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숙현

2006년 차범석이 작고한 해에 곧바로 차범석 연극재단이 출범했다. 2007년에는 차범석 희곡상을 신설하여 수상작을 발표하기 시작했으며 2019년에는 차범석 학회를 발족하였다. 보기 드문 특별한 행보이다.

사실주의 연극의 대가(大家)?

2024년 문화예술위원회가 ‘차범석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로 차범석 소장기록물을 공개하였다. 홍보용 문구를 보니 차범석을 “한국 사실주의 연극의 대가”1라 명명하고 있다. 포털을 통해 접한 차범석의 인물 정보 또한 “전통적 사실주의에 입각하여 사실주의 극을 확립하는 데 공헌한 대표적인 극작가이자 연출가”2라거나 “한국 사실주의 연극의 기틀을 세웠다”3고 쓰여있다.

전통적 사실주의란 대체 무엇일까. 작가적 정체성을 넘어 연출가로 호명되는 것도 낯선데 차범석이 사실주의 ‘희곡’이 아닌 사실주의 ‘연극’의 기틀을 세우고 확립하였다는 기록은 어딘가 석연치 않다. 대표작으로는 어김없이 <산불>(1962, 이진순 연출)이 뒤따르고 있는데도 말이다. 연출을 한 전적이 있기에 연출가로 소개하는 것이야 무리가 없다 해도 사실주의 연극의 ‘대가’라니, 이러한 단정적 수식어는 대체 어디에서 연원한 것일까.

연극사 서적에서 그 지표를 발견할 수 있을까. 거기 차범석의 사실주의는 ‘정통사실주의’이고, 차범석은 사실주의 연극 전통의 맥을 지키고 ‘계승’한 대표적 연극인이라 쓰여 있다.4 승계의 패권을 쥐고 있는 인물은 유치진이다. 희곡과 연극 간의 구분 없는 기술도 문제이지만 ‘정통’ 또는 ‘전통’ 처럼 해명되어야 할 용어도 많아 보인다.

그는 사실주의 연극의 기틀을 세웠는가

대다수가 동의하는바 차범석의 대표작이 <산불>이라면 그의 위상 정립의 초점이 되는 시기도 1960년대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차범석이 1970년대 국책사업인 새마을연극에 앞장섰던 시기나, 그 이후인 8·90년대에 이르러서야 드디어 사실주의 연극의 기틀을 세우거나 확립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닐 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주의는 소위 ‘신극’이래 연극계를 지배하는 핵심 화두였음에도 불구하고 1960년대, 그리고 그 이후인 1970년대 초반에 이르러서도 온전히 달성하였다고 볼 순 없었다. 사실주의 연극을 지원해 줄 제작 체계가 부실했다. 단적으로 사실주의의 무대 관습을 지원해 줄 극장도 없었고 프롬프터의 관행이 계속되던 시기였다. 일상의 자연스러운 화술이 일정 부분 가능한 희곡이 나왔다 할지라도 연기와 연출에 있어 이를 실제화할 방법론도 부재했고 오도된 관념적 리얼리즘관은 사실주의 연극 양식의 순조로운 안착을 가로막았다.

그렇다면 차범석의 대표 희곡 <산불>은 사실주의인가

“해방 이후 리얼리즘 희곡의 최고봉”5이라는 유민영의 <산불>에 대한 평은 이후 대부분의 연구물에 많은 영향을 미쳐 반복 인용 되어왔다. 그럼에도 차범석의 대표 희곡 <산불>은 사실주의인가? 기실 작품이 사실주의이건 비사실주의이건 멜로드라마이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작가의 세계관과 비전에 따르는 표현 방식일 뿐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러한 양식이나 형식의 위계적 ‘구분’ 속에서 획득한 것으로 보이는 차범석의 성과에 대한 질문, 연극사적 위상에 대한 재고가 필요하다는 점에서 문제적일 뿐이다.

<산불>은 위배한 도덕성에 처벌을 가하며 선명한 결과를 도출하는 닫힌 결말의 구조이다. 무엇보다 삶의 풍경을 그려내고 현실을 묘사하지만 이를 묘파하는 작가의 시선이 부재한다. 여성의 성적 욕구와 유비하여 인간의 기본욕구조차 말살하는 전쟁의 폭력성을 묘사한 듯 보이지만 그조차 후경에 머물고 서사를 추동하는 것은 점례와 사월 그리고 우연히 들어온 규복의 삼각관계에 있었기에, 그 파멸의 결과에 이르기까지 대중적 재미는 담보하되 삶의 구조적 문제와 같은 현실 인식의 지평을 열어내지는 못한다.

작가는 시대가 요구하는 이데올로기에 순응하고 이를 수행하는 이분법적인 인물을 만들어 배치하였다. 만약 국군의 아내가 사월이고 인민군의 아내가 점례라면 어땠을까. 규복이 공비가 된 것을 반성하며 기꺼이 자수하겠다는 인물이 아니었다면 또 어땠을까. 그가 ‘인간이 되고자’ 하지 않는, 인간 잠재성이 삭제된 인물이었다면 점례의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있었을까. 그랬더라면 그자의 죽음 앞에 선 점례의 무언의 애절함과 빨갛게 타오르는 산불이 비애의 감성을 끌어올릴 수 있었을까.

