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예원

편집자 주

지난 3월 22일은 연극계 성폭력 가해자 이윤택의 형기 만료일이었다. 연극계에서는 다시금 위기의식과 긴장감이 고조되었으며, 12개 단체 등의 공동주최로 제10차 대학로엑스포럼 ‘연극계 미투 이후, 우리의 시간은 거꾸로 흐르지 않았다’가 열리기도 했다. 연극계 미투 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2018년 이래 연극계에서는 위계폭력과 젠더폭력 없는 안전하고 평등한 창작 환경을 만들기 위한 노력을 계속해 왔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폭력의 가해자들이 반성 없이 복귀(를 시도)하는 일은 반복되고 있다. 이윤택의 형기 종료를 맞으며 웹진 ACTiO에서는 ‘연극공동체가 수용할 수 있는 가해자의 복귀는 어떤 것이 되어야 하는가?’를 주제로 연출가 홍예원 씨에게 글을 부탁했다. ACTiO는 이후에도 안전한 공연 창작 문화를 위한 다양한 주제로 연극인들의 진솔한 목소리를 싣고자 한다.

안녕하세요. 저는 연극을 만드는 홍예원입니다. 웹진 ACTiO로부터 ‘연극공동체가 수용할 수 있는 가해자의 복귀는 어떤 것이 되어야 하는지’를 주제로 글쓰기를 요청받았습니다. 성폭력반대연극인행동의 구성원으로 오래 활동하였고 ‘연극 <두 메데아> 보이콧’ 운동과 관련한 대학로엑스포럼을 열었던 저의 이력을 감안한 요청이었겠지만, 기대하시는 바를 충족하지 못할 것 같아 미리 사과드립니다. ‘연극공동체가 수용할 수 있는 가해자의 복귀는 어떤 것이 되어야 하는가?’ 질문에 답을 하려면 먼저 다른 질문을 해야 합니다.

얼핏 생각해보면 공동체라고 생각할 만한, 어떤 교집합이 있는 집단이 있기는 합니다. 주로 공적 자금으로 공공극장에서 공연을 올리고, 관계자들이 보러 오고, 연출이나 작가가 대학에서 강의를 하기도 하고, 평론지에 언급이 되고, 또 서로의 연극을 보러 가는 소위 대학로의 연극쟁이들, 이제는 매년 능숙하게 공연장 안전교육과 성희롱·성폭력 예방교육을 온라인으로 이수하고 복수의 프로덕션에 하나의 증명서를 제출하는 사람들 말입니다. 그 공동체는 아마 모두가 존중받는 안전한 창작 환경을 지향한다 말할 것입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환경을 위해 토론회를 열고 학술대회에 참여하고 강의를 듣거나 글을 쓰고 집회나 시위를 하기도 합니다. 그곳의 관객들은 이러한 공동체의 지향점을 명확히 인식하고 지지하는 관객들입니다. 그들은 “예매하셨어요?” 하는 말과는 다른 세상의 관객들로, 적극적으로 공연을 검색하고 선택하고 전문적으로 감상합니다. 또 강력한 항의와 보이콧을 통해 도덕적 문제가 있는 출연진이나 스태프를 하차시키기도 합니다. 제가 주로 만나는, 이러한 사람들만을 딱 가리켜 연극공동체라고 규정한다면 사실 이야기를 진행하기는 훨씬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연극은 대학로에만 있는 게 아닙니다.

어디선가는 제작단계부터 접근성을 고려한 연극이 올라가지만 어떤 극장에서는 대상화, 혐오, 소수자 비하로 점철된 연극이 올라갑니다. 제 폴더에는 지금까지 받아온 안전교육, 성희롱·성폭력 예방교육 이수증이 수도 없이 쌓여있지만 20년 넘게 상업극 분야에서 공연을 한 제 친구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공연장 안전교육이나 성희롱·성폭력예방교육을 받아본 적 없다고 합니다. 공공극장은 다 안전할까요? 성범죄 이력이 있는 배우가 수도권, 특히 서울 공공극장의 오디션에 지원할 확률은 높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모 지역 도립극단 2025 오디션에는 성범죄 전과자 M씨가 지원하였습니다. 대학로를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백상예술대상 후보도 되고 동아연극상도 주고받고 평론지에도 오르고 대학에 강의도 나가는, 소위 ‘대학로 엘리트 연극’의 범주 밖에도 수많은 연극인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이 글을 읽을 가능성은 높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우리가 최소한 연극공동체라는 집단을 상정한다면 사회, 정치적 의제보다 대한민국연극제 참여가 더 중요한 비수도권의 연극인들, 주로 학교나 회사 등에 찾아가 교육극을 올리는 사람들도 그 논의 안에 포함시켜야 합니다.

