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영

작가는 자신이 직조한 등장인물에 대하여 “작가 노트”를 통해 상세한 코멘트를 한다. 데이비드 프리먼(David Freeman)의 <크립스(Creeps)>(1965) 이야기다. <크립스>는 프리먼이 “토론토 보호 작업장에서 느꼈던 분노”를 토대로 풀어낸 뇌성마비 장애를 가진 등장인물들의 이야기다. 작가 노트에는 주요 등장인물 피트, 짐, 샘, 톰, 마이클 등의 강직과 경련이 세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예를 들어, 마이클에 대한 작가의 묘사는 다음과 같다.

마이클 역할의 배우는 언제나 휘청거렸고 머리를 축 늘어뜨렸으며, 몸은 흐느적거렸다. 언제라도 툭 쓰러질 것 같았다. 그는 앉아있기보다 넘어지거나 쓰러지며 대부분 방긋 웃고 있었다. 그도 언어 문제를 가지고 있었으며, 발음이 불분명하고 피트처럼 얼굴 근육을 잘 운용하지 못했다.1

그러나 최근 모두예술극장에서 공연된 낭독극2에서 마이클은 이 묘사에 ‘부합하지’ 않는다. 마이클로 분했던 홍성훈은 전동 휠체어를 타고 있었고, 본인의 음성으로 직접 발화하는 대신 AAC(Augmentative and Alternative Communication, 보완대체 의사소통)를 사용하고 있었다. 즉 그는 “휘청거릴” 수도 없었고, “앉아있기보다 넘어지거나 쓰러질” 수도 없었고, “발음이 불분명할” 수도 없었다. 마이클에 대한 작가의 묘사와 이해를 충실히 이행할 수가 없었다. 한편, 뇌성마비 장애를 가지고 있는 짐의 역할은 뇌성마비 장애가 없으며 저신장 장애를 가진 신강수 배우가 분했다. 홍성훈과 신강수의 몸은, 프리먼이 의도한 마이클과 짐의 몸이 될 수가 없었다.

장애 재현의 문제

프리먼은 크립3 재현을 문제시하고 있다. 희곡에 설정된 각 캐릭터의 불구성(강직과 경련 등)이 배우에 의하여 충실히 구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4 물론 이번 낭독 공연에서 장애를 가지지 않은 배우가 장애를 가진 캐릭터를 맡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여기서 떠오르는 문제는 ‘크리핑 업(cripping up)’이다. 장애를 가지지 않은 배우가 장애인 캐릭터를 연기하는 일을 비판적으로 지시하는 이 용어는5, 결국 ‘장애를 연기하는’ 일 자체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상기시킨다.

‘크리핑 업’ ‘크립페이스(cripface)’ 등의 용어 사용에 대하여 문제를 제기하며 ‘장애 모방(Disabled Mimicry)’이라는 표현을 주장했던 도미닉 에반스6를 굳이 경유하지 않더라도, 장애를 연기하는 일에 대한 인식은 대개 장애 당사자의 외양의 ‘유사성’에 집중되어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런 질문이 생긴다. 장애를 재현하는 일은 장애를 가진 몸(혹은 정신)과 ‘닮아야만’ 가능한 것인가. 그렇다면 극작가는 장애를 가진 캐릭터를 등장시킬 때 그 외양을 얼만큼 묘사할 것인가, 그리고 그 묘사에 모두 해당할 수 있는 신체(와 정신)를 가진 이는 누구인가(과연 존재하는가). 작가가 묘사하는 외양에 ‘합당한’ 외양을 가지지 못했다면 해당 배우는 그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는 존재인 것인가. 질문은 줄줄이 이어진다.

결론을 다소 앞당겨 말하자면, 장애 재현을 배우 개인의 연기 역량, 즉 장애 당사자의 몸과 정신을 얼마큼 유사하게 구현할 수 있는가, 로 살피는 일은 의료적/개인적 모델로서의 장애를 반복하며 재생산하는 일과 연결된다. 장애를 개인의 신체적 결함·손상으로 보고 있기에 가능한 재현이기 때문이다. 아래에서 더 구체적으로 말하겠지만, 어떤 인물의 ‘손상’이 ‘개인’의 ‘역경을 위한’ 것으로 ‘표지화’될 때, 그 재현 대상은 의료적/개인적 모델로서의 장애와 결부된다. 장애가 사회적으로 어찌 구성되는지, 더 구체적으로는 그것이 당사자만의 일상뿐 아니라 그 주변 관계적 맥락에서 어떻게 구성되거나 재배치되는지 이야기되지 않는다면, 즉 당사자의 역경과 곤란함만을 개인적인 것으로 고정하고 그만의 고통과 손상으로만 할당한다면, 해당 재현은 의료적/개별적 모델로서의 장애를 강화할 뿐이다.

