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아

시각문화에서 백인 재현의 문제를 비판적으로 다루는 『화이트 -백인 재현의 정치학』의 저자 리처드 다이어는 ‘전형을 따르지 않을 권리’는 ‘사회에서 가장 특권적인 권리’라고 말한다.1 다이어는, 사람을 재현한다는 것은 결국 그의 신체를 재현한다는 것인데, 현대 문화 안에서 흑인의 육체는 그의 인종으로 환원되지만, 백인은 신체적이거나 인종적인 것을 통해 구현되기는 해도 결코 인종으로 환원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비백인non-white2과 달리 백인은 ‘색이 아닌 것’이다. 백인은 사실 색이 있지만 그 색은 보이지 않으며, 백인도 인종이지만 인종화되지 않는다. 그들은 그저 ‘인간이라는 종human race’일 뿐이다. 그런 이유로 백인은 백인성으로 정체화되지 않으며, ‘정상성’, ‘보편성’, ‘기준’, ‘중립’이 된다. 반면, 백인 이외의 모든 인종은 타자화되며 인종화된다. 이것이 백인의 권력이며 ‘헤게모니적 백인성’이다. 헤게모니적 백인성에 대하여 다이어는 다음과 같이 비판적으로 말한다. “다른 사람들은 인종이고, 우리는 그냥 인간이다.”3
헤게모니적 백인성의 내면화
이러한 백인 중심성에서 한국연극은 자유롭지 않다. 아니, 한국연극은 오랫동안 헤게모니적 백인성을 내면화해 왔다. 무대 위 백인 캐릭터에게는 자신을 동일시해 온 반면, 그 외의 인종은 타자화했다. 한국의 관객은, 자신은 서구 관객과 동일한 ‘보편적’ 관점에서 무대를 바라본다고 생각했고, 이를 예술을 대하는 ‘중립적’ 태도라 여겼다.
도입부에서 제시한 1990년대 신문에 실린 이미지에서 확인할 수 있듯, 한국연극에서 흑인 캐릭터는 우선적으로 인종적 전형을 가시화하는 방식으로 재현되었다. 그러나 백인 등장인물을 재현하면서 백인이라는 인종적 표식을 드러내는 일은 거의 없었다. 백인 등장인물은 ‘개성’과 ‘보편성’을 갖춘 ‘개인’, 인종 이전의 ‘그냥 인간’ ‘보통 인간’이었다. 2017년 국립극단의 <김 씨네 편의점> ‘블랙페이스’ 논란에서 알 수 있듯, 최근까지도 한국연극에서 비백인 등장인물의 인종적, 민족적 전형화는 매우 흔한 일이었고, 그런 관습이 별다른 저항에 부딪히지도 않았다. 2017년의 논란 이후에도 ‘인종적 스테레오 타입’이나 ‘에스닉 클리셰’의 재현에 대한 문제의식은 좀처럼 쟁점화되지 못했다. 가끔 이에 대한 비판이 있을 때면 ‘우리는 아직 배우의 인종적 다양성을 확보하지 못했으니’라는 말로 변명하곤 했다. 그러나 ‘글로벌 한국’ 외치는 우리에게 왜 배우의 인종적 다양성이 없는가를 자문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객석은 중립적인 공간이 아니다
한국연극에서 인종주의와 그에 기반한 인종 재현의 문제가 가시화된 계기 중 하나는 2017년 국립극단의 ‘한민족 디아스포라 전’이다. 국립극단은 해외, 엄밀히 말하면 미국, 캐나다, 영국 등 영어권에서 활동하는 5인의 한국계 극작가들의 작품을 모아서 무대에 올리는 ‘한민족 디아스포라 전’을 진행하였다. 그런데 ‘한민족’이라는 타이틀을 앞세우며 ‘한국인의 정체성을 고민’한다는 애초의 의도와 달리, 이 기획전은 오히려 식민주의와 백색 신화에 뿌리를 둔 인종주의로부터 한국연극의 객석과 무대가 결코 중립적일 수 없다는 문제를 제기하는 계기가 되었다.
