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산
윤미현 작가의 말마따나 된장은 항아리에 담기니 된장이고, 강아지는 개집에 담기니 개이며, 사람은 집에 담기니 사람인 셈으로, 담기는 곳은 정체를 결정한다<젊은 후시딘>, 2014. 이 연극평론은 신생의 웹진에 담기고 있다. 그러니 나는 이 글에서 평론입네 하는 말을 버리고 옛 사람들의 희문戲文처럼 가끔 농담이나 잡담을 섞으며 손을 재게 놀려 쓸 것이다.
‘참새’와 ‘뻐꾸기’의 말이 반가운 이유
연극 <산난기産難期>송천영 작, 이원재 연출·각색, 극단 달팽이주파수·연우무대 공동기획, 연우소극장, 2025.5.29.~6.8.는 오랜만에 젊은 연극인들에 의해 제작된, 꽤 깊이 문제를 생각한, 말을 즐기는 연극이다. 너무 줄여두었으니 좀 풀어보자. ‘젊은’ 연극인이란 무엇이고, ‘젊은 연극’이란 무엇인가 등등은 발화하는 각자의 희의적인 꿈이 섞인 논점이니 이제는 치워두려 한다. 한때는 이 화두가 중요한 줄 알았는데, 이제는 꽃은 모두 꽃임을 인정하게 되었다. 앞으로는 나의 감정을 움직이는 연극이나, 내 손을 움직이는 연극만을 비평하려는 참이다. <산난기>를 보고 나는 꽤 괜찮은 작가의 출현이 반가워 글을 쓴다.
<산난기>는 반쯤 핍진하고, 반쯤 신화적이다. 연극은 재개발을 위한 철거공사를 앞둔 폐가에서 ‘소년’전재현 분이 ‘소녀’이윤수 분를 만나면서 시작한다. 공사 현장의 비계와 쓰레기장에서 주워 온 가구, 침대가 놓여 있고 식수 겸 화장실의 뒤처리 용도로 떠둔 대용량 생수병이 귀퉁이에 놓여 있는 무대공간은 중화요리점 배달일을 하는 소년의 거처다. 소녀는 고등학교에서 꽤 모범생이었다. 무기정학을 받아 학교에 다니지 않은 소년과는 다른 부류이지만, 부른 배를 잡고 소년의 도움이 필요해 여기에 머무르고자 한다. 연극은 초반에 촘촘하게다르게 말하면 다소 지루하게 둘의 관계와 부모와 가정으로부터 튀어나온 그들 가난한 고등학생들의 신산한 삶, 임신과 아이에 대한 생각 등을 말로 펼쳐둔다. 어떻게 임신을 하였는지, 아버지는 누구인지 등등 어떠한 문제에도 소녀는 답하지 않는다. 관객들은 전통적 연극의 문법대로 대화의 행간에 주의를 기울이면서, 소녀의 임신과 소년은 아무런 관계가 없고, 소녀는 자신의 삶이 지긋지긋하며, 그저 뻐꾸기가 자신의 알을 품어 줄 둥지를 찾는 것처럼 이 집에 방문하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
청소년 이야기인가 보다 하고 무대에서 시선을 거두려는 때쯤 되어, 연극은 ‘딜러’오동욱 분의 방문을 통해 새로운 상황으로 관객을 인도한다. 대리모로서 소녀는 얻어갈 수 있는 많은 것을 금전으로 바꾸는 참이다. 딜러는 태아의 건강을 체크하고, “요즘 고등학생 무섭다니까요.” 너스레를 떨며 계약조건을 능숙하게 조정하며 소녀의 요구와 고객의 조건을 능란하게 맞추어 간다. 물론 자기의 이익도 빼놓지 않는다. 소녀는 태아를 유학자금으로 생각하고, 딜러는 소녀를 ‘보호가 필요한 계약 대상’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모성 같은 문제는 이 둘의 대화에 끼어들 틈이 없어 새롭다. 대화는 삭막하면서도 재기 넘치고 말은 날이 서 있으면서 위트가 있다. 연극이 다시 도약하는 것은 정자와 난자를 제공한 대리모 계약의 당사자, 남자김종성 분와 여자고수진 분가 등장할 때이다. 너에게는 좋은 기회야. 물론 대리모와 대면할 수 없다는 것이 계약 사항에 명시되어 있지만, 우리가 갑이니까 괜찮아. 돈 더 낼게. 임신 기간 동안 너의 몸과 자유는 우리의 것이 아니겠니 하며, 남자는 세련되고 고상함을 가장한 깐깐한 자본가의 모습으로, 여자는 이기적이고 무례한 인플루언서의 모습으로 이 집을 휘젓는다. 돌아와 있던 소년은 이 상황이 낯설고, 아이를 빼앗기는 것에 저항해 보려 하지만, 당연히 헛되다.