연극을 만들고 보는 모든 사람이 연극공동체의 일부일 겁니다. 대학로 한복판에서 소수자 비하를 농담이라고 무대에 올리는 사람들도, 그걸 보면서 악의 없이 웃어주는 관객도, 이윤택이 누군지는 모르지만 잠재 관객의 문화향유를 위해 대학로 1번 출구에서, KFC 앞에서 예매 여부를 묻는 마케터들도, 각자 자기의 방식대로 연극을 하며 사는 이 수많은 종류의 사람들이 연극공동체입니다. 그렇다면 이 방대하고 다 헤아리기도 어려운 ‘연극공동체’라는 커다란 집단 안에서 모두가 합의하는 어떠한 기준을 세운다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요? 그리고, 제가 감히 그 기준을 제시할 자격이 있을까요? 잘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어렵지 않게 가해자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검찰이 기소하고 법적으로 유죄판결을 받은 경우나 공소권 없음으로 사건이 마무리됐지만 조사 끝에 가해 사실이 세상에 명백히 드러난 경우입니다. 대표적으로 연출가 이윤택, 배우 이명행, 서울시장 박원순이 있습니다. 폭력을 저지른 사실이 공공연하게 알려졌으나 법적으로 판결을 받지 않은 경우는 어떨까요? 교수로 재직 중이던 학교에서 위계폭력1을 행사한 A씨는 이 사실이 알려진 당시에는 학교도 그만두고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직에서도 물러났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대학의 교수로, 모 지역의 문화수석으로, 지역 문화재단의 대표이사로 승승장구 중입니다. 법적으로 아무런 제재도 받지 않았고2 심지어 공적인 자리마다 당당하게 얼굴을 내미는 이 사람, 가해자가 아닌 걸까요? 연극을 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이름을 들어본 연출가 B씨는 가해행위 이후 피해자에게 합의금을 주고 비밀유지 각서를 쓰게 했습니다.3 그 비밀유지 각서 덕분에 2018년 연극계 미투운동 속에서도 살아남아 여전히 존경받으며 활동합니다. 세상은 이 사람의 가해 사실을 모릅니다. 그렇다면 그는 가해자가 아닌가요?

오랜 시간 지속적인 성폭력이 일어난 집단에서 오랫동안 대표로 있었던 모 배우는 집단의 이름 자체가 주홍글씨처럼 여겨지던 순간에 그 집단을 처음 고발한 이와 함께 작업을 하면서 미투운동의 큰 파도를 넘어갔고 지금도 활발하게 활동 중입니다. 반면에 그 집단의 마지막 순간에 대표 자리에 있었던 모 배우는 계속해서 비판을 받습니다. 이 사람들은 어떻게 평가받아야 할까요? 둘의 평가는 달라야 할까요? 2018년 미투 당시 피해자에게 “우리 선생님은 그런 분이 아니다. 너 몇 기냐?”라고 따져 묻던 모 극단 출신의 연출가는 어떤가요? 예술진보운동에 늘 앞장서던 모 작가는 2020년 “박원순이 그랬을 리 없다”는 취지의 글을 페이스북에 게재했습니다. 제 기준에서 이 작가의 포스팅은 명백한 2차 가해였습니다. 그렇다면 그 글에 ‘좋아요’를 누른 OO선생은 2차 가해에 동조한 걸까요?

유명하지 않지만 성범죄로 실형을 받은 연극인들은 꽤 많습니다. 이들은 가해자입니다. 그런데 ‘감옥에 다녀오고 밥줄도 다 끊긴 이 불쌍한 가해자 친구’를 위해 조용히 포스터에서 이름을 빼거나 예명을 적는 식으로 자기 공연에 출연시키거나 스태프로 고용해준 사람들은 뭐라고 규정할 수 있을까요? 범죄에 가담하거나 방조하지 않았지만 사후 가해자를 돕는 사람들은 가해 동조자인가요? 그렇지 않다면, 그 사람들, 그러니까, 그래도 괜찮은 건가요? 어디부터가 가해자이고 어디까지가 가해자가 아닌 걸까요?

사실 누가 가해자인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는, 누군가는 이 모든 일들을 기억하고 있다는 겁니다. 판결문에 명시된 범죄 사실부터 사소하게 친구를 도왔을 뿐인 조력의 범위까지, 피해자들은, 그리고 피해자들과 긴밀하게 연대해온 많은 사람들은 가해자와 가해 방조자, 조력자와 침묵한 사람들의 모든 발언, 선택, 행동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들 중 누구도 사과하지 않았고 누구도 피해회복을 위해 노력하지 않았습니다. 잊을 수가 없습니다. 연극공동체 모두가 합의할 만한 가해자 복귀 수용 기준 같은 건 만들 수 없습니다. 일단 구성원 중의 한 명, 저는 그 어떠한 복귀도 수용할 마음이 없습니다.