장애를 연기하는 이들을 연기하기

이 극의 공간적 배경은 남성 화장실, 그것도 주로 뇌성마비 장애를 가진 백인 남성들이 출입하는 화장실이다. 작가는 그 무엇보다 이 공간 재현에서까지 장애가 은유 혹은 서사적 장치로 배치될 것을 우려했을지도, 그리하여 더욱 정밀한 움직임과 신체상을 설정했는지도 모르겠다. 장애가 잘 보일수록 장애 당사자가 비가시화되는 아이러니7에 대한 염려를 고려한다면 말이다. 물론 그 염려는 지워질 수 없는 것이라야 한다. 그러나 이것이 곧 다시금 연기의 비장애중심주의적, 능력 이데올로기적 메커니즘에 대한 동의나 강화를 야기해서는 안 된다. 장애를 가진 이들을 재현하기 위하여 복잡하고 중층적으로 얽혀 있는 젠더·인종 등의 억압이 지워질 수 있다고 여기는 일은 도리어 강제적 비장애신체성/비장애정신성, 그리고 능력 이데올로기가 하는 일ー보편과 표준을 설정하고, 이에 부합하지 않는 일은 예외로 상정하는 일ー을 반복할 수 있다. 이 예외 설정이 문제인 이유는 예외로 지목된 실재들을 ‘잘 보이지 않는’ 것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크립스>가 지금까지도 읽힐 만한 텍스트로 여겨진다면 그 이유는 아직까지도 유효한 장애 재현의 전형성ー특히 이 전형은 ‘윤리’와 얽힐 때가 많다ー때문일 것이다. 프리먼의 장애 재현은 개인의 결함·역량 미달의 의미를 강화하거나 윤리적 캐릭터와 주제 의식의 재생산으로 타협해 버리는 대신, 장애의 ‘뒷무대’8를 지시하고 재현한다. 극의 공간적 배경인 화장실은 남성이자 백인인 뇌성마비 장애인들의 앞무대 연기가 끝난 후 뒷무대를 공유하는 배우들로서 서로를 정체화하고, 이 정체성에 따라 신랄한 언행이 트이는 장소다. 그러나 뒷무대 또한 ‘무대’라는 점은, 이들이 이곳에서 수행하고 있는 ‘인종·젠더’를 지시한다. 이들은 앞무대의 배역(순진하고 수동적인 장애인)을 수행한 그 순간을 ‘벗어나고자’ 재빨리 그 뒤편으로 내려와, 이곳에서 관객이자 배역을 같이 수행 중이라고 믿는 이들과 함께 또 다른 배역(백인 남성)을 수행한다고 믿는다. 그런데 이번 낭독공연팀은 쇼가 끝난 후 인물 각각의 반응이 분화되도록 대본을 수정하였다.9 이 윤색은 이곳 또한 무대라는 점을, 그리고 수행되는 보여줌의 층위가 나뉜다는 점을 일러준다. 같은 백인 남성 뇌성마비 장애인이라고 하여 모두가 같은 이성애적 남성성, 장애, 인종 등을 같은 강도와 밀도로 수행하는 것은 아니다. 이 수행들 자체가 깊거나 얕을 수도 있지만, 수행 시공간에서 정동될(affected) 수도, 또한 수행을 조율하는 시점 자체가 다를 수도 있다. 또한 이 수행 자체가 모두 단일하고도 균질적인 신체적/정신적 능력에 기반하고 있지 않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연기와 제유

이번 낭독공연의 미덕 중 하나는 윤리적 명령에 취약해지기 쉬운 장애 재현을 재생산하거나 강화하지 않았다는 점이다.10 이는 원작이 가진 신랄한 표현과 재현을 얼마만큼 충실하게 구현했느냐, 극작가가 의도한 내용들이 얼마만큼 실현됐느냐에 대한 의식 때문에 가능했다고만 볼 수는 없다. 가령, 신강수는 희곡에 묘사된 짐의 뇌성마비 장애를 모방하지 않는다. 홍성훈은 지적 능력이 부족하게 설정되었던, 그래서 이들이 지어낸 서사에 주변적 인물로 자리할 수밖에 없었던 마이클을 연기할 때, 순진무구하다고만 할 수는 없는 오히려 익살스럽기까지 한 웃음, 음성변환장치에 의하여 미끄러지는 음성 연기 등을 통하여 마이클의 성격을 의외적이고도 미지수의 것으로 창출한다.