당연히 등장인물들, 그들의 목표(objective)는 외면화되어 있어 분석을 요구하지 않는다. 처한 환경 혹은 삶의 조건과 갈등하며 현실을 재현하는 등장인물들이 아니다. 문제의 근본적 원인은 남편/남자의 부재에 있기에 이해하기가 쉽다. 그렇게 극의 중추가 되는 삼각관계의 갈등은 대중적 감성 자극을 위한 극적 장치가 된다. <산불>은 관객의 익숙하고 편리한 관습을 잘 지켜내 대중성을 성취한다. 삶의 구조에 얽힌 불편한 진실을 드러내 관객의 지각 활동을 자극하지 않고 안락한 관극을 보장해 준다.

여성 캐릭터의 문제

물론 기존의 숱한 반공드라마가 보여줬던 이항 대립의 정치색을 정면으로 들여오지는 않았다. 관조적이지만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활용한 삼각관계로 ‘남자의 씨를 말린’ 전쟁의 비극을 비추어냈다. 점례와 사월이가 엄연한 가부장제 질서 속에서 규복의 몸을 공유하며 자신의 성적 욕구를 실현하는 지점은 눈여겨볼 대목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들은 곧바로 처벌받음으로써 “여성이 성을 욕망한다는 것은 불행할 수밖에 없다는”, 금기의 “지배담론을 재생산한다.”6 다시 말해 아버지는 물리적 부재 속에서도 여전히 정신을 지배하며 건재하고 있음을 확고히 한다. 결여에 대한 다른 겹의 성찰과 사유는 부재한 채로 남성을 향한 성적 욕구와 그 갈등에 오롯이 초점을 맞추고 있는 이들 여성은 새로운 여성 캐릭터의 탄생이라고 보기 어렵다. 대상화되어 소비되는 여성 캐릭터, 그 지점에 머물고 만다.

<산불>은 얼핏 정치성을 보류하고 객관화된 관점을 유지하고 있는 듯 보이지만 당대의 통속적 도덕률을 잘 이행함으로써 보수적인 지배담론을 적극 지지한다. 이렇게 사유의 진작보다는 기성의 이데올로기를 견고히 봉합하는 작가의 의식 속에서 사실주의가 요구하는 재현은 결락될 수밖에 없었다.

누구의 욕망을 욕망하는가

사실주의란 진실을 표현하는 여느 양식일 뿐 절대적 가치 기준이 아니다. 그런데 왜 차범석은 그토록 사실주의 작가로서 자신을 증명하려 했을까? 그는 일관되게 많은 지면을 통해 사실주의 연극을 향한 자신의 지고지순한 순결성을 밝혀왔다.

반면 차범석의 주장과 달리 실제로는 그의 극작술이 일관되지 않다고 밝히는 연구물도 있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그의 ‘다른’ 극작술은 사실주의 연극에 도달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론이었다거나 사실주의의 완성도를 높이는 한 과정이었다는 관점으로 일단락함으로써 이내 사실주의를 향한 차범석의 일관성을 보수하며 경의를 표하고 만다. ‘정전화’가 끼친 영향 탓일까. 연구자들의 어떤 결여가 ‘그’를 통해 사실주의 ‘권력’을 유지하고 재생산하도록 하는 것일까.

사실주의 연극의 정착은 연극계의 중심에 있었던 유치진과 이해랑의 숙원이었다. 차범석은 유치진과 이해랑의 주목을 받아 신춘문예에 당선되었고 대학에서도 유치진의 연극 강연에 깊은 감화를 받았다고 고백한다. 그러한 차범석의 행로는 내내 동일성을 유지했다. 기성 연극에 대항한다는 표층의 선언과 다르게 1956년 ‘참된 현대극 양식’ 만들기를 선언하며 제작극회를 설립한 것도, 1963년 극단 산하의 출범에서 창작극을 활성화하고 관객 저변의 확대와 아마추어리즘 탈피를 위한 “연극의 대중화와 직업화”7를 외친 것도, 그리고 고함치지 않는 ‘연기술’에 대한 언급마저도 모두 유치진과 이해랑의 연극관과 그와 관련된 그들 고민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들이었다.

논의의 여지는 남아있으나 차범석은 “유치진의 사실주의 논리를 받아들여 한국희곡사에 사실주의극을 정착시키는데 이바지한”8작가라고 말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가 사실주의 연극의 기틀을 세우고 확립한 대표적인 작가이자 연출가라거나, 더 나아가 “한국 현대연극의 흐름을 주도한 작가이자 연극 지도자”9라는 위상 정의는 역시나 다시 생각해 봐야 할 문제로 보인다.

김숙현

연극의 주변부와 ‘어떤’ 공동체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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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원 테이블 : 차범석 연극인.生>(2024.9.2.-11.29)
    https://www.arko.or.kr/board/view/4057?cid=1808597 ↩︎
  2.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217027&cid=40942&categoryId=33385 ↩︎
  3. https://www.culture.go.kr/knowledge/encyclopediaView.do?vvm_seq=7732 ↩︎
  4. 서연호 이상우, 『우리연극 100년』, 현암사, 2000, 226쪽. ↩︎
  5. 유민영, 『한국현대희곡사』, 기린원, 1988, 458쪽. ↩︎
  6. 이승희,『한국사실주의 희곡, 그 욕망의 식민성』, 소명출판, 2004, 400쪽., ↩︎
  7. 유민영, 『한국연극운동사』, 태학사, 2001, 406쪽. ↩︎
  8. 오영미, 『한국 전후 연극의 형성과 전개』, 태학사, 1996, 267쪽. ↩︎
  9. 백두산, 「자유의 리얼리즘: 극작가 차범석의 생애와 예술세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https://blog.naver.com/arko_korea/22357209099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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