사실 가장 본질적인 문제는 수용을 할 수 있든 아니든, 그 기준을 세우든 말든, 가해자들은 이미 다 복귀했거나 애초에 떠난 적이 없단 겁니다. 그리고 또 누군가가 새로이 복귀를 한다 한들 우리 사회는 이 거대한 연극공동체 안으로 그가 돌아오는 것을 막을 방법이 없습니다. 유의미한 케이스는 관객들의 보이콧에 의한 가해자의 하차인데, 이건 제도적 근거나 법적 논리에 의해 생겨난 것이 아닙니다. 관객들은 그냥 이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아주 상식적으로 기대할 수 있는 도덕적인 기준에 근거해 의견을 개진했고, 프로덕션이나 극장은 자본주의의 논리에 따라 가해자를 하차시켰죠.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기댈 수 있는 것은 자본주의적 영향력을 가진 관객들의 도덕적 기준뿐입니다. 관객들이 계속해서 비슷한 도덕적 기준을 가지고 영향력을 행사해준다면 결국 가해자들은 어느 정도의 선에서 도태될까요? 그렇지만 자본주의는 성범죄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의, 반복되는 성범죄자 캐스팅도 가능하게 만듭니다. 세계적으로 흥행을 한 어떤 드라마가 시즌1의 출연 배우 성범죄 판결 후에 시즌 2에서 또 성범죄 의혹이 있는 다른 배우4를 출연시켜 전 세계 곳곳에 얼굴을 알리게 해주는 장면을 우리는 봤잖아요.

저는 ACTiO의 편집진이 던진 질문에 아무런 긍정적인 답변을 할 수가 없습니다. 어떠한 건설적인 제안도 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냥, 저는 아무도 수용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만약에 건강한 생태계를 염원하는 이상적인 공동체가 있어 그 안에서 어떠한 기준을 세워야 한다면 제대로 된 사과, 피해회복을 위한 노력이 선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법정에 제출한 반성문 같은 거 말고, 지금껏 제대로 사과한 사람이 없다는 사실은 참 놀랍지 않나요? 구체적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가해자 본인이 스스로 고민하면 좋겠습니다. 내가 가해자인지 아닌지도 우리 모두가 스스로 자신의 양심에 물어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도 조금은 아름다운 구석이 있는 말로 이 글을 마무리해보겠습니다. 그래도, 공동체라고 할 수는 없을지라도, 우리에겐 동료들이 있습니다. 아름답고 자유롭고 존중받고 안전한 환경을 만들려고 노력하는 동료들입니다. 실제로 그 동료들과 함께 이 우울한 고민을 계속해나갈 겁니다. 그 동료들에게 그저, 우리 지치지 말자고, 존경과 응원의 마음을 보낸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홍예원

프랑스에서 마임을 공부하고 돌아와 무대에 서다 요즘은 연극에서 움직임을 만드는 일을 주로 합니다. 파트너 딱지와 함께 배우고 익히고 갈고 다듬고 만나고 쉬고 놀고 어우러지는 공간 딱지소굴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성폭력반대연극인행동의 구성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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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구체적으로는 학생들에게 재떨이를 던지고 얼차려를 시키고 연애 금지 각서를 쓰게 하는 등의 폭력을 행사했고, 이는 방송을 통해 보도되었습니다. ↩︎
  2. A씨를 변호하던 모 협회의 회장은 모 토론회에서 “법적으로 무죄가 선고 났다”고 얘기했는데 실제로 그의 위계폭력이 정식 신고를 거쳐 조사를 받았고 법원에서 무죄판결이 난 사안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폭력이 일어났던 학교 측에 문의했으나 “알려줄 수 없다”는 답변만 받았습니다. ↩︎
  3. 저는 이 사실을 피해자의 입을 통해 들은 것이 아닙니다. B씨가 이 글을 본다면 피해자가 각서의 내용을 어긴 것이 아니니, 부디 노여워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아울러,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는 속담처럼, 소문은 소리 없이 사람들에게 스며들 겁니다. 얼마 전 기소된 원로배우처럼, 언젠가는 당신의 가해도 세상에 드러날지 모른다는 사실을 두려워하며 사시길 바랍니다. ↩︎
  4. 해당 배우의 성범죄 사실은 피해자가 직접 언론에 나와 인터뷰를 함으로써 세상에 밝혀졌습니다. 그러나 공소시효가 지난 사건으로 가해자는 경찰 조사나 다른 법적제재를 받지 않았고 얼마 전 스크린에 복귀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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