즉 이들의 연기는 도리어 뇌성마비 장애를 ‘미처 알 수 없게’ 만든다. 극 안에서 상정된 캐릭터의 몸과 정신을 닮도록 연기한다는 것이, 다시 말하면 그 캐릭터에게 주요하게 라벨링된 특성과 연기된 특성을 밀접하게 혹은 부합하게 만들어버리는 순간, 우리는 같은 장애11 안에서도 장애가 다 다르게 존재할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을 보이지 않게 만들 수 있다. 능력 이데올로기 안에 갇힌 연기는, 배우가 얼마만큼 캐릭터를 실제 그 라벨링된 특성을 가진 사람‘처럼’ 보이게 만드냐를 논한다. 이 닮음의 비교군으로 자리한 가상의 장애인이 실제 장애를 가지고 있는 개개인들에 일대일 대응된다는 듯 말이다.12

크리핑 업이 문제시된 이유는 아직 장애 재현이 ‘넉넉지 않은 상황’에 기반을 두고 있을 것이다.13 비장애인에 의한 장애 ‘연기’는 장애를 ‘입고 벗을’ 수 있는(시작과 끝이 있는) 것처럼 인식하게 할 수 있다. 즉 허구성이 담보된 ‘연기된 취약성’들은 관객에게 “장애 당사자의 실제 고통과 투쟁을 목격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 허구의 일이라는 위안”(크리스토퍼 신)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크리핑 업에 대한 비판적 시선들이 가진 문제의식에 동의하지만, 이 동의가 곧 ‘장애가 비장애인에 의하여 연기되어선 안 된다’, ‘장애 재현은 실제 해당 장애 유형에 대한 치밀한 관찰과 묘사로써 행해져야 한다’라는 주장으로 연결되는 일을 경계하기도 한다. 극중 인물의 장애가 ‘실제 장애처럼’ 잘 그려졌느냐가 논해지기보다는 도리어 장애는 그 “가장처럼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14는 점을 상기해야 한다.15 무대 위의 장애는 실재하는 장애들과 다르게 연기될 수 있다. 오히려 이 연기의 원본으로 설정된 ‘실제 장애’에 대한 의구심이 피어나야 한다.

장애 재현과 연기에 있어 초점 맞추어야 할 것은, 이것이 제유로 기능할 수 있다는 위험이어야 하지 않을까. 어떤 ‘연기된 취약성’이 그 취약성과 연관된 누군가들을 완전히 대표하고 있다는 믿음이 파생될 우려는 간편하게 관둘 수 있는 것이 아니어야 한다는 것이다. ‘장애 연기는 어떠해야 한다’라는 정언을 생산하는 일보다 중요한 것은, 어느 누구도 어느 누구를 온전히 대신할 수도 대표할 수도 없다는 사실을 지속적으로 인식하는 일이지 않을까.

장기영

비평이 더욱 ‘알 수 없어’지길 원한다. 연극에 대한 말하기와 글쓰기가 더 터져 나오길 바란다.

