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하늘
어떤 별명은 원치 않는 낙인처럼 마음에까지 박혀버리곤 한다. 누구나 별명이 있겠지만 나는 태어날 때부터 있던 큰 점에 관한 별명들이 있다. 점박이다! 멍든 거야? 괴물이다! 어리다는 막강한 힘을 내세운 악마들이 저지른 폭력 앞에서 저항할 수 없던 ‘나’라는 어린 ‘괴물’이 객석에서 ‘공룡과 공룡동생’의 이야기를 보았다. 별명이란 실제의 다양한 면모들과 무관하게 그저 낯설고 이상한 특성만 따와서 붙여지곤 한다. 그에 반해 무대에 놓인 공룡 피규어들은 얼마나 작고 귀엽기만 하던지.
‘공룡’, ‘과’, ‘공룡동생’이라는 존재
<공룡과 공룡동생>백혜경 작/구성, 경지은, 백혜경, 이미라 출연/창작, 두산아트랩 2026, 1.29.~1.31.은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다. ‘공룡동생’ 재영은 작가의 자전적 캐릭터이며 ‘공룡’은 재영의 언니다. ‘공룡’은 ‘지적장애와 비非지적장애 사이를 가리키는 경계선 지능, 즉 경계에 있는’ 인물이다. 우리는 이름도 모르는 이의 장애부터 알게 된다. 공연 중 공룡의 이름은 한 번도 언급되지 않는다. 오직 사전음성소개와 관객과의 대화에서만 공룡의 이름이 ‘재미’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름이 철저히 지워진 ‘공룡’이라는 존재가 더욱 궁금해진다.
작품해설에 따르면 이 공연은 “자신에 의한 자신의 파괴를 끊임없이 상상하는 재영으로부터 시작한다.” “관객들은 ‘근처에서 말하는 당사자의 이야기’를 마주하며, ‘스스로 말하기’를 위한 ‘대신 말하기’의 과정을 함께하게 된다.” 오랜 시간 공룡과 함께 살아온 공룡동생의 시선과 해석이 담긴 작품으로, 어린이·청소년기, 여성, 가정 폭력, 아동학대, 장애, 부양의무, 돌봄, 생과 사, 질병 등 여러 소수자성의 맥락 속에서 읽을 수 있다.
극에는 현실에서 이들에게 부재했던 어른, 보호자, ‘곁’과 같은 존재로서 ‘과’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과’는 공연의 시각적 정보를 자신의 관점에서 전달하면서 등장인물들과 관객의 연결을 확장해 준다. 음성해설사의 역할을 등장인물로 녹여낸 점이 흥미롭다. ‘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언니와 나의 관계를 나타내기도 한다. 그리하여 연극에는 ‘공룡’, ‘과’, ‘공룡동생’이라는 이름으로 스스로를 호명하는 세 명의 주체가 등장한다. 이들은 놀림당하는 약자에서 벗어나 가해자들을 소환해 연극의 방식으로 처벌하며, 본래의 이름을 되찾기 위한 여정을 떠난다.
이들이 도착한 쓰레기 섬은 어린아이 둘이 마주한 폭력의 세상일 것이다. 동시에 공룡다움이 그 자체로 매력적으로 펼쳐지는 공간이며, 공룡의 송곳니를 찾아 헤매는 환상의 세계이기도 하다. 이빨 빠진 공룡의 모습은 무섭긴커녕 귀엽고 우스꽝스러우며 연약한 인상을 준다. 그러나 이때, 약자인 줄만 알았던 공룡이 “스스로 숨을 막은 채 자유낙하를 갈망하던” 동생을 위기의 순간으로부터 구해낸다. 그렇게 쓰레기 섬에서 재회한 자매는 타의에 의해 잃어버린 송곳니를 찾아 본래의 자리에 다시 씌움으로써 그 이름을 되찾는 듯 보인다. 그러나 이것도 잠시, 송곳니가 어금니로 치환되는 순간, 환상도 공연도 다시 현실 세계로 돌아오게 된다.
