보는 것을 좋아한다. 장미에게는 누구와 무엇을 해야 하는지, 기준이 있다. 화분과 관련된 일은 사루비아와 해야 한다. 산책이나 놀러 가는 일은 능소화와, 대화는 아카시아와 나눈다. 스파티필름이라는 식물의 이름은 아카시아에게는 어렵지만, 화초 돌보기를 좋아하는 장미에게는 어렵지 않다. 장미는 사루비아와 스파티필름의 분갈이를 하기 위해 아카시아의 집으로 온다. 사루비아는 아카시아의 오후 시간 활동지원인이다. 눈치챘겠지만 꽃의 이름을 가진 장미, 사루비아, 능소화, 아카시아는 모두 희곡의 등장인물이다.

장미가 애타게 기다리던 사루비아는 장미의 요청을 뒤로 하고 아카시아의 활동지원을 위해 활동보조서비스 바우처 카드부터 찍는다. 장미는 한숨을 쉬면서도 사루비아를 기다리고, 사루비아는 아카시아에게 뭐부터 할지 묻는다. 아카시아는 사루비아를 애타게 기다린 장미를 위해 분갈이를 먼저 해야 하지 않겠냐고 사루비아에게 묻고, 장미는 좋다고 답한다. 그 사이, 사루비아를 따라온 수국이 할 일을 찾아서 능소화에게 물으면, 능소화는 또다시 수국에게 ‘그래주시겠냐’며 묻는다. 사실상 이 물음들은 요청의 방식일 수도, 수긍일 수도 있으나, 주목할 점은 어느 쪽이든 상대의 결정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상대에게 시간이 필요하면 기다리고, 시간을 조금씩 더 쓰더라도 상대에게 자신의 결정을 전한다. 혼자 결정하기 어려우면 다시 다른 상대에게 또 물어보면 될 일이다. 희곡이 짓는 무대는, 공연의 포스터에서 볼 수 있듯 구획이 명확하지 않으며, 때로는 들쑥날쑥, 복작복작하다. 꽃의 이름을 가진 인물들의 대화는 빛의 방향과 물줄기를 따라 몸의 방향을 정하는 식물처럼 이동하는데, 마치 중심이 어디인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 같다. 그 가운데 아카시아의 집이 질서를 마련해주고, 아카시아의 집을 찾는 색색의 존재들은 집 앞으로 이어진 발자국과 휠체어 바퀴 자국처럼 희곡의 길을 낸다.

그림 설명: 공연 포스터. 포스터 가운데에 식물에 둘러싸인 집 한 채가 있고, 지붕 위에는 검은 고양이가 누워있다. 집 앞으로 여러 발자국과 휠체어 바퀴가 내어놓은 길이 이어지고, 그 주변으로 공연 정보가 제각각의 크기와 다양한 색깔의 글씨로 들쑥날쑥하게 적혀 있다. 공연 제목 위에 작은 무지개가 떠 있다.

수국 최금이 할머니는 그 집에서 혼자 지내시는 거예요?

아카시아 네.

사루비아 요양보호사님은 내일부터 오시나?

아카시아 응, 상담사님도 일주일에 한 번씩 오신대.

능소화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할아버지가 미워. 그건 엄연히 살인 미수잖아. 죽고 싶으면 혼자 가시지 왜 할머니한테까지. 결국, 혼자 가셨지만.

이들은 동반자살과 살인 미수 사이에서 할아버지가 선택한 방식과 과정에 대해 각자 다른 의견을 밝힌다. 할아버지의 입장으로 바라보면 간병의 고통, 익숙하지 않은 살림살이가 매일을 더욱 팍팍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우리는 언론보도를 통해 자주 접한다. 언론은 돌봄노동의 고단함을, 돌보는 이의 황폐해진 삶을, 이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논한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최금이 할머니와 같은 이들이 삶과 죽음을 선택할 권리로부터 배제되었다는 사실은 자주 삭제된다.