  1. 데이비드 프리먼, <크립스> 대본, 한국번역연구소 번역, 강보름·양대은 윤색, 모두예술극장, 2025, 3쪽. ↩︎
  2. ‘모두예술극장 해외희곡 낭독공연’으로 기획된 <크립스>(강보름 연출)는 2025년 1월 21일부터 22일까지 모두예술극장에서 공연되었고, 필자는 1월 21일 오후 7시 30분 공연을 관람하였다. ↩︎
  3. ‘크립(crip)’은 ‘cripple(절름발이, 불구자)’에서 파생된 용어이다. 당사자 용어로 재전유된 ‘퀴어(queer)’에 착안하며 캐리 샌달과 로버트 맥루어 등에 의하여 사용되었을 뿐 아니라, 1980년대 장애인 하위문화에서 전복적 의미로 사용되었던 용어이다. 일라이 클레어와 앨리슨 케이퍼 또한 이 용어가 “정치를 구축하도록 돕는다”는 점에 집중하며 이 용어를 적극적으로 사용한다. 특히 이들은 낸시 메어스가 언급한 바 있는 이 단어의 사용 감각에 동의하고 있는데, “불리한 사람(handicapped)‘이나 ’장애인(disabled)’이라는 말과는 달리 ‘불구자(crippled)’라는 단어에 유독 움찔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나는 그들이 움찔하길 바라는 것 같다”는 의도에 동의한다고 말한다. 본고는 ‘크립’ 용어에 대한 이러한 배경뿐 아니라 원작 희곡에도 주요하게 사용되는 용어라는 점, 그리고 이 글에서 다루게 될 ‘크리핑업’, ‘크립페이스’ 등의 개념들을 의식하며 ‘크립’과 ‘장애’를 혼용한다. 한편, ‘장애’를 혼용하는 이유는 본고가 장애의 의료적/개인적모델 및 사회적 모델 등 기존의 장애학에 영향을 받고 있을 뿐 아니라, ‘크립’이라는 개념이 정신장애·지적장애보다 신체장애에 가깝다는 비판 또한 의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
  4. 프리먼은 <크립스>의 ‘작가 노트’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모든 배역은 소소한 신체적 문제를 지닌 뇌성마비를 갖고 있다. 배우들이 이것을 얼마나 현실적으로 구현하는지가 본 희곡의 성공적인 연출을 위해 무엇보다 중요한 점이다. 여러 유형의 강직, 경련이 등장하며 각 배우는 이러한 경련에 기반해 자신의 동작을 취해야 한다. 이러한 신체적 문제를 파악하는 방법은 직접적 관찰밖에 없다. 본 희곡은 직접 관찰 방법이 가능하지 않다면 시도되지 말아야 한다.” 데이비드 프리먼, 위의 글, 2쪽. ↩︎
  5. 장애 재현에 있어서 크리핑 업은 간과할 수 없는 문제이다. 비장애인에 의하여 ‘장애가 연기’될 때의 ‘장애’는 해당 배우의 연기술을 측정하는 혹은 해당 배우의 수고로움을 치하하는 도구가 되어왔기 때문이다. 또한 이는 장애 당사자 배우들의 캐스팅 문제와도 연관이 있다. 장애를 가진 배우가 장애를 가지지 않은 캐릭터를 맡는 일은 고사하고, 장애를 가지고 있는 캐릭터조차 장애를 가지지 않은 배우에 의하여 장악되어 왔던 역사는, 장애를 가진 이들이 배우로서 활동을 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그 현실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
  6. 에반스는 ‘Disabled Mimicry’라는 용어 사용을 주장하는 이유에 대하여 ‘모방(mimicry)’이라는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의도가 있는지 여부와는 상관없이” 이미 실행되고 있는 조롱을 지시하기에 적합하다는 점을 언급한다. 또한 ‘크리핑 업’ ‘크립페이스’ 등의 용어 사용 문제를 제기하는 이유로, 크리핑 업이 ‘blacking up’에서 유래했다는 점(Anita Cameron)을 언급하기도 한다. cripping up과 blacking up, 혹은 cripface와 blackface가 함께 배치되며 장애 모방과 인종 모방이 경합하듯 사용되는 양상이 교차적인 정체성을 가진 이들(가령, 흑인 장애인)에게 “하나의 억압만을 선택해야 하는 상황을 만들 수 있다”는 문제점을 짚는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Dom Evans, “Please Stop Comparing Disabled Mimicry to Blackface”, Domevansofficial.com 18 July. 2017(Last Update: 2022-05-15),
    (https://www.domevansofficial.com/2017/07/18/please-stop-comparing-cripping-up-to-blackface/, 검색일: 2025-02-21). ↩︎