‘한민족 디아스포라 전’의 문을 연 첫 작품은 <용비어천가Songs of the Dragons Flying to Heaven>영진 리(Young Jean Lee) 작, 고영범 역, 오동식 연출였다. 관객을 불편하게 만드는 도발적인 작품으로 미국 연극계에서 주목을 받는 실험적인 작가 영진 리의 2006년 작 <용비어천가>는, 백인 사회가 기대하는 아시아 여성의 스테레오 타입을 거의 자학에 가까운 자기비하적 풍자로써 비틀어 보여주는 작품이다. 그런데 무대 위 등장인물인 한국계 미국인 여성이 쏟아내는 자기 혐오적이고 인종차별적인 발언은, 객석을 가득 채우고 앉아 있을 ‘백인’ 엘리트 관객을 특정한 후 이들을 향하도록 의도된 것이었다. 이 때문에 국립극단의 객석에 앉은 한국의 관객은 이 작품이 나를 향해 말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즉 이것이 ‘아시아인인 나를 위한 작품이 아니라는 것’을 시종 자각해야 했다. 나아가 작품이 전제하고 있는 ‘객석과 무대 사이의 인종 위계’와 ‘그 위계를 비트는 풍자적인 등장인물’ 그 어디에도 자신을 적절하게 위치 지우거나 감정 이입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했다.
<용비어천가>의 한국 관객이 느껴야 했던 위화감은 종종 번역극을 관람하면서 느꼈던 문화적 이질감이나 ‘한국 사회의 지금-여기’의 맥락과 관련된 문제가 아니었다. 우리가 서구 번역극을 대하면서 당연하게 전제하곤 했던 ‘중립적이고 보편적인 연극’, ‘보편적 관객으로서의 우리’, ‘모두를 위한 이야기’란 기실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 문제였다. 즉, 우리가 우리 자신을 서구의 관객과 동일하게 ‘보편적이고 중립적인 관객’으로 존재한다고 여겨온 것이 사실 자기기만에 가까웠다는 것을, 그것이 그저 ‘헤게모니적 백인성의 내면화’였음을 자각해야하는 문제였다. 그날, 무대와 객석 간의 어긋남이, 무대가 상정한 관객에 우리가 포함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우리가 지금껏 외면해 왔던 인종적 위계로 구성된 세계를 직시하게 만들고, 이른바 ‘보편 관객’으로 자임하며 서구 번역극을 취해온 역사를 되돌아보게 만든 것이다.
한편, 같은 기획하에 공연된 <김 씨네 편의점Kim’s Convenience>인스 최(Ins Choi) 작, 이오진 역, 오세혁 연출은 다소 ‘고전적이고 전통적인’ 인종주의 논란을 일으켰다. 공연 중 흑인 인물을 맡은 배우가 얼굴을 비롯한 피부색 전체를 어둡게 칠하고 아프로 스타일의 머리를 한 채 등장한 것이다. 이에 국립극단의 홈페이지에는, 공연예술사에서 ‘블랙페이스blackface ’가 지니는 인종차별적 의미와 무대예술의 오랜 인종주의적 역사를 언급하면서 이러한 역사와 인종주의에 대하여 무비판적인 국립극단 제작진의 인종 감수성을 비판하는 글이 올라왔다. 이 사건은 그간 번역극을 공연하면서 별다른 문제의식 없이 ‘흑인성’, ‘흑인의 표지’를 전형과 편견에 기댄 스테레오 타입으로 재현해 온 한국연극의 관행에 경종을 울리는 계기가 되었다.
‘보편성’ ‘예술성’ ‘중립성’의 함정
우리 안의 인종주의를 들여다 봄에 있어 가장 먼저 고려해야 하는 것은 ‘보편성’ ‘예술성’ ‘중립성’의 함정이다. 이 세 가지의 가치 주장은 종종 우리 안에 인종적 편견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부정하거나 구조화된 인종주의를 승인하는 역할을 하곤 한다. “나의 기준은 오직 예술성입니다. 인종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예술은 정치로부터 자유로워야 합니다.” “우리의 작품은 인종에 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야말로 인종을 보지 않는color blind 반인종주의자입니다.” “우리는 ‘인종을 초월하는’, ‘인종적으로 객관화된’, ‘보편적인 텍스트’를 만들고자 합니다.”라는 논리는 종종 우리 안에 인종주의가 실재한다는 것을 부정하거나, 우리 사회가 구조적으로 인종적 편견과 차별을 승인해 오고 있다는 사실을 감춘다.
