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아
알렉세이 부대는 들으시오. 그렇다. 나 역시 하나님께서 보내 주신 이런 구성원들과 함께 전투에 나갈 수만 있다면 정말 좋겠다. (중략) 누구를 지키길 원하는가? 내게 대답하라, 누구인가? (중략) 제군들 앞에 놓인 무엇을… 누구를… 지키려는 과업을 수행하고자 하는가? 한마디로 말해, 난 여러분의 전투를 지휘하지 않겠다. 왜냐하면 광대놀음에 참여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광대놀음 때문에 자신의 피를 흘린다는 것은 절대적으로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마를 닦는다) 내 아들들이여, 내 말을 들어라! 나는 상비군 장교로서 독일군과의 모든 전쟁을 치렀다. 이에 대해서는 스투진스키 장군과 미실라옙스키 장군이 증인이다. 나의 양심과 책임감으로 모든 것을, 모든 것을 받아들이겠다…. 제군들에게 경고하건대, 제군들을 사랑하기에 집으로 돌려보낸다.
– 미하일 불가코프, <백위군> 중에서
우크라이나국 지도자 게트만의 포병부대 대령 알렉세이 투르빈은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젊은 장교들과 아직 십 대를 벗어나지 못한 어린 사관생도들 앞에서 부대 해산을 명한다. 지금 당장 견장을 떼고 자신의 지위를 드러낼 수 있는 모든 표식을 없앤 후 조속히 집으로 돌아가도록, 그는 간절한 마음으로 명한다. 그런 후 홀로 남아 서류들을 불태우고 전초부대가 돌아오길 기다려 그들에게도 해산을 명한 후 모두가 집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엄호한다. 그리고 전사한다.
미하일 불가코프의 희곡 <백위군>은 1918년 겨울부터 1919년 초까지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예프현 키이우를 배경으로 한다. 1917년 2월 혁명으로 러시아 황제가 폐위되자 우크라이나는 독립한다. 그러나 볼셰비키 혁명으로 수세에 몰린 우크라이나는 동맹국의 힘으로 이들을 몰아내고자 했고, 1918년 4월 독일은 게트만지도자, 군주 제도를 부활시키고 자신들이 정한 자를 게트만으로 내세운다. 알렉세이와 그의 친구들은 바로 이 게트만 정권하의 군인이다. 그런데 농민과 하층계급의 절대적 지지를 받아 선출된 페틀류라의 군대가 도시 외곽까지 진격해 오자, 게트만은 독일군 제복으로 갈아입고 신분을 위장하여 베를린으로 도망친다. 우크라이나를 버린 것이다. 알렉세이는 게트만과 고위직들이 모두 도망간 자리에 남아 자신이 할 수 있는 마지막 책임을 지려 한다. 무의미한 희생을 막는 것, 불명예와 오욕 속에서 자신이 지킬 수 있는 최선의 것을 지키는 것, 그리고 그 대가로 자신의 생명을 내주는 것, 이것이 알렉세이의 마지막 책임이다.
알렉세이는 혁명기의 영웅이 아니다. 그는 정치적으로 반혁명적이며 반동적인 인물이다. 그는 혼란의 시대에 길을 찾지 못한 인물이다. 모든 권력이 폭력을 앞세워 등장했던 시기, 그는 그 한복판에서 허무하게 스러져 간 인물이다. 불가코프는 “공포와 압박 그리고 모든 종류의 폭력은 그것이 빨간색이든 갈색이든 백색이든 간에 완전히 무모한 것이다.”라고 썼다. 불가코프는 그 어떤 정권에도 또 그 어떤 이념에도 손을 들어주지 않았다. 민족주의를 외치는 해방군도, 새로운 사회를 약속한 혁명군도, 그는 회의하고 또 회의했다. 그는 권력의 폭력적 속성을 간파했고, 혁명의 역동성도 민중에 대한 낭만적인 이상화도 모두 경계했다. 그는 그 모든 약속과 주장 뒤에 숨은 권력 지향적 욕망과 허구를 보았다.
이런 이유로 불가코프의 작품들은 ‘반소비에트적’이라는 낙인 속에 오랫동안 금서였다. 그의 작품이 소비에트 러시아에서 다시 출간된 것은 작가 사후 약 15년이 지난 1956년이다. 소설 <백위군>은 1부와 2부를 발표한 후 3부는 발표하지 못하였고, 희곡으로 개작된 <백위군> 또한 1925년 4월 모스크바예술극장에 첫 번째 판본을 넘겨준 후 검열로 여러 차례의 수정 끝에 <투르빈가의 나날들>이라는 제목으로 1926년 10월 초연되었다. (희곡 <백위군>은 3가지 판본, 9가지의 버전이 존재한다.)
희곡의 원작인 소설의 마지막에서 작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 밤은 계속 흘러갔다. 밤이 새벽을 향해 다가갈 즈음에는 하느님께서 전 세계를 덮어 놓았던 하늘의 푸른 장막 위에 별들이 촘촘히 떠 있었다. (중략) 모든 것-고난, 고통, 피, 굶주림, 전염병-이 지나갔다. 그 칼도 역시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별들은 우리의 존재와 우리의 행위의 그림자가 이 땅에서 사라질 때에도 여전히 남아 있을 것이다. 그것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데 왜 우리는 별을 향해 눈을 돌리지 않는 것일까? 왜?”
계엄의 밤, 자신이 지켜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몰라 혼돈 속에 길을 잃었을 이들을 생각한다. 명예와 자긍심이 오욕으로 바뀌는 순간을 감당해야 했던 이들을 생각한다. 무의미한 피를 흘려야 할 운명에 밤보다 더 깊은 어둠을 느꼈을 이들을 생각한다. 불가고프는 영원한 가치를 추구하려고 했다. 허무한 권력, 무의미한 폭력, 이유 없이 흘려야 하는 피들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무엇이 있다고 믿었다. 오늘, 이 혼란의 시기, 우리가 지켜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 스스로에게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이진아
비평을 필요로 하지 않는 시대에 비평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고민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