  7. 토빈 시버스는 패싱(passing)과 가장(masquerade) 등을 검토하며 강제적 비장애신체화(compulsory able-bodiedness)와 가시성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강제적 비장애신체화는 비장애 신체를 표준으로 제시하며, 그 표준을 확정 짓기 위하여 필요한 예외로서 장애를 묘사하는 논리이다. 능력 이데올로기는 인간의 의도·행동·조건에 대한 인식의 기본으로서 비장애 신체를 강제하며, 이에 대한 예외는 거의 인정을 하지 않는다. (중략) 사실, 능력 이데올로기로 인해, 장애가 더 많이 보일수록 장애인들이 대중의 시선으로부터 억압받고 잊힐 가능성이 더 커진다. 그 가장은 장애가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동시에, 장애가 가장처럼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강조-인용자) 토빈 시버스, 『장애 이론』, 조한진 외 역, 학지사, 2019, 185쪽. ↩︎
  8. 여기서 사용하는 ‘앞무대/뒷무대’ 개념은 어빙 고프먼, 『자아 연출의 사회학』, 진수미 역, 현암사, 2016 참조. ↩︎
  9. 광대 푸포와 멀린의 서커스쇼에서 이들은 여전히 이 쇼에 적극적으로 반응하는 수동적이고도 순진한 관객으로 호명받는다. 쇼가 끝난 직후 짐, 샘, 톰은 이전까지의 관객 역할 수행에 대한 회의적 반응(짐 “어휴”, 샘 “뱀 같은 소리 하네”, 톰 “힘들어”)을 보이지만, 피트는 “재밌다”라고 말한다. 데이비드 프리먼, 위의 글, 21~22쪽. ↩︎
  10. 원작에는 여성혐오적, 인종차별적 시선과 언어가 다수 등장하고, 이에 대한 비판적인 분석으로 작품 창작의 시공간적 배경이 언급될 만하다. <크립스>는 1970년대 캐나다에서 초연된 희곡이자, 작가인 프리먼은 뇌성마비 장애를 가지고 있지만 백인 남성이기 때문이다. 극 중에는 여성 비장애인 손더스(양대은 분)를 향한 남성 인물들의 조롱 섞인 말뿐 아니라, 델마ー뇌성마비를 가진 여성으로 원작에서는 대사로만 존재한다. 이번 낭독극에서는 목소리조차 없이 자막으로만 존재하게 연출하였다ー와 샘 사이의 사건, 그리고 자신의 공통된 처지 즉 장애인에 대한 연민에의 부조리함을 강조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인종차별적 대사들이 등장한다. ↩︎
  11. ‘장애’는 사실상 단일한 무언가로 지칭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여기서 ‘같은 장애’는 수사적 오류로 읽히길 원하며, 이는 장애명이 같은 상태, 혹은 한 장애 당사자가 경험하는 장애를 지칭하기 위하여 사용되었다. ↩︎
  12. 이것이 불가한 이유는 조안 리비에르의 ‘가장으로서의 여성성’을 경유하여 ‘가장(masquerade)으로서의 장애’를 논하는 토빈 시버스의 말을 빌려 설명할 수 있다. “능력 이데올로기에 대한 모욕으로서의 장애는, 능력에 대한 예외를 시야에서 지우는 이데올로기적 충동의 완전하고 지속적인 힘을 느낀다. 능력 이데올로기로 인해, 장애가 더 많이 보일수록 장애인들이 대중의 시선으로부터 억압 받고 잊힐 가능성이 더 커진다. 그 가장은 장애가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동시에, 장애가 가장처럼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토빈 시버스, 위의 책, 185쪽. ↩︎
  13. 일라이 클레어는 자선 모금 방송이 만들어내는 장애 이미지가 문제인 이유에 대하여 ‘장애 이미지 자체가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 “만약 직장에서 일하는 장애인, 학교에 다니는 장애인, 행복하고 헌신적인 관계를 누리는 장애인, 부모, 교사, 활동가, 연기자, 예술가, 변호사, 목수, 간호사인 장애인 같은 이미지가 풍성하다면, 이 동정 잔치(자선 모금 방송-인용자 주)도 지금처럼 심각한 문제가 되진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아직 장애인의 이미지는 그렇게 풍부하지 않다.” 일라이 클레어, 『망명과 자긍심』, 전혜은·제이 역, 현실문화, 2023, 220쪽. ↩︎
  14. 여기서 ‘가장’은 위 각주에서 언급한 토빈 시버스의 설명에 착안한 것으로 ‘자신의 낙인을 관리하기 위하여 도리어 낙인을 잘 보이도록 드러내는 것’을 지칭하기 위하여 사용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토빈 시버스, 위의 책, 181~185쪽 참조. ↩︎
  15. 이 단락에 대한 설명은 연극평론가이자 연구자인 양근애가 캐리 샌달과 아토 퀘이슨을 경유하며 지적한 다음의 표현을 통해서도 보충 가능하다. “재현은 원본이 아니라 다시 표현된 세계를 믿게 만드는 일이라는 점에서, 또 실재 앞에 세운 대리물의 표상이라는 점에서 장애를 재현하는 일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며 도리어 무용한 일이 아닐까. 혹은 재현하려고 하면 할수록 원본으로부터 미끄러지는 일이 아닐까 (중략) 장애를 연기하려고 하면 할수록 실제 장애와는 멀어진”다. 양근애, 「장애연극의 접근성과 재현의 딜레마」, 『한국현대문학연구』 74, 2024, 631~632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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