동료 시민으로서 ‘연루되는 관객’
작가는 이 대본을, 구토하고 울면서 썼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과거에 머무르지 않는 현재진행형이다. 짐작건대 이런 용기를 내기까지 재영에게는 숨이 멎을 정도로 힘든 순간이 계속돼왔다는 걸 알 수 있다. 재영은 매일 죽고 싶다는 언니의 병원비를 내느라 그동안 모아온 아르바이트비까지 다 지출한다. 부모의 부재 속에 홀로 감당해야 하는 가족 돌봄으로 재영은 지쳐가고 마침내 무대 벽에 기대어 쓰러지고 만다. 이러한 재영의 무너짐은 ‘시설 입소’, ‘장애인 가족 동반 자살’과 같은 비극적인 현실을 연상케 한다. 이는 가족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부양의무제도라는 정책의 문제이며, 시민 모두와 관련된 사회 공동체의 문제이다. 모든 인간은 존엄하기에 비극은 결코 일어나선 안 된다.
이 극은 착하고 희생하는 비장애 가족 구성원의 서사가 아니다. 관객은 재영의 편에서만 그의 고통에 공감하지는 않는다. 관객은 이 자매의 독립성과 연대감을 모두 지지하는 동료 시민으로서 연극에 연루된다. 극 중 ‘재미’의 이름이 부재하듯 현실에서 존재 자체가 부정된 ‘재미’들의 이름을 떠올려본다. ‘재미’가 직접 하는 이야기는 어떤 방식으로 이 세상에 발화되고 있을까. 이렇듯 이 작품은 연극 바깥의 삶으로 우리를 연결 짓는다.
공연은 유년기와 성인이 된 지금 그리고 환상 세계까지 시공간을 넘나들며 펼쳐진다. 이 과정에서 ‘공룡’, ‘과’, ‘공룡동생’이라는 세 역할을 세 명의 배우가 번갈아 가며 혹은 한 인물을 둘이 동시에 발화하며 연기한다. 이로써 거리 두기, 입장 바꾸기, 연대하기가 가능해진다. 연극보다 더 극적인 현실에서는 폭력적인 환경에 취약하게 놓인 채 어린이와 청소년 시절을 보내야 했던 인물들이, 무대 위에서는 혼자가 아닌 동료와 함께 그 시절을 마주하고 있는 것이다. 극 중 대사처럼 이 세상에 이유 없이 그냥 폭력을 휘두르는 사람이 있어선 안 되기에, 무대 위에 가해자는 등장하지 않는다. 무대는 피해자인 아이들을 주목한다. 가정 폭력을 일삼던 부모나 괜히 냄새난다고 놀리던 또래 아이들로부터 늘 상처 받아 온 아이들이, 이제 그들만의 무대 위에서 오롯이 말하는 것이다.
재영은 자신과 언니를 놀리고 괴롭히던 사람들을 향해 무대 뒤편에서 혼자 욕하며 힘껏 주먹질한다. 구석에서 스스로 주먹 아파가며 솜뭉치에 분노하는 선한 방식의 복수가 창작진의 언어여서 다행이다. 인기 없는 가수를 좋아하는 ‘재미’처럼 자신과 같은 소수자를 위하는 마음이 이 자매에게는 자리하고 있었다. 이런 면에서 이 연극은 분노로 자신을 망가뜨리지 않고 예술로 건강하게 표현해내는 방식이 되기도 한다.
어린 시절 재미와 재영 자매가 함께 방에서 뒹굴고 장난치고 싸우며 보낸 일상이 고스란히 연극이 되었다. 우리가 어릴 때부터 좁은 방을 꾸미고 관계 맺고 표현하는 것들에 이미 연극성이 있는 것이다. 사소한 것들의 재미와 그것을 소중하게 여길 줄 아는 마음이 창작자 백혜경의 연극을 만들고 있다고 생각한다. 장애 재현의 윤리를 검토하며 접근성장애유무에 관계없이 모든 창작자 및 관객이 공연을 만들고 관람할 수 있는 환경을 녹여내고 배우들의 몸으로 일궈낸 세계가 정성스럽고 감각적이었다. 어떤 이야기는 적절한 답변보다 옆에서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때가 있듯이, 관객이었던 나도 ‘과’와 같은 좋은 동료가 되고 싶은 마음이다.
접근성에 대한 발견
접근성에 대해서 발견한 것들이 있다. 공연 시작 10분 전쯤 같이 관람하는 친구가 사전음성소개를 못 듣고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객석에서 급하게 위스퍼링 음성해설관객 옆에서 속삭이며 시각적 정보를 전달하는 음성해설을 직접 하게 되었다. 내가 사전음성소개를 미리 듣고 어려웠던 부분을 구간 반복하며 이해한 게 도움이 됐고, 일상에 스며있는 음성해설의 의미를 되짚어 볼 수 있었다. 공룡 가면과 피규어들은 직접 만져볼 수 있었다면 모양새에 대한 이해가 훨씬 쉬웠을 것이다. 무엇보다 공연 중 가면의 헬멧 크기를 조절하는 낯선 소리가 날 때마다 귀가 쫑긋 섰다. 쓰레기 섬을 구현하기 위해 공룡 가면과 공간을 재활용품들로 꾸미고, 자막 스크린의 아랫단을 거칠게 잘라서 접근성이 공연에 스며들게 한 게 재밌었다.