이 작품에서 최금이 할머니는 병상에서도 할아버지 장례와 관련된 모든 결정을 스스로 해낸다. 할머니의 선택과 결정을 통해 다른 등장인물들의 선택도 여러 갈래로 뻗어나간다. 결혼, 이혼, 출산, 요양원이 아닌 집에서 살아가기, 활동보조서비스, 연명치료, 유서, 장례의 방식, 자서전 쓰기 등 모든 인간에게 놓인 무수한 선택의 기로에서 장애, 질병, 노화, 가난, 성적 지향 등의 이유로 기회를 박탈당하지 않도록 서로에게 묻고 또 묻고, 요청한다.

능소화 어쩌다 그랬어?

아카시아 장미 모닝콜 끊고 핸드폰이 떨어질라그래서 잡다가 턱이 먼저 떨어졌네.

능소화 병원에 안 가봐도 되겠어?

아카시아 부러진 것 같지는 않아.

능소화 밤에 내가 활동지원 할까?

아카시아 아직은 혼자 있고 싶어.

아카시아는 전동휠체어를 타고 조이스틱을 턱으로 운전하는 50대 초반의 중증 장애 여성이다. 핸드폰을 잡다가 침대에서 떨어진 아카시아는 두 시간 동안 바닥에 누워 있었다. 오전 산책을 하던 장미가 발견해서 오전 시간 활동지원인에게 전화할 수 있었다. 주변을 돌아보는 장미 덕에 오전에는 아카시아가, 오후에는 스파티필름이 구조됐다. 아카시아와 사루비아는 20대에 일하면서 알게 된 사이로 가끔 만나다가 이제는 활동지원을 통해 매일 만나게 됐다. 사루비아의 파트너인 능소화도 아카시아의 매일에 연결된다. ‘장애가 세상을 바꾸는 조건이라고 생각’(『농담, 응시, 어수선한 연결』글 김슬기, 말 김지수, 가망서사, 2022, 23쪽)하는 작가 김지수의 세계에서는, ‘정상성과 보편’이라는 기준과 ‘혐오 정치’ 속에서 살아남은 이들이 자신의 장애를 유감없이 드러내고, 불쑥 장애와 연결된 농담으로 응수하며, 공동체 안에서 구성원으로서의 소임을 다한다.

아카시아는 3년 전에 가게 터였던 넓은 곳을 집으로 얻었다. 자신에게 맞게 공간을 나눠 쓰고, 사람들이 쉽게 드나들 수 있는 곳에서 살고 싶어서 얻은 곳이다. 실천의 방식으로 한 달에 한 번 이웃들과 밥을 먹는다. 아카시아의 장애는 사람들을 연결하면서도 아카시아를 중심으로 모이게 하지는 않는다. 모두가 아카시아만을 바라보지 않고, 아카시아를 매개로 연결된 관계들이 서로를 이어낸다. 그렇게 아카시아의 몸과 집은 사람들을 잇는 터가 된다. 이를 통해 돌봄이 선의의 영역으로 해석되거나 장애가 윤리의 영역에 머물도록 두지 않으며, 돌봄과 장애가 구성원들에게 주어진 매일의 일이자 관계의 문제로 재정의한다.

희곡의 마지막 장면에 이르면 오늘도 색색의 존재들이 아카시아의 집에 모여 포트락 파티를 준비한다. 이제야 제 몸에 맞는 화분으로 스파티필름 분갈이를 마친 장미는 마을 할머니들을 모시러 간다. 아카시아 집을 찾는 발자국과 휠체어 바퀴 자국은 이제 더 늘어날 것이다. 유영주 할머니, 이경미 할머니, 조응애 할머니, 박순철 할머니, 최금이 할머니의 방문과 함께. 서로를 돌보며 살아가기를 선택한 이들이 살해와 폭력으로부터 살아남은 또 다른 생존자들을 맞이한다.

아카시아는 포트락 파티의 하우스 음악으로 최금이 할머니가 흥얼거리던 백난아의 ‘아리랑 낭랑’을 튼다. 하우스 음악은 공연 시작 전에 관객들의 긴장을 덜어주거나 분위기를 고조시키기 위해 관객 입장할 때 흐른다. 희곡은 모여드는 사람들의 소리로 마무리되지만, 이야기는 이제야 시작될 것이다. 인사를 나누고, 서로의 관객이 되어주며, 살피고, 보아주는, 생존자들의 본 무대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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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 출처: 김지수, <복작복작 수선리>(작가 제공)

이연주

연극 쓰고 연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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