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영
그레게르스 얄마르, 자네한테는 야생 오리 같은 구석이 있군.
얄마르 야생 오리 같은 구석? 무슨 뜻인가?
그레게르스 자네는 물속 깊이 잠수해서 저 밑바닥 수초를 물고 있어.
얄마르 자네 지금 치명적인 총상으로 아버지와 나의 날개가 부러졌다고 말하는 건가?
그레게르스 그건 아니야. 자네 날개가 부러졌다고 하는 말이 아닐세. 하지만 자넨 독이 가득한 습지에 있어. 서서히 퍼지는 병이 자넬 붙잡고, 자네는 지금 어둠 속에서 죽기 위해 가라앉고 있다고.
얄마르 어둠 속에서 죽어? 이봐, 그레게르스,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만두게.
그레게르스 걱정하지 마, 내가 자네가 다시 떠오르도록 방법을 찾을 걸세. 나도 이제 내 삶에 사명이 있어. 그걸 바로 어제 찾았네.
– 헨리크 입센, <들오리>, 제 3막 중에서
종교와는 상관없이, 평소 신의 분노나 형벌에 관심이 많다. 신화와 설화, 문학 등에서 묘사된 지옥도는 그것을 만들어 낸 인간의 윤리나 결핍, 그리고 두려움을 잘 보여준다. 불교 사후 세계관에 따르면 망자는 49일 동안 총 일곱 번의 심판을 받는다. 49재의 유래가 되기도 하는 이 사후 일곱 번의 심판 중, 다섯 번째 심판대가 바로 염라대왕이 주관하는 ‘발설지옥’이다. 이곳에서 망자는 생전에 ‘말로 지은 죄’를 심판받게 되는데, 주로 거짓말로 남을 속여 해를 끼친 자, 이간질이나 교묘한 말로 사람 사이의 화목을 깨뜨리고 불화를 일으킨 자, 험담으로 남의 마음을 아프게 하거나 성현의 가르침 등을 조롱한 자 등이 그 대상이 된다. 이때 그 심판의 도구로 업경(業鏡)이 등장한다. 업경은 망자의 죄를 비추는 거울이다.
여러 심판대 중, 이 ‘업경’ 앞에 서는 순간을 가끔 상상한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죄, 혹은 기억하지만 잊고자 묻어둔 순간의 파노라마를 ‘업경’이라는 대형 스크린으로, 그것도 혼자가 아니라 심판자와 함께 마주해야 한다니, 여간 껄끄러운 심판대가 아닐 수 없다. 심판자 앞에서 거울에 비친 내가 진실이나 신념이라는 이름으로 누군가를 그럴듯하게 속이고 있을까 봐 무섭다. 그래서일까? 문득 지난날의 부끄러운 소소한 기억들이 떠올라 난데없이 괴로울 때가 있는데, 그럴 때마다 내가 잊은 것은 남들도 좀 적당히 잊어 주었으면 하고, 눙치고 뭉개듯 기도하며 살기도 한다.
여기 ‘업경’의 심판대 앞에서 어떤 반응을 보일까 궁금한 인물이 하나 있다. 노르웨이 극작가 헨리크 입센의 1884년 작 <들오리(The Wild duck)>의 등장인물 ‘그레게르스’다. 그는 자신의 어릴 적 친구인 ‘얄마르’의 결혼 생활 밑바탕에 부유한 거상인 자신의 아버지와 관련한 추악한 진실이 있다고 믿는다. 그 추악한 ‘진실’이란, ‘얄마르’의 아내인 ‘기나’와 자신의 아버지 사이에 있었던 과거의 부정이다. ‘그레게르스’는 자신이 이 ‘추악한 진실’을 알려 주어야 비로소 ‘얄마르’가 온전하고 고결한 삶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믿는다.
‘얄마르’는 아내와 딸, 그리고 아버지와 함께 산다. ‘얄마르’의 아버지 ‘에크달’은 과거 ‘그레게르스’의 아버지와 ‘산림벌채’ 관련 동업을 하였는데, 불법적인 일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르고 풍파를 겪었다. 그는 과거 숲을 누비며 곰을 사냥할 정도로 기개와 활력이 넘치는 군인이었으나, 현재는 ‘다락방 창고’ 안에 토끼나 비둘기 등의 동물들을 넣고 그곳에서 총을 쏘며, 그곳을 일종의 간이 사냥터로 사용하는 노인이다. 그들의 다락방에는 ‘그레게르스’의 아버지에게 총을 맞았다가 살아난 ‘야생 오리’도 있다. ‘얄마르’의 딸 ‘헤드빅’이 정성껏 돌보는 오리다.
‘그레게르스’의 눈에, 이런 ‘얄마르’의 가족은 위태롭다. 다락방 창고는 숲이 아니다. 그들은 진실을 모른 채 거짓된 삶을 살고 있다. 총상을 입고 물속으로 가라앉아 수풀을 부리에 물고 놓지 않는 야생 오리처럼, 죽기를 선택한 모양새다. 그리고 곧, ‘그레게르스’가 믿는 ‘진실’로 인해 ‘얄마르’ 가족은 빠르게 무너지기 시작한다. 얄마르는 자신의 딸 ‘헤드빅’이 자신의 친자식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방황하고, 이 사실을 알게 된 ‘헤드빅’은 큰 충격에 빠진다. 그리고 아버지를 사랑하던 소녀는 비극적인 죽음을 맞는다.