여기까지는 발상 좋은 젊은 연극에서 가끔 나오는 이야기처럼 보였다. 이 연극을 높이 평가하는 것은 자본주의적 계급사회의 냉정함을 그리는 ‘핍진함’에 그치지 않았다는 사실 때문이다. 마지막 도약, 모든 이들이 모여 각자의 악다구니가 펼쳐진 정점에서 소녀는 임신 7개월 만에 알을 낳는다. 알에서 태어난 위인들도 있으니까 잘 품어보시든가요, 하는 말을 퉁명스레 던진 딜러는 양자가 계약을 위반하였음을 고지하며 떠나고, 알에서 새가 나올지 인간이 나올지 불확실한 확률을 믿고 도박하기 싫은 남자와 여자가 떠나고, 소년과 소녀, 알만이 남는다. 철거 공사가 시작된다. “여기 사람이 있어요.” 하는 절규는 건물을 때려 부수는 강렬한 건축 장비들의 소음에 묻히며 연극은 막을 내린다. 작품의 마지막에 펼치는 신화적 서사로의 도약은 폐가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알, 소년과 소녀의 비극적 이미지를 거쳐, 에필로그 격으로 폐가에서 흔들리는 빈 새장의 이미지로 매조지 된다.
신화 세계의 탄생 이야기에 착취 구조를 덧대어 알의 출산을 비루하게 만들어내는 것이 이 연극이 던지는 말의 뼈이다. 해석의 결은 다양하겠다. 연출가는 소년과 소녀의 소외와 궁핍, 이들의 등골을 빨아 먹고 사는 자본, 계급과 같은 사회적 읽기에 관심을 두었다. 그건 그렇다 치고, 내 눈에는 오랜만에 꽤 괜찮은 젊은 ‘작가’가 출현하였다는 사실이 기뻤다. <산난기>는 시종 ‘새타령’이다. ‘참새’‘소년’의 별명이다와 ‘뻐꾸기’‘소녀’의 은유이다는 인물의 서사와 성격을 형성하는 라이트 모티프이고, <산난기>란 말은 언어 유희다. 산란産卵이라면 알을 낳는다는 뜻이고, 산난産難이라면 어려움을 낳는다는 뜻으로, 한학을 좀 하시는 분들은 ‘난산이지 왜 산난이요?’ 하겠다. 말놀이의 감각으로 이야기해 보자면, 소년과 소녀가 착취당하는 궁핍한 산란기청년기에 산란産卵하는 이야기를 중심으로 삼고, 난산으로 산난産難하는 이야기를 포개어 시대와 신화를 현대적으로 엮어 둔 것이다.