‘예술성’과 ‘중립성’을 주장하는 이들의 ‘객관’과 ‘보편’은 사회 안에 이미 구조화되어 자리잡은 인종주의를 인지할 수도, 또 이에 저항할 수 없게 만든다. 이제오마 울루오가 주장하듯, 우리는 우리보다 먼저 자리 잡은 제도에 적응하여 살아가기 마련이기에, 애써 사회적 ‘기준’과 ‘규범’과 ‘보편’을 들여다보지 않고서는 우리 안의 차별과 배제와 편견을 인식할 수 없다.
“인종주의는 지배 체제(권력 구조)에 의해 유지되는 인종적 편견이다. 당신이 인종주의자가 아니라 하더라도, 인종주의가 당신이 살고 있는 사회의 지배 체제로 작동하고 있는 한, 당신은 인종주의 체제의 일부가 될 수 있다. 우리는 이미 자리 잡은 사회구조에 적응하여 살고 있을 뿐이며, 우리의 사회구조가 지속적인 차별을 암묵적으로 인정하는 구조라면 우리도 필연적으로 그 일부이기 때문이다.”
– 이제오마 올루오, <인종 토크 : 내 안의 차별의식을 들여다보는 17가지 질문> 중
무대 위 인종 재현의 문제는 ‘제도화되고 비가시화된 인종주의’, ‘오랜 관습과 제도’, ‘예술성과 보편성에 대한 기준’ 등이 복잡하게 얽힌 문제다. 당연하게 여겨온 예술계의 제도와 관습을 끈질기게 살피고 예민하게 들여다보지 않으면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이기도 하다. 인종주의에 기반한 차별과 배제는 혐오 표현이나 증오 범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스스로 인종주의자가 아니며 심지어 이에 반대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조차도 인종주의에 기반한 사고와 행동을 할 수 있다. 은밀한 형태의 차별을 만들어내는, 사회구조에 만연하지만 쉽게 보이지 않는, 제도화되어있는 인종주의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주어진 시스템에 안주해서는 ‘우리 안의 인종주의’를 성찰하기 어려우며, 우리가 원하지 않고 의도하지 않는다고 하여도 그 결과와 효과로서 인종 위계와 인종주의를 승인하게 될 수도 있다.
한국연극은 최근 들어서야 비로소 ‘우리 안의 인종주의’를 자각하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별다른 문제의식 없이 인종적, 민족적 스테레오 타입을 재현해 온 한국연극의 역사와 그러한 역사가 감추고 있는 인종주의를 비판적으로 성찰하면서, 최근 인종 문제를 무대화하는 새로운 방식을 고민하는 작품도 늘고 있다. 무대 위 인종 재현에 대한 문제의식과 성찰은 한국연극에서 이제 시작이다. 창작 작업뿐 아니라 극장의 정책, 제도, 제작 현장, 예술 교육 현장 등 좀 더 폭넓은 영역에서 이 문제가 논의되어야 할 것이다.
*) 이 글은 학술지 『드라마 연구』 71호에 게재된 논문 「한국연극의 ‘무대 위 인종 재현’의 문제 -<피어리스: 더 하이스쿨 맥베스>와 <SWEAT 스웨트: 땀, 힘겨운 노동>을 중심으로」(2023.10.)의 일부를 발췌, 수정한 글이다.
이진아
비평을 필요로 하지 않는 시대에 비평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고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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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처드 다이어, 『화이트 -백인 재현의 정치학』, 박소정 역, 컬처룩, 2020, 77쪽 ↩︎
- 백인에 대한 부정성의 의미를 지닌 단어 ‘비백인(non-white)’은, 위 저서에서 리처드 다이어가 제한적 조건에서만 사용하고자 제안한 단어다. 그는 이 단어가 지니는 여러 가지 논란과 문제점에도 불구하고(그렇기 때문에 다이어는 자신의 책이 제기하고자 하는 문제의식 외 다른 맥락에서 이 단어가 사용되는 것을 결단코 반대한다.) 마치 백인이 아닌 사람들은 오로지 백인이 갖지 못한 특징에 의해서만 정체성이 형성되는 현실을 비판하기 위해, 즉 인종 위계와 재현의 정치성을 드러내기 위해, 나아가 ‘흑 대 백’의 이분법을 몰아내기 위해 ‘굳이’ 이 단어를 사용한다고 말한다. 그는 “우리가 계속 백인이 아닌 이들의 색을 암시하는 용어를 사용한다면, 인식의 전환은 불가능할 것이다. 결국 어쩔 수 없이, ‘비백인’이라는 용어를 쓰려한다.”고 설명한다. 위의 책, 75-76쪽. ↩︎
- 위의 책, 57쪽.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