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아
순영 옛날에 고향에 살 때 동학군들 몰사죽음한 산속에서 가끔씩 동학 귀신들이 나와서 풍물치고 놀기도 하고 산 넘어 가는 게 뵈기도 한다는 얘기는 들었었지만 내 이 나이에 그런 걸 또 보게 될 줄은 미처 몰랐지. 세상이 어지러워지면 그런 게 보이곤 한다는데 우리 고장에서는 그런 것두 지킴이라고들 불렀다우.
순영 나만큼 나이를 먹으면 사람이란 걸 이해하게 된다우. 우리는 더럽고 저열한 일에 참 쉽게 익숙해지지. 여름날 보리밥 간수하듯 자신을 정신 차려 단속하지 않으면 곧장 쉰 냄새가 나고 곰팡이가 피지.
순영 내가 어렸을 때는 저 혼자 입다물고 속상해하는 일도 죄라고 어른들이 말씀하셨지. 혼자서 마음을 쥐어뜯다 보면 저절로 모질고 독해져서 저도 할퀴고 옆에 있는 사람도 상하게 한다고 나무래셨다우. 얘기합시다. 우린 얘기라도 해야 해요.
– 정복근, <실비명> 중에서
시대적 역할을 다한 후 사라지는 작품이 있다. 당대에는 많은 이들에게 울림을 주고 또 위로도 건넸겠지만, 한 시대가 끝나면서 그와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운명을 지닌 작품이다. 훗날에도 그런 작품을 읽는 이가 있다면, 그들은 문학사가거나 작가론 연구가들일 것이다. 대중에게 읽히고 가 닿는 일은 좀처럼 다시 오지 않는다. 물론 그래도 좋을 일이다. 그렇게 시대적 소명에 응답하고 소임을 다했다면 그건 아름다운 퇴장이다.
<실비명>도 그런 작품이라 생각했다. 등장인물 순영은 수년째 아들 정우를 찾아 헤맨다. 정우는 1980년대 민주화운동 중 실종되었다. 순영은 아들의 시신이라도 찾고자 수없이 기관을 찾아가지만, 처음에는 발견된 아무 변사체나 들이밀며 등산 중 실족사했느니 가출 후 자살했느니 우겨대던 당국자는 급기야 정우라는 인물이 처음부터 존재하지도 않았다고 주장한다. 존재하지 않았기에 실종도 의문사도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당국자는 순영을 ‘불순하고 수상한 무엇인가’ ‘사회에 불안감을 퍼뜨리고 안정에 회의를 품게 하며 끊임없이 의혹을 던지는 누군가’로 몰아간다. 그런 그에게 순영은 말한다. “우리는 더럽고 저열한 일에 참 쉽게 익숙해지지. 여름날 보리밥 간수하듯 자신을 정신 차려 단속하지 않으면 곧장 쉰 냄새가 나고 곰팡이가 피지.”
한 해가 멀다 하고 일어나는 사회적 참사 앞에서 상실과 슬픔을 온전히 느낄 새도 없이 정치가 죽음을 ‘처리’하는 방식으로 인하여 더 절망하고 좌절하는 나날의 연속이다. 국가폭력이니 진상규명이니 하는 피 맺힌 단어를 수많은 ‘순영들’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당국자 앞에서 외치고 있다. 처음부터 존재하지도 않았다는 듯 이젠 그만 잊자고 지워버리자고 하는 그들에 맞서며.
애도는 죽음의 원인을 명백히 밝히고 책임 소재를 명확히 규명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피해 회복과 위로는 그 모든 과정에 희생자의 유가족이 참여하고 발언할 수 있도록 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런데 참사 못지않게 참혹한 것은, 우리가 그 시작점에 단 한 번도 서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순영의 말이 다시 우리의 마음을 울린다. 우리가 혼자여서는 안 된다는, 마주 보고 서로 이야기라도 해야 한다는 그의 말이. 슬픔이 통속이 되지 않기 위하여, 분노가 세상을 바꿀 수 있기 위하여, “얘기합시다. 우린 얘기라도 해야 해요.”
이진아
연극비평을 필요로 하지 않는 시대에 비평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고민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