사르트르의 말마따나 현대적 ‘작가’는 주제를 위해 구조를 희생하는 데 주저함이 없어야 한다. ‘핍진함’의 논리만 따른다면 소녀는 아이를 빼앗기겠지. 젊은 연극의 흘러간 멜로디 같은 ‘먹고살기 힘들어요’가 반복되겠지. 모성 때문에 힘들 수도 있겠지. 그런데 이 작가는 시적이고 신화적 도약을 통해, 알을 낳았는데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이야기로 마지막을 그려 놓았다. 나는 이러한 모험을 시도한 젊은 ‘작가’를 오랜만에 보았다. 젊은 시절의 오태석이나 고연옥, 한때 좋은 작품을 썼던 김지훈의 작품과 스케일은 비슷하면서도, 좀 더 시니컬하고, ‘나는 당신을 날 선 말로 웃기고 싶어요’ 하는 모순된 말의 욕망을 가진 개성적 작가 말이다.
연극이 끝난 다음 새들이 궁금해졌다
나에게는 연극을 보면서 예민하게 감각하는 몇 가지 감정의 신호가 있다. 그중 하나는 무대가 끝난 후의 인상이다. 어떠한 연극들은 스토리만 남은 채 휘발되고, 어떠한 연극들은 공연의 미학적 시도를 복기해 보느라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어떠한 연극들은, 내가 좋아하는 연극들은, 무대가 끝난 뒤에 이 인물들이 어떠한 삶을 살 것인가 상상하게 만든다. 이야기가 끝났는데도 이야기를 상상해 보는 셈이다. 즐거운 모순어법이다. 연극은 극drama이라는 조건 하에서 이야기를 어떻게든 단락짓는다. 루카치 식으로 좀 비꼬자면 인간의 삶의 장면을 파고들면 들수록 거기에는 결국 넘어가지 못할 심연深淵이 존재하는 법일 텐데, 드라마는 그 심연에다 가설로 다리라도 놓아서 아무튼 2시간 안에 결론짓는다. 거기에서 끝난다면 딱 루카치 정도가 생각하는 드라마에 불과하다. 작가가 인물의 삶을 진정 살아있는 상태로 창조하였다면, 화두가 된다. 무대가 끝난 다음에도 이어질 그들의 삶은 관객의 머릿속 한켠에 궁금증으로 남게 된다.
나는 연극이 끝난 다음 참새와 뻐꾸기의 운명이 궁금해졌다. 이 글은 그러한 궁금증을 오랜만에 갖게 해 준 작품이다. 잠깐 삼천포로 빠져, 이 연극에서 내가 보았던 것들을 다시 살피겠다. 나는 2014년부터 연극평론을 썼다. 세월호 사태와 블랙리스트 사태의 한복판을 지나가던 시기였다. 밀물의 소용돌이처럼 사회와 역사에 대한 생각들을 쏟아내던 연극들이 휘몰아치던 때를 겪었고, 그 이후의 썰물도, 밑바닥에 드러난 갯벌의 풍경도 바라보았다. 부친상을 치른 시기에는 눈에 눈물이 고여있어 아무것도 볼 수 없었고, 다시 연극을 보기 시작하였던 시점은 대략 작년부터이다. 경력이 10년쯤 되었으니 이제 ‘중견’임을 자각하고 앞에 담장이 놓여 있다면 네 스스로 넘어가라 주변에서 채근하는데, 어느 못난 사람의 말마따나 “시끄러 임마” 속으로 속삭이면서 조금 그 시기를 지연시키고 있다. 아마도 이러한 주저함은 최근의 대학로 연극의 온도에 대해 내가 느끼는 당황스러움과도 연관이 되는 듯하다. 지난 1년간 세상은 개판이 되기 5분 전의 아비규환이었는데 연극계든 비평계든 참 평안하였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시오 하는 무언송無言誦에 염불 소리 괜찮았던 중들은 다 떠났고, 한국어지방어의 아름다움 같은 것을 새로운 연극의 덕이라 평가하고, 연극 미학적 실험성이나 세계 연극과의 교류 같은 것을 과업이라 이야기하는 시대는 평안하니, 옜다, 복 받아라.