음성해설은 주로 ‘과’의 역할이었기에 놓쳐지는 부분이 조금은 있었으나, 배우들이 번갈아 가며 해설하는데도 헷갈리지 않았다. 오히려 이 극의 말하기 방식인 역할을 바꿔가며 수행하고, 같이 말하고, 관찰자 시점에서 생동감 있게 말하는 음성해설이 자연스러웠다. 처음 세 배우가 등장해서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미소 지을 때는 나의 마음이 환하게 열리는 순간이었다. 누군가는 이런 시각적인 순간을 포착하고 공연의 감상을 이루는 중요한 요소로 여긴다. 음성해설을 대체하는 방법으로, 배경음악의 분위기나 기분 좋은 향수 냄새, 엷은 웃음소리 같은 게 가능할지 생각해보았다.
가장 고민되는 지점은 시각적으로 화려한 장면의 음성해설이다. 연극적 상상력과 현란한 연기술을 음성해설이 따라붙는 방식으로는 한계가 있는 듯하다. 이를테면 비닐과 털을 뭉쳐 만든 고양이와 앵무새를 배우가 움직이며 이중으로 연기할 때 그 시각적 재미를 얼마만큼 전달할 수 있을까. 모기를 흉내 내는 음성만이 아닌 재밌는 몸짓들을 어떻게 전달해야 할까. 객석에 호응을 유도할 때 동작만이 아닌 음성 안내가 함께였다면 어땠을까. 무대 뒷벽에 파편처럼 퍼졌던 조명의 아름다움을 어떻게 전달해야 할까. 음향으로 풍성해진 공간의 소리는 한글자막해설의 납작한 문자 말고 어떻게 보여줄 수 있을까. 물론 정보가 많으면 오히려 방해가 될 수 있고, 접근성이 모든 걸 완벽하게 표현하긴 어렵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공연을 감각하는 여러 방식에 대해 열어두고 함께 고민해보고 싶다.
안전한 창작 환경
창작진은 연습 과정에서, 폭력에 노출된 환경을 재현할 때 찾아올 수 있는 위험으로부터 서로를 보호하는 언어를 만들어 사용했다고 한다. 연습 도중 동료가 염려되는 순간이 찾아오면 그 동료에게 다가가 신호를 보내는 것이다. 한 손의 엄지와 검지의 손끝을 맞대어 동그라미를 만들고, 나머지 세 손가락을 펴서 손바닥이 상대를 향한다. 마치 오케이라는 제스처와 비슷하다. 이 신호를 받은 동료는 자신의 상태를 알리는 두 가지 신호로 답할 수 있다. 괜찮은 경우 상대방과 똑같은 손 모양을 만들며, 서로의 동그라미로 고리를 건다. 이 모양은 한국수어에서 ‘관계, 연결’이라는 의미라서 눈에 띄었다. 수어가 아니더라도 서로를 챙기고 보살피는 마음이 느껴졌다. 괜찮지 않은 경우엔 상대의 손에 깍지를 낀다. 이때 상대의 동그라미가 펴지는지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그저 힘든 마음을 손으로 꼭 잡아주는 것이다.
이제껏 ‘공룡과 공룡동생’이라는 이름은 타의에 의해 지어진 차별과 혐오의 이름이었다. 장애여성공감이 20주년 선언문(2018)에서 ‘불구’라는 차별의 언어를 저항과 투쟁의 언어로 탈바꿈시켜 ‘시대와 불화하는 불구의 정치’를 선언한 것처럼, 이 공연 제목도 같은 맥락 안에 있다. 이제 우리는 ‘공룡과 공룡동생’이라는 이름을 다시 쓴다. 이름에 씌워진 억압과 차별을 폭로하고 선한 방식으로 분노하며 가려진 진짜 이름을 호명한다. 그리하여 ‘공룡’, ‘과’, ‘공룡동생’ 그리고 ‘재미’, ‘와’, ‘재영’은 우리의 해방의 이름인 것이다.
박하늘
연기와 창작을 수행하고, 실천적 접근권을 탐구하고 있다.