인간의 눈이 밖을 향한 까닭으로 우린 자신보다 자연스럽게 타인을 관찰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쓴다. 빛은 모든 사물을 비추지만, 우리는 빛이 외부 사물에 부딪혀 반사된 것만을 본다. 눈에 보이는 것은 진실인가? ‘얄마르’의 직업은 ‘빛’을 이용하는 사진사다. 사진은 사냥과 동일하게 ‘순간’을 포착한다. 카메라도 총구도 모두 바깥을 향한다. 그런데 과연 사냥과 사진은 무엇을 잡을 수 있나? 빛을 잡아 박제한 순간은 진실인가?
‘그레게르스’를 ‘업경’의 심판대에 세우고 싶다는 충동이 든다. 자신의 진실이 ‘헤드빅’을 죽게 할 줄은 몰랐다고 허탈하게 말하는 그다. 그는 자신의 운명을 ‘식탁에 앉은 열세 번째 사람’과 같다고 말한다. 북유럽 신화에서 ‘열세 번째 사람’은 불화를 일으키는 자, 초대받지 못한 손님을 의미한다. 마치 ‘장님’을 꾀어 ‘빛의 신’ ‘발드루’를 죽인 ‘로키’처럼 말이다. ‘그레게르스’가 이야기하는 ‘진실’이나 ‘이상’은 허망하다.
진실은 무엇인가? 우리 눈앞엔 시시각각 변하는 빛이 있을 뿐이다. 우리는 순간을 박제하여 ‘기억’이라는 이름으로 무언가를 저장하고 우리 앞의 현상을 이해하고자 애쓸 뿐, 진실과 거짓을 명확히 구분할 수 없다. 오히려 우리는 이런 까닭에, 진실이라는 것이 과연 누구에 의해서, 누구를 향해서, 언제 어떻게 다루어지는가에 더 주목해야 한다. 딸의 죽음 앞에서 후회로 울부짖는 ‘얄마르’가 아내인 ‘기나’에게 “신은 왜 이런 가혹한 형벌을 우리에게 내리느냐”고 묻는다. 그들의 삶을 지탱하는 것이 거짓이든 진실이든 간에, 바느질을 하고, 사진을 수정하며, 살아 숨 쉬는 현실을 늘 고치고 기워냈던 아내 ‘기나’가 마침내 얄마르에게 말했다. “우리는 이 아이를 가질 자격이 없었던 거”라고.
‘헤드빅’의 죽음을 두고 ‘얄마르’의 아버지 ‘에크달’은 ‘드디어 숲이 분노했다’고 했다. 북유럽 신화에 ‘숲’은 문명(미드가르드)과 야생 사이의 경계다. 신의 질서와 인간의 혼돈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균형을 지닌 공간이다. 빛과 시간에 따라 늘 모습을 달리하는 ‘숲’이다. 숲과 하늘도 빛과 시간에 따라 모양을 달리하는데 우리는 늘 불변하는 진실을 획책한다. 자신이 가지고 온 악취를 인지하지 못하는 ‘그레게르스’처럼, 우리는 타인의 부도덕함은 사냥개처럼 냄새를 잘 맡지만 스스로의 냄새는 맡지 못한다.
야생 오리는 숲이든 물속이든 어디에든 있을 수 있는 자유가 있다. 창공을 날든, 지푸라기 속에 누워 있든, 마른 웅덩이에서 물을 찾고 앉아 있든, 숨쉬기를 포기하고 물풀이 가득한 바닥으로 잠수를 선택하든, 그것은 삶을 지속하는 한 야생 오리의 자유다. 총을 맞아 날지 못하는 자에게, 너는 야생성을 잃었으니 더 이상 오리가 아니고, 너는 숨을 쉬고 있다고 믿지만 사실 이곳은 물속이고, 너는 병에 걸렸고, 곧 죽을 것이라고 폭격을 가할 수 있는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나의 맹목적 신념과 믿음이 타인에게 폭력이 되기 쉬운 때다. 누구든 식탁의 열세 번째 손님, 즉 서로에게 불청객이 될 수 있다. 진실의 사도인 것처럼 이 세계의 거짓을 폭로하여 너희를 구원하겠다고 눈알을 반짝이거나 연일 뉴스에 나와 떠드는 사람들이 나는 두렵다. 우리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동시에 감각할 수도 없고,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일관되게 포개어 이고 지고 살 수도 없다. 망막에 닿는 것은 이미 과거에 출발한 빛이다. 빛을 박제하는 순간 그것은 또한 과거가 된다. 그러니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관통하는 ‘같은 빛’은 없다. 매일 상을 차리고 구멍 난 옷을 기우며 살아내야 하는 삶에, 너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일치시키고, 불변하는 진실과 거짓을 가려내라고 하는 것은 그야말로 가장 허망한 삶의 위선일지도 모른다.
이 봄에는 숲에서 눈을 감고, 사람 아닌, 그저 새의 말이 듣고 싶다.
Go, go, go, said the bird: humankind Cannot bear very much reality.
가라, 가라, 가라, 새가 말했다. 인류는 너무 많은 실재를 견딜 수 없으니.
-T.S 엘리엇, <사중주>, ‘번트 노튼’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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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의 인용구는 모두 글쓴이가 다시 번역한 것입니다.
이지영
beerock6@gmail.com
리투아니아 Mykolas Romeris University에서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학교와 극장을 오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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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문헌>
헨리크 입센, 『헨리크 입센 희곡 전집 7』 (김미혜 역, 연극과인간, 2022)
헨리크 입센, 『들오리』 (조태준 역, 지만지드라마, 2022)
헨리크 입센, 『인형의 집/유령/민중의 적/들오리』 (소두영 역, 동서문화사, 2023)
Ibsen, Henrik. The Wild Duck. Blackmask Online, 2001, http://www.public-library.uk/ebooks/106/54.pdf (접속일: 2026년 3월 13일)
T.S. 엘리엇, 『사중주 네 편』 (윤혜준 역, 문학과지성사, 20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