좋은 연극 예술가는 그 시대에 어떠한 말이 필요한가를 아는 사람이라 나는 믿는다. 지난 시절에 그러한 말을 하였던 연극, <엑스트라 연대기>2023 같은 작품들은 신진의 것이 아니었다. 나는 신촌극장이나 선돌극장 같은 젊은 연극인들에게 기회를 주는 극장의 객석 뒷구석에서 젊은 목구멍에서 터져 나오는 무언가를 계속 찾았었던 것 같다. 십중의 팔구는 “시끄러 임마” 하는 마음 속 소리만이 들렸지만 말이다. 그러던 와중에, 이 새의 지저귐을 들어 반가웠다.
이 작품은 꽤 오래전에 쓰여져 발표되었고, 이번 공연에서는 연출가에 의해 각색되었다 한다. 내가 느꼈던 이 작품의 약점은 젊은 연극이 으레 겪을 법한 것들이다. 첫 번째는 악惡과 자본의 단순화. 이 작품에서 ‘남자’와 ‘여자’는 퍽이나 평면적이다. 무대 위의 남자는 등장하자마자 딜러의 따귀부터 붙여 ‘나는 나쁜 놈이오’ 하고 읽어주길 바라는 육체다. 남자의 언어가 가진 자본주의적 합리성은 그래서 자리를 잃고 공중에 흩어진다. 여자는 왜 등장했는지 모르겠다. 나쁜 놈의 언어를 적나라하게 표현하고 싶었을까? 그런 것은 뉴스나 TV 드라마를 보면 많이 있는데. 모성에 대한 것도 그렇다. 작가는 일부러 좀 빼두려 했던 것 같은데죄책감 정도로, 연출가가 살려두었나 싶은 장면들이 보였다. 두 번째는 연기와 무대에서의 정리. 연극에서 말을 즐겼다는 말은 작가에게는 행복이겠지만, 연출가에게는 다소 긴장되는 말이다. 좋은 말을 해줄 수 없어 미안하긴 한데, 전체적으로 이 연극에서 무대연출을 보는 재미는 덜하였다. 후반의 박력은 고심한 흔적이 보이지만, 그 박력이 여러 젊은 극단에 비해 특출난 것은 아니다. 소년의 연기는 별 재미가 없고, 소녀 역 이윤수 배우의 연기는 냉소와 죄책감 사이를 오가는 연기를 무난하게 해낸다. 딜러 역 오동욱 배우는 안정적인 연기로 이 작품에서 가장 맛깔나는 장면을 떠받치고 있다. 결국, 희곡이 재미있었기에 이 작품은 성공했다.
나는 연극이 끝난 다음 새들의 운명이 궁금해졌다. 그리고 송천영이란 작가가 어디까지 쓸 수 있을지 궁금해졌다. 폐가에서 알이 나왔네. 이런 작품을 두 작품만 더 쓴다면 언젠가 작가에게 시원한 맥주를 사주고 싶은 날도 오겠지. 그래도 ‘중견’ 비평가라는데 ‘꼰대’ 노릇은 좀 해야겠지. 건필하길 바란다.
“젊음의 꽃이 관객들에게 신선한 느낌을 주기 때문에 한 번씩은 승리를 거두기도 한다. 그렇게 되면, 다른 사람들도 실력 이상으로 높이 평가하게 되고, 본인 스스로도 명인이라도 된 듯이 우쭐해지기 십상이다. 이는 본인에게 심히 해가 되는 일이다. 이때 잠시 맛본 꽃은 결코 진정한 꽃이 아닌 것이다. 그저 연령상 젊다는 것과 관객들의 마음에 잠시 안겨 주는 신선함으로 인한 일시적인 꽃에 지나지 않는다.”
― 제아미, 『풍자화전風姿花傳』
백두산
한국연극을 공부하고, 비평도 하고, 잡글도 쓰고, 가끔 각색이나 드라마투르그도 한다. 꽃을 보는 마음으로 비평하려고 노력하고, 좀 너그러워지려고 훈련 중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