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아

렐링그 그렇소. 그게 당신이 우상으로 여기며 열중하고 있는 그 친구의 진짜 모습이오.

그레게르스 나도 눈이 완전히 멀진 않았습니다.

렐링그 글쎄, 완전히 멀지 않은 건 아니오. 당신은 환자요. 당신도 그렇게 말했잖소.

그레게르스 그 점은 맞아요.

렐링그 그래요, 당신은 증세가 복잡해요. 우선은 지긋지긋할 정도로 정의감을 외치는 거고, 더 나쁜 건 끊임없이 영웅 숭배에 빠져있다는 거요. 늘 자신이 아니라 외부에서 우상화할 수 있는 무언가를 찾고 있어요.

그레게르스 네, 내 자신을 넘어서는 어떤 걸 찾아야죠.

렐링그 그래서 주변을 온통 살피며 슈퍼맨이라 생각하는 그런 존재들 때문에 딱하게도 스스로를 바보로 만드는 거요. 이제 노동자의 오두막에 와서 이상적 요구를 다시 시작하고 있소. 여기 있는 우리들은 바보가 아니오.

(중략)

렐링그 베를레 씨 아드님, 그 이상한 ‘이상’이란 단어 좀 쓰지 마시오. 옛날에 우리가 사용하던 말이 있죠. ‘위선’이라고.

그레게르스 그 두 가지가 관계가 있다는 겁니까?

렐링그 그래요, 장티푸스와 고약한 열병처럼 비슷한 거요.

– 헨리크 입센, <들오리> 중에서

<들오리>의 두 등장인물 그레게르스와 렐링그는 얄마르 에크달을 사이에 두고 ‘이상주의’에 대하여 논쟁한다. 젊은 시절 뛰어난 재능과 개성을 지녔던 친구 얄마르가 이제는 거짓과 기만 속에 파묻힌 채 자족하며 살아간다고 생각하는 그레게르스는 얄마르를 그 거짓으로부터 “다시 건져내는 일”을 “필생의 일”로 여긴다.

그레게르스는 자신만이 진실을 직시한다고 믿는 인물이다. 그리고 얄마르도 반드시 그래야 한다고 믿는다. 그레게르스는 자신의 아버지 호콘 베를레가 에크달 가족을 파멸시킨 장본인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그들의 은인처럼 굴고 있는 현 상황을 견딜 수가 없다. 그는 얄마르의 결혼 생활이 베를레의 돈과 위선으로 만들어진 것이라 생각한다. 과거 베를레가 자신의 하녀였던 그리고 지금은 얄마르의 아내인 기나를 임신시켰고, 이를 감추기 위해 얄마르를 기나와 결혼시켰다고 확신하는 것이다. 그는 친구를 이 거짓으로부터 구해내고자 한다. 과거를 폭로함으로써 얄마르가 진실을 볼 수 있도록, 그 결과 “어떤 거짓도 없이 진실하게”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자극하고자 한다. 그는 얄마르가 모든 진실을 알게 되면 다시 기나를 포용하고 용서함으로써 완벽한 신뢰에 바탕을 둔 “진실된 결혼의 기초”를 만들게 될 것이라고 굳게 믿는다.

얄마르의 이웃인 의사 렐링그는 그런 그레게르스를 비판한다. 렐링그는 평범한 사람을 살게 하는 것은 오히려 ‘위선’과 ‘환상’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얄마르에게 위대한 발명을 할 재능이 있다고 격려하고, 평범한 일상에서 작은 일탈을 허락하는 일 같은 것이다. 얄마르가 젊은 시절 보여준 재능과 이상에 대하여 말하는 그레게르스에게, 렐링그는 “얄마르의 비극은 지금까지 내내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천재로 생각한다는 것”이라고 냉소적으로 말하며 다음과 같이 일갈한다. “그 이상한 ‘이상’이란 단어 좀 쓰지 마시오. 옛날에 우리가 사용하던 말이 있죠. ‘위선’이라고.”

에크달 가족의 다락방은 삶의 위선과 환상을 상징한다. 그들은 다락방에 ‘작은 자연’을 꾸며 놓았다. 젊은 시절 대자연에서 호기롭게 사냥하던 에크달 노인은 이제 다락방에서 토끼를 사냥한다. 집토끼, 집비둘기 그리고 작은 사냥개가 살고 있는 그곳에는 진짜 야생으로부터 온 들오리도 한 마리 있다. 한때는 자연에서 자유롭게 날아다니며 살았던, 그러나 지금은 날개를 다쳐 날 수 없는 들오리다. 얄마르와 기나의 딸 헤드빅은 들오리를 “진짜 야생” “신비한” 존재로 여기며, 다락방 안에 있는 다른 모든 것보다 소중하게 아낀다. 헤드빅은 다락방의 세계를 자랑스러워하면서도, 때때로 이 모든 것이 그저 다락방에 불과하다는 것을 느끼며 씁쓸해하기도 한다. “저기 있는 것들에 대해 생각을 하다보면, 어느 틈에, 저 방이랑 거기 있는 것들이 ‘깊은 짠물’이란 생각이 갑자기 들거든요. 정말 바보 같아요.” “아니, 그래요. 사실 그냥 다락방이거든요.”

인간 존재의 도덕성에 어떤 절대적 기준이 있다고 믿는 그레게르스는 그 기준에 맞추어 사람들을 바꾸려 한다. 그는 주체의 의지로 삶을 기획하고 통제할 수 있다고 여기는 자다. 그러기 위해서는 모든 거짓과 환상을 걷어내고 진실을 마주해야 한다고 믿는 자다. 그러나 거짓과 진실, 환상과 현실이 그렇게 이분법적으로 분명하게 구별되는 것일까. 헤드빅이 다락방의 세계를 사랑하면서도 또한 그것이 그저 다락방이라는 것을 아는 것처럼, 기나가 자신의 남편 얄마르가 위대한 발명을 할 것이라 확신하지 않으면서도 그를 지지하고 응원하는 것처럼, 우리는 삶의 어디까지가 거짓이며 어디부터가 진실인지 명확하게 선을 그을 수 없다. 입센은 삶에 뿌리를 두지 않은 추상화된 이상주의와 도덕주의를 비판한다. 그렇다고 하여 렐링그처럼 다락방 속 세계에 빠진 에크달 노인이나 허황한 꿈에 부풀어 자신을 과대평가하며 삶을 돌보지 않는 얄마르의 위선적 삶을 승인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주어진 운명에 무력하게 복종하는 노예도, 모든 것을 자신의 의지로 통제하는 주인도, 모두 아니다. 그레게르스는 이상과 도덕을 이야기하며 더 나은 무언가를 막연히 쫓지만, 정작 땀 흘려 노동하며 진짜 삶을 꾸려나가는 사람들의 의미는 보지 못한다. 렐링그 또한 평범한 사람들의 삶에는 환상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지만 정작 그 환상을 지켜내기 위해 묵묵히 희생하고 애쓰는 인물들이 있다는 것은 자각하지 못한다. 오만한 남성들이 이상이니 위선이니 떠드는 동안 진짜 삶을 살아내는 것은 오직 여성 인물들뿐이다. 그들은 ‘더 훌륭하고 더 중요한 일’을 해야 하는 얄마르를 대신하여 사진을 찍고 수정을 하고 주문을 맞춘다. 스튜디오를 운영하고 살림을 꾸리며 어떻게든 여유를 만들어 나간다. 렐링그가 말로 내뱉는 “그의 삶의 위선이 지속되도록” 하는 일이란 기실 여성들의 희생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레게르스의 시도는 결국 헤드빅의 죽음을 가져온다. 자신의 존재가 사랑하는 아빠 얄마르에게 고통이 되고 있음을 감지한 헤드빅은 자신을 희생시킴으로써 아빠를 다시 행복하게 만들고자 한다. 실제로 헤드빅의 죽음은 그레게르스의 폭로로 파탄이 날 뻔한 얄마르의 결혼 생활을 구한다. 아이를 잃은 슬픔과 죄책감 속에서 부부는 서로를 위로하며 다시 결합한다. 그레게르스는 말한다. “헤드빅의 죽음은 헛되지 않아요. 슬픔 속에서 그 친구의 고결함이 나온 걸 봤잖아요.” 그러자 렐링그는 냉정하게 말한다. “아홉 달도 지나지 않아 어린 헤드빅은 그 친구가 사람들 앞에서 읊조리는 얘깃거리에 지나지 않을 거요.” “그 애 무덤의 첫 잔디가 시들면 그때 다시 얘기합시다. (중략) 그 친구가 자기감정에 싸여 자기 연민에 점점 더 빠져드는 걸 보게 될 거요. 두고 봐요.”

입센이 그린 가족 비극은 우리에게 눈물을 허락하지 않는다. 아직 눈물을 흘리기엔 이르다. 더 끔찍하고 잔인한 일이 우리 앞에 놓여있다. 비극은 이제 막 머리를 디밀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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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 출처 : 헨리크 입센, 『헨리크 입센 희곡 전집 7』(김미혜 역, 연극과인간, 2022)

이진아

비평을 필요로 하지 않는 시대에 